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40화 (140/313)

렌카의 입이 벌어졌다.

사람을 케이지 안에 가둬놓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니 어이가 없는 모양.

멍하니 철창 밖의 나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안 먹겠다는 뜻이었다.

“그러지 말고 먹어요.”

“.... 너 혹시 진지하게 어디 아파? 정신병 같은 거 있어...?”

“왜요?”

“왜냐니...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생각이야...?”

“저번에 취향이라고 했잖아요.”

“취향이... 이쪽이야...? 원래 이런 거 좋아해?”

너도 이런 거 좋아하잖아.

아직 자각하진 못하고 있겠지만.

“원래라고는 할 수 없는데, 부장이 이쪽이랑 너무 잘 어울려서...”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이게 잘 어울리는 거라고?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모습이?”

“예. 너무 예뻐요.”

그 말에 렌카의 얼굴이 조금 불그스름해졌다.

내 칭찬에서 진심을 느낀 모양. 이런 상황에서도 쑥스러워할 줄은 몰랐는데... 대단하다.

역시 너는 훌륭한 노예야. 벌써부터 쭉쭉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이 주인님은 기뻐요.

카라멜이 잔뜩 묻어있는 팝콘 하나를 꺼내 철창 사이로 내민 내가 말했다.

“아 하세요.”

“뭐...? 또, 또라이 아니야...?”

“일찍 가기 싫어요?”

협박성 발언에 두 눈을 질끈 감는 렌카.

분에 겨워 이빨을 맞부디친 그녀가 내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입을 벌렸다.

그 안으로 팝콘을 쏙 집어넣자, 그녀가 입을 오물거렸다.

“맛있어요?”

“.....”

“맛있죠?”

“맛있어...! 맛있다고...!”

“하나 더 먹을래요?”

“안 먹어...!”

“맛있는데 왜 안 먹지? 알았어요.”

어깨를 으쓱인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가 편하게 누웠다.

이제부터 어떻게 되나 보자고.

아예 무관심으로 일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런 컨셉 플레이에 적응이 안 된 상태니까.

나 또한 이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에, 일단은 최대한 렌카의 편의를 봐줄 생각이었다.

**

렌카는 영화가 시작된 지 30분이 지났을 때쯤 조용해졌다.

발악을 해봐야 혼자서는 나갈 수조차 없는 케이지 안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영화 관람이었다.

찰싹-!

[아악! 개새끼야...! 아프잖아...!]

가슴에 채찍질을 당한 여자의 타박에, 남자가 깜짝 놀라더니 채찍을 내려놓는다.

[네, 네가 때리라며...! 아파?]

[누가 그렇게 세게 때리랬어!? 그,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근데 왜 나한테 반말해...? 주인님이라고 해야 되잖아.]

[아, 맞다...]

BDSM는 처음이었던 두 남녀의 어색한 플레이.

야릇함 속에 코믹함이 담겨있는데, 나름 괜찮다.

근데 왜 이게 R15+ 등급이지? R18+는 받아야할 것 같은데.

두 눈은 TV에 고정한 채로 눈동자만 돌려 렌카를 쳐다보니,

“.... 하... 짜증나...”

케이지 안에서 자신의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보고 있었다.

딱딱한 바닥에 누워 한손을 위로 뻗어 스스로 팔베개를 해보거나, 몸을 뒤척여보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TV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고 있었는데, 렌카 또한 이 영화를 제법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실에 순응하고 즐기는 게 보기 좋아. 앞으로도 자주 보여주렴.

그렇게 1시간이 지났을 무렵,

찰싹!

[아아악! 주인님...! 아파요... 조금만 살살 때려주세요...!]

[입 닥쳐.]

두 주인공의 플레이가 제법 능숙해졌을 즈음, 철창에 등을 기댄 채로 영화를 보고 있던 렌카가 힘없이 나를 불렀다.

“저... 마츠다...”

저 목소리가 낑낑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건 왜일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눈으로만 렌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혼자 찔끔한 렌카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 화장실은 어떻게 해...?”

“.....”

“대답해... 나 화장실 가고 싶으면 어떻게 하냐고...”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쳐다보기만 하는 날 보며 느끼는 바가 있었던 걸까?

렌카의 말투가 조금 공손해졌다.

“대, 대답해줘...”

말투에 공격적인 면이 조금 있긴 하지만, 아까처럼 바락바락 대드는 건 상당부분 사라졌다.

상상이상으로 저 자리가 불편해서, 일단 내게 잘 보인 뒤에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건가?

케이지의 면적이 넓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케이지와 비교를 했을 때다.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있고,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는 이상 당연히 답답하겠지.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물었다.

“화장실 가고 싶어요?”

“지금은 아닌데... 만약 가고 싶으면...”

“못 가요.”

“.... 뭐?”

“못 간다고.”

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렌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방긋 미소 지은 내가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농담이고, 가고 싶을 때 말씀하세요.”

“아, 알았어...”

그 대화를 끝으로,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후 30분이 지나났을 시점,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사랑해.]

[나도 사랑해.]

두 주인공이 서로를 향한 진심을 드러내며 키스를 하고, 이어서 화면이 서서히 까맣게 변하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것으로 두 시간 안팎에 걸친 영화는 끝.

나쁘지 않은 영화다. 스토리라인은 그냥저냥 그랬지만, 관객들이 불쾌하지 않게끔 BDSM 요소를 풀어주는 게 좋았다.

평점이 꽤 높은 이유가 있었구나.

다 먹은 과자봉지를 쓰레기통에 집어넣은 나는 렌카가 뭘 하는지 슬쩍 확인해보았다.

TV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여운에 잠긴 건가?

영화가 재미있었나보다.

“저... 마츠다...”

한참동안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렌카의 부름.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켠 내가 대답했다.

“왜요.”

“나 목마른데... 물 좀 줄 수 있어...?”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병을 하나 꺼냈다.

이후 케이지로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그렇게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잘했어요.”

“.....”

말없이 고개를 약간 들어 날 올려다보는 그녀.

표정이 워낙 애매해서, 수치스러운 건지, 부끄러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둘 다일 수도 있겠네.

생수 뚜껑을 연 나는 입구를 철창 사이로 집어넣었다.

“드세요.”

“이, 이렇게 마시라고...?”

“철창 사이가 좁아서 페트병을 드릴 수가 없잖아요.”

“.... 그렇긴 한데... 그냥 나가서 마시게 해주면 안 돼...?”

“안 됩니다.”

“나 등이랑 엉덩이가 아파...”

이번엔 동정심 유발 작전인가?

아니, 아픈 건 진심일 터였다.

등을 굽힌 채로 딱딱한 바닥에 두 시간 가까이 앉아있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음... 어떡할까요? 계획에 없던 건데.”

“부탁해... 화장실도 가고 싶어...”

“나가게 해주면 말 잘 들을 거예요?”

“응... 잘 들을게...”

“도망 안 갈 거야?”

“도, 도망을 왜 가...! 가면 더 큰일 나는 걸 아는데...”

영화를 본 직후라 그런가? 마인드가 잘 되어있잖아.

자꾸 꼴리게 하지 마라. 그 안에서 빨라고 시킨다?

생수 뚜껑을 닫은 나는 고민을 하는 척 턱을 긁적였다.

“나갔다가 물 마시고, 볼일만 본 다음 다시 들어갈 거죠?”

“.... 쉬게 해줘...”

“얼마나?”

“하, 한 시간 정도...?”

“그렇게 많이 쉬려고요?”

“야...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나 샤워도 하고 싶어... 운동하다 온 거 알잖아...”

“좋은 냄새밖에 안 나는데.”

그 말에 렌카가 숨을 훅 들이켰다.

내가 진중한 얼굴로 칭찬을 해주어서 당혹스러운 듯했다.

“그래도 찜찜하니까...”

“샤워시간은 30분이면 되죠?”

“응... 충분해.”

아까처럼 한 시간을 달라고는 안 하네.

하긴, 요령을 피우다가 내 눈밖에 나면 귀가가 늦어질 테니 저럴 만도 하겠지.

마지못한 척 한숨을 푸욱 내쉰 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케이지 입구로 자리를 옮겼다.

그에 렌카가 반색을 하더니 입구 앞으로 기어왔다.

얼른 문을 열어달라는 그녀의 눈빛을 빤히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저는 부장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되는데 배려를 해주려 하고 있습니다. 알죠?”

“알아...”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요?”

“.... 고마워...?”

“그렇죠. 감사인사를 해야 됩니다. 잘했어요.”

최대한 나긋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마치 첫 걸음마를 한 아이를 칭찬하듯 말하자, 렌카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욕스러움이 담긴 표정. 그러나 그 안에 어디인지 모르게 약간... 아주 약간 기뻐하는 기색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만족스런 낯으로 상당히 누그러진 렌카를 보던 나는 자물쇠에 열쇠를 꽂고 옆으로 돌렸다.

철컥.

케이지의 문을 열고 렌카에게 손을 내밀자, 잠시 밍기적거린 그녀가 내민 손을 맞잡고는 안에서 기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내 손에서 생수병을 빼앗듯 가져가는 그녀.

벌컥벌컥 물을 들이켠 그녀는 날 돌아보면서,

“씨이...”

의외로 귀여운 감탄사를 내뱉으며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 뭐가...”

“방금 욕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씨...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아니야. 잘못 들었어.”

“그래요?”

“응. 그런 거야.”

“아닌데?”

“아닌 게 아니고 맞아... 나 샤워하러 갈게.”

내 눈치를 흘끔흘끔 보며 욕실로 향하는 렌카.

도망치듯 발을 놀리는 모습이 웃기다.

까면 깔수록 신선한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아직 시간은 많다.

오늘 하루 아주 잘 즐겨줘야지.

물론 렌카를 교육시키는 것도 잊지 말고.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