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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41화 (141/313)

<141화 > 몸으로 시간을 산다

샤워를 하고 나온 렌카의 머리는 허리보다 더욱 아래로 내려와 있었다.

항상 포니테일, 그리고 호면을 쓰기 위해 뒷머리로 윗머리 전체를 덮고 두건만 쓴 모습을 봤었는데... 살짝 젖어있는 기다란 생머리를 보니 새롭게 느낌이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난리야?"

무릎까지 내려오는 롱 타올로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는 그녀.

거긴 나중에 충분히 볼 수 있는데, 괜한 오해를 하고 있다.

그나저나 케이지에서 나오니까 다시 공격적으로 변하네?

울분이 많이 쌓여있었나보다.

저 좁아터진 곳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상상해보면 짜증이 나긴 하니 이해한다.

"난리?"

"... 일단 밥부터 먹으러 다녀올게."

화제를 돌리는 렌카를 보며 피식한 내가 말했다.

"도망가려는 건 아니고?"

“안 간다고 말했잖아..."

"알았어요. 화내지 마세요. 밥은 같이 먹죠."

"굳이 그래야 돼..?"

“가만 보면 부장은 빨리 가고 싶은 건지, 아니면 하루를 통으로 채우고 싶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 진짜...! 뭐 먹을 건데..!”

틱틱대는 렌카를 지그시 바라보자, 그녀가 기세를 한층 죽이며 말을 이었다.

“무, 뭐 먹을 거냐고....”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난... 초밥이 좋아. 연어초밥..."

‘아무거나'라는 대답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콕 집어서 연어초밥이라고 말하는 게 웃기다.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룸서비스 메뉴를 살펴보았다.

모둠초밥이 있긴 있지만, 러브호텔에 따로 전문가가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맛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배달로 시킬게요?"

“마음대로 해... 나 머리 말려도 돼?”

"그런 것까지 일일이 허락받을 필요는 없어요. 말리는 거 도와줄까요?”

"괜찮아."

싸늘하게 대답한 렌카가 화장대에 가서 앉았다.

머리가 워낙 길어 말리는데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는데, 매일 저러면 참 고생일 것 같다.

오랜 시간 끝에 머리를 다 말린 렌카가 주뼛주뼛 섰다.

그런 그녀와 휴대폰 시간을 번갈아 쳐다본 내가 말했다.

“앞으로 35분 남았습니다.”

“뭐가....?"

"뭐긴요. 쉬는 시간이지."

그 말에 렌카가 발끈했다.

“바, 밥이 오는 시간이랑 먹는 시간은 휴게시간에서 빼줘야지! 그게 도리잖아!"

“가지가지하시네요. 샤워시간만 빼줬으면 됐지, 바라는 게 왜 이렇게 많아요?”

“네가 너무 악독하다고는 생각 안 해?”

"저 안이 그렇게 답답했어요?"

“엄청 답답해! 네가 들어가

봐....!”

"굳이 그럴 이유가 있나요?"

어깨를 으쓱이며 넉살을 떠는 나를, 렌카가 원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한 발을 크게 내딛으면서, 그녀와 딱 달라붙을 정도로 가까이 가면 된다.

저벅.

“그래서, 불만 있어요?"

한걸음 성큼 걸어가 렌카의 앞에 우뚝 선 나는, 그녀가 살짝 움찔하면서도 날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기세에 눌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제법이다.

".... 있어. 식사 후에 1시간 휴식하게 해줘.”

똑똑.

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누고 렌카와의 눈싸움을 이어가고 있는데, 현관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배달시킨 초밥이 온 것이다.

“밥 먹을까요?”

말돌리지 마."

“배달원이 기다리잖아요.”

“지금 나한테서 둥지면 승낙한 걸로 알 거야."

우리 렌카는 고집이 아주 강하네.

돌아가서 혼자 있을 때, 자그마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으려나 싶다.

쉬는 시간가지고 나와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라며 말이다.

애초에 식사시간에 쉬는 시간을 포함시킬 마음도 없었기에, 나는 렌카의 강력한 의지에 자비를 베풀어주기로 했다.

꼭 1시간동안 쉬어야겠어요?"

"응."

“부장의 고집은 이번 한 번만 들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그래,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오면 뭔들 못해주겠니.

앞으로도 착하게 굴어라.

**

자그마한 2인용 탁상에서, 우린 서로 마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초밥을 먹었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우물거리는 렌카.

저러면 음식이 목 안으로 들어가긴 하는지 모르겠다.

“마츠다.”

나름 조신하게 식사를 하던 렌카의 부름.

와사비가 잘 풀린 간장에 초밥 끄트머리를 톡 찍은 내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요.”

"물어볼게 있어."

“물어봐요."

“넌 날 그냥 괴롭히고 싶은 거지?"

"아뇨."

“그럼 왜 첫 번째 소원도, 두 번째 소원도, 그리고 지금 마지막 소원도 이런 걸로 쓰는 건데?”

"부장이 예뻐서요.”

"야...! 이상한 소리로 상황을 넘기려고 하지 마..."

은근히 좋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한 소리라니.

솔직하지 못하기는... 앙칼진 것.

코웃음을 친 내가 말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부장은 뭔가를 잘못 알고 계시네요?”

“뭐가?"

“마지막 소원은 다음에 빌려고 했는데요.”

“무슨 소리야...? 지금 이 짓이 끝나면 이제 내 소원만 남게 되는 건데? 너는 세 번 다 쓴 거잖아. 혹시 머리가 안 좋아?"

“이상하네요. 저는 부장더러 시간 비워놓으라고, 그냥 토요일 날 여기 오라고만 말했습니다. 소원은 언급하지도 않았어요."

“.... 뭐....?"

일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렌카.

입을 떡 벌린 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해보던 그녀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가 약속을 잡았을 때, 소원이라는 얘긴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너... 너...”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사시나무가 떨리듯,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데,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렌카의 반응 중에서 가장 격하다.

장관이다. 장관이야.

한동안 온몸에 분노를 쌓아가던 그녀는,

"야이개....

곧 자신의 예쁜 입을 열며 내게 험한 말을 하려고 했다.

그녀의 입이 열리는 타이밍에 맞춰, 나는 여유롭게 한손을 들어올렸다.

“농담입니다. 진정하세요."

그에 렌카의 입이 앙다물어지고, 그녀의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간 얼굴이 조금은 진정되어갔다.

“저, 정말이지...? 그냥 말장난이었지....?"

“원래는 우기려고 했는데, 오늘 힘들어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냥 소원으로 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거 맞지...? 확실하지?"

나는 선심 쓰듯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니까요."

“....됐어 그럼...

“근데 방금 욕하려고 했죠?”

"아니야...

"그랬잖아요."

"야...! 여기서 욕이 안 나올 사람이 있어...?"

왜 자꾸 한 번 틀려고 해. 순순히 인정하면 얼마나 좋아?

물론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더 심하게 대할까봐 걱정스러운 것도 있을 테니 이해해주마.

몇 개 남은 초밥을 입 안에 털어넣은 나는, 내가 먹었던 초밥 용기를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으면 편히 쉬어요. 일부러 느릿느릿 먹는 거 티 나니까 적당히 하시고."

날카로운 지적에 찔끔한 렌카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알았어...

**

렌카는 초밥을 먹을 때 앉아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침대를 차지하고 있어서 눈치가 보여 저러는 모양인데... 나 같으면 얼굴에 철판 깔고 침대에 누웠겠다.

나는 사심도 채울 겸 렌카를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부장."

“왜...”

“옆에 와서 누워요. 지금 엄청 불편해보여요.”

"난... 괜찮아."

“등받이도 없는 의자라 허리 아플 텐데? 그러지 말고 누워요."

"......"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난 렌카가 침대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레 누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확실히 불편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군말 없이 오는 걸 보면.

정자세로 천장을 보며 누운 그녀는 자신의 복부를 손으로 가려보려고 하다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불을 잡아당기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덮고 있어 그저 손만 올려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픽 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렌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준 뒤 몸을 옆으로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턱을 조금 당기고 골반을 움직여 나와 거리를 두려는 렌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콧속으로 솔솔 들어오는 블루베리 향을 맡으며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편해요?"

“네가 쳐다봐서 불편해...”

“솔직하네요. 근데 부장."

“왜...”

“턱 한 번만 만져 봐도 돼요?"

"제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왜요? 마지막 소원도 이걸로 퉁쳐주는데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아요?"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

“그럼 이렇게 할까요? 턱 만지게 해주면 1시간 추가로 쉬게 해줄게요.”

“뭐...?"

몸을 뒤척여 날 등져 누우려던 렌카가 멈칫했다.

귀가 쫑긋하는 것 같은데, 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시간...? 진심이야....?"

의심이 가득 섞여있는 렌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예, 진심입니다. 솔직히 부장도 저기 들어가긴 싫잖아요. 불편한 건 기본이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도 파괴되는 것 같고...맞죠?"

"......"

침묵으로 일관하는 그녀.

내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

“거 봐요. 턱 한 번 내주고 1시간 추가로 쉴 수 있으면 부장에게도, 저에게도 좋은 거 아닌가?"

태연스런 제안에, 렌카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어찌할까 진심으로 고민해보는 듯한 표정․

한동안 시선을 가만두지 못하던 그녀는, 이내 결심을 마쳤는지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두 시간 빼줘. 총 세 시간 쉽게."

“장난해요?"

“장난아니야...! 그 정도는 줘야 수지가 맞지...

"안 할래요 그럼."

시큰둥한 듯 콧방귀를 낀 내가 몸을 돌리려고 하자, 렌카가 다급히 말을 정정했다.

"하, 한 시간

반...!”

그에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곧바로 렌카의 턱에 손을 대고, 그 밑을 살살 긁었다.

"허어억!"

거의 감전이라도 된 것 마냥 침대에서 몸을 튕기며 기겁을 하는 렌카.

설마 예고도 없이 들이댈 줄은 몰랐나보다.

"괜찮아요. 옳지."

마치 새끼강아지를 다루는 것 같은 발언에, 렌카가 발끈했다.

그러나 딱히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기분이 나쁜 듯한 표정만 지은 채로 내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조금 진정이 된 렌카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나는,

“예쁘네요. 진짜로.”

뜬금없이 그녀를 칭찬했다.

그러자 내게 턱을 내어준 렌카가 인상을 더욱 구겼다.

"시끄러워... 그냥 만지기만 해. 대화하는 건 거래에 없었잖아...."

“그냥 하는 말인데요. 부장은 조용히 있어도 돼요."

“... 변태 새끼...”

"칭찬 고마워요.”

시종일관 평온한 말투에 안도감을 느꼈던 걸까?

렌카의 턱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무의식적으로 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주인에게 잘 교육된 강아지 같은 모습에 실소를 짓자, 자신이 저러한 행동을 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렌카가 퉁명스레 물었다.

"어, 언제까지 만질 건데...?"

"1시간 30분 쉬게 해줄 거니까, 1분 30초만 하면 되죠?”

".... 좋아."

나와의 거래를 끝낸 그녀의 턱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리고 렌카는, 자신이 몸이 노곤해져가는 것도, 눈에 점점 힘이 풀려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그저 시간만을 재고 있었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겨보려나?

만약 그렇게 되면 혼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이불을 뻥뻥 차겠지?

상상해보니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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