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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42화 (142/313)

<142화 > 또 다른 거래

쉬고 있는 렌카의 한쪽 입꼬리는 아주아주 미세하게 올라가있었다.

푹신한 침대와 두꺼운 이불로 인해 평온함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있는 시간에 조금은 적응을 한 건지, 아니면 심력을 어마어마하게 쓰다가 침대에 누우니 편안해진 건지는 잘 모르겠다.

집중해서 TV를 보다가 가끔 코미디언이 재미있는 개그를 하면 조용히 웃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누군가와 문자를 하거나...

그렇게 시간을 보낸 렌카는, 약속한 시간을 초과했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농땡이를 피우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 30분을 더 쉬게 해주었다.

이후 3시간이 지났을 시점에 렌카에게 말했다.

"시간됐습니다."

“.....하아....

곧장 한숨을 푸욱 내쉬는 그녀.

편히 있다가 다시 조교용 케이지로 들어가려니 눈앞이 막막한 듯했다.

굴욕적인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불편하지?

위아래로 조금만 더 넓었다면, 바닥이 조금만 더 푹신했다면 어찌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편의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무자비한 케이지라서 짜증이 나기도 할 거다.

"이제 들어갈까요?”

“나 말 잘 들었잖아... 이제는 보내줘도 되지 않아....?"

“엄밀히 말하면 잘 들은 건 아니죠. 제 앞에서 계속 떽떽거렸잖아요."

“떽떽거리다니... 말이 심하잖아..."

심하다고요? 부장이 저한테 욕한 건 안심하고?"

"......"

“할 말 없죠?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보내드리긴 할 테지만, 그래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얼른 들어가요."

"......"

고개를 돌려버린 채로 가만히 있는 렌카.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은근한 투정을 부리고 있는 그녀의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위로 잡아당겼다.

반강제적으로 일으켜지던 렌카의 몸에서부터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딸려가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빡 준 것이다.

무언의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이러지 말고 일어나요."

“싫어.... 그리고 누가 내 몸 만지래? 허락 없이 만졌으니까 1시간 더 쉴 거야..."

아까부터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내던 나는 렌카의 응석을 듣고 빵 터져버리고 말았다.

역시 렌카는 귀여운 게 맞다. 치나미와는 다른 쪽이라서 신선하고.

"웃지 마...! 짜증나게...!"

얼굴이 벌개진 채로 씩씩대는 모습도 깜찍하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줘라.

여전히 렌카의 한쪽 손목을 잡고 있던 나는 엄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근은 충분히 줬다. 이젠 채찍을 휘두를 차례다.

"일어나요. 다른 소원으로 바꿔버리기 전에."

“그,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소원은 이미 썼는데...!”

“근데 부장이 안 하려고 하잖아요. 아니면 억지로 집어넣고 다섯 시간동안 있게 해줘요?"

"너 지금 엄청 무서운 거 알아? 사이코 같아... 밖에서 정상인처럼 하고 다니지 마... 다른 사람들도 네 이런 모습을 알아야 돼...

“부장만 알면 됐죠."

"이, 이거 불법이야...!"

“불법은 아니죠. 뭐든 들어준다는 소원으로 합의를 한 건데.”

"그래도 신고감이야...."

“그래서, 신고하려고? 그래도 상관은 없는데, 일단 들어가세요. 들어갔다 나온 뒤에 신고를 하든지 해요.”

"......."

더 이상 내게 무슨 말을 하든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렌카가 일어나더니, 아주 천천히 케이지 앞으로 향했다.

내가 입구를 열어주자 눈을 질끈 감는 렌카.

어지간히 들어가기 싫은 듯 밍기적거리던 그녀는, 한 차례 날 노려보고는 결국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케이지 안으로 렌카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입구를 자물쇠로 채웠다.

이후 케이지 앞에 베개를 깔고, 그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 상태로 렌카를 빤히, 아주 빤히 바라만 보았다.

“왜 이래...”

철창밖의 시선이 무척 부담스러웠는지, 렌카가 내게 거리를 두고 앉았다.

무릎을 가슴께까지 당기고 양팔로 감싼 모습이 무척 가련해보인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넌 진짜 쓰레기야....

"벌써 힘들어요?"

“몸은 아까 힘들었고, 사육당하는 느낌에 감시까지 당하는 것 같아서 정신이 지쳐... 기분도 엄청 나빠... 내가 무슨 가축이야...?"

"나오고 싶어요? 소원은 여기까지 해줄까요?”

“그, 그래줄 수 있어?"

죽어가던 렌카의 눈이 순식간에 희망으로 가득 찼다.

방긋한 미소를 지은 나는 케이지 철창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코스프레 한 번만 해줘요."

렌카가 벙 쪘다.

갑자기 코스프레를 운운하니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입을 살짝 벌린 채로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정신이 일부 돌아왔는지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코스프레를 해달라고...?”

“예.”

“애, 애니메이션 캐릭터 같은 거...?"

그건 나중에, 네가 날 좋아하게 되었을 때 많이 할 거란다.

“애니메이션 캐릭터보다는 대중적인 코스프레인 것 같네요. 어떻게, 받아들일래요?"

“안 해... 차라리 턱을 더 만져...”

오늘만 고생하고 끝내는 게 낫다 싶은가본데... 서운하네.

네 안에 내재된 노예본능을 확 일깨워줄 수 있는 걸 준비하려고 하는데.

“질려서 안 만질래요.”

“지, 질린다고....?"

“장난이고, 제안에 대해서 추가로 말해볼게요. 만약 부장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소원은 종료. 바로 꺼내주고 집까지 태워드리겠습니다. 코스프레는 단 한 번만, 이 장소에서 30분만 하면 돼요. 제가 원하는 시간에 호출할 테지만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부르는 건 아니고, 부장의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겠습니다.”

"안 한다니까...?"

"계속 들어요. 만약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거기서 여덟 시간동안 쭉 있으면 돼요.”

“여, 여덟 시간...? 여덟 시간이면 완전히 밤이란 말이야! 일찍 보내준다고 했잖아!"

"지금 시간이 두시죠? 원래는 자정에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두 시간 앞당겨준 겁니다."

“무, 뭐...? 두 시간...!?"

뿌드득!

렌카의 입에서부터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순종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감소된 시간이 고작 2시간이라 화가 난 듯했다.

나는 태연스런 낯으로 렌카를 쳐다보았다.

“계속 땡깡을 부리고 욕까지 했던 걸 감안해서 그 정도만 깎았어요. 할 말 있어요?"

"......"

“게다가 30분이나 더 침대에서 쉬게 해줬잖아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던 사람이 약속시간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고... 일부러 말하지 않고 있었죠?"

"그,그건 그렇지만 말을 안 한 네 잘못이 더 크지...! 네가 가만히 있길래 나는 더 쉬어도 되는 줄 알았어...!"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요."

“구두로 한 약속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거야... 문서로 만들어놨었어야지."

"구두약속도 효력이 있어요."

"증거가 없잖아...”

“우리 지금 엄청 유치한 거 알죠? 부장이랑 나랑 잘 맞는 것 같지 않아요?"

"웃기지 마. 퍽이나.”

능글맞은 물음을 툭 쏘아붙이는 것으로 반격한 렌카가 말을 이었다.

“여덟 시간은 너무 심해․ 반으로 줄여줘.”

“억지 부리지 마세요. 이젠 안 들어드립니다."

“아니면 휴대폰이라도 쓰게 해줘. 이불도 바닥에 깔아줬으면 좋겠어. 오랜 시간 있어야하는데 그 정도 편의는 봐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싫어요."

"부탁해."

이젠 뻔뻔하게 나오기로 한 거야? 귀엽네.

렌카를 향해 쯧 하고 혀를 찬 내가 말했다.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 같네요. 저는 지금부터 잠깐 나갈 거예요.”

"나, 나간다고...? 어딜?"

"심심해서 영화나 한 편 보고 오려고 합니다.”

"뭐....? 웃기지마...! 그럼 나는? 여기 혼자 있으라고?"

“예. 부장도 제가 없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그, 그건 그렇지만 나 화장실은? 가고 싶을 때 말하라며...! 그냥 여기서 해결하란거야?"

“제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있던가요. 저녁은 뭘로 드실래요? 돌아올 때 포장해서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나 TV를 끄고 외투까지 챙겨 입은 내 말에, 렌카가 흠칫하더니 양손으로 철창을 잡았다.

"야...! 진짜 나갈 거야?"

목소리가 다급해지면서 몸을 부르르 떠는데, 케이지 안에서 홀로 몇 시간동안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느낀 듯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갈 생각 따윈 전혀 없었던 내가 반문했다.

"그럼 제안을 받아들일래요?"

“.... 너 원래 이럴 목적이었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근데 부장으로서도 나쁜 거래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딱 30분만 투자해주면 되잖아요.”

“애초에 오늘로서 끝인 일이 더 늘어난다는 것 자체부터가 손해야..."

"시간상으로는 이득인데요. 평일에 하교하면서 잠깐 들를 수도 있는 거고요. 날짜는 맞춰준다니까?"

“무슨 코스프레를 시키려고 이러는 건데? 정보라도 줘보든가! 다짜고짜 알겠다고 하면 알몸 코스프레를 시킬지 누가 알아!?"

“대중적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알몸 코스프레가 대중적이었어요? 난 몰랐네.”

이이....!"

좋아 죽으려고 하네.

타격감이 뛰어나니까 계속 놀리고 싶어진다.

킥킥거린 나는 다시 케이지 앞으로 가서, 그 윗부분의 철판을 톡톡 두드렸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순 없지만, 지금 이 케이지 안에 들어가 있는 것보단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훨씬 덜 힘들 거예요. 가슴과 성기를 드러내는 복장도 절대 아니고요.”

노골적인 말에 침을 꼴깍 삼키는 렌카.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은 나는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떻게 할래요?"

그러자 렌카가 수심이 깃든 얼굴로 케이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떤 코스프레를 시킬지 아주 단편적인 정보만 주었음에도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건, 렌카가 서서히 이쪽 취향에 눈을 떠가고 있다는 증거.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긍정적인 반응임은 틀림없었다.

“오늘 일도 있다면서요. 저번에 통화할 때 그러지 않았어요?"

그 말에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는지, 렌카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그녀는,

".... 진짜 30분이면 돼?"

결국 내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 30분요."

날짜랑 시간도 나랑 상의할 거고...?"

"그렇습니다. 편의는 충분히 봐드릴 거예요."

"... 심한거 아니라고 했지...?”

“심하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절 두들겨 패고 신고해도 좋습니다. 부장이 판단하면 돼요.”

자신 있게 말한 것이 주효했을까?

렌카의 낯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후로도 짧은 시간동안 주판을 굴려보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기다란 콧바람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 받아들일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곧바로 자물쇠를 열었다.

이후 렌카가 밖으로 나와 일어나자 사과를 했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고... 미안했어요."

“됐어... 이제 와서 웬 착한 척이야?"

“제 성벽에 어울려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네요.”

“서, 성벽이라니... 미친놈 아니야 진짜...?"

“집으로 데려다드리면 되죠?"

“.... 도쿄역에서 내려줘.....

도쿄역이라면, 하늘색 라인의 전철역 기준으로 두 정거장만 가면 아키하바라다.

그곳에 가는 걸 들키기 싫어서 일부러 이 역을 말한 것 같은데... 속내가 다 보인다.

“그 복장으로 가려고요? 눈에 띄지 않나?"

“외투 있으니까 괜찮... 아니,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봐.”

"서운하게 말씀하시네요."

"이젠 예의를 갖출 필요도 없잖아.”

"그건 그렇긴 하죠. 옷 입으세요. 갑시다.”

힘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렌카가 자신의 외투를 입기 시작했다.

오늘 수확은 완벽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나쁘지 않았다.

욕심을 조금 냈다면 더 큰 이득을 챙길 수 있었겠지만, 렌카의 반발심이 더욱 커지기 전에 멈추는 게 맞지.

특히 소원보다는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부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면서, 주종관계와 관련된 연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아쉬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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