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수상한 노트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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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왔습니다...”
진이 빠진 목소리로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린 렌카는, 가족들이 외출했다는 것을 상기해내고는 욕실로 향했다.
이후 꼼꼼하게 샤워를 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쇼핑백 안에 든 소중한 한정판 피규어를 깔끔하게 닦아내고 진열장 안에 넣어놓은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시간이 조금 촉박하긴 했지만 업체에서 광고를 심하게 때리지 않았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애니메이션의 피규어라서 재고가 조금 남아있을 때 겨우 살 수 있었다.
솔직히 마츠다가 소원을 썼을 때 반쯤 포기하고 웃돈을 주며 중고를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신제품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이것마저 놓쳐버렸다면 마츠다의 제안을 들어준 것을 후회했으리라.
애니 컬렉션을 또 하나 완성했음에 만족한 렌카는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분명 마츠다와 함께한 시간은 얼마 안 되는데, 체감상으로는 이틀 정도 지난 느낌이었다.
그만큼 정신력 소모가 상당했다. 이번 소원은.
그나저나 코스프레가 걱정이었다.
애니 캐릭터보다는 대중적인 게 뭘까?
할로윈 때나 볼 법한 바니걸이나 뭐 그런 건가?
'호텔에서 나가기 전에 성벽을 받아줘서 고맙다고 했지...
SM에 취향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게 안 생겨가지고 의외다.
설마 코스프레도 막 찢어진 경찰복을 입혀서 험악한 강도에게 져버린 경찰을 연기해달라거나, 귀갑묶기를 해달라거나 뭐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자신의 판단하에 심하면 두들겨 패고 신고해도 된다 했으니까.... 그 정도까지 가진 않을 것이다.
“진짜 변태 같은 새끼...!"
이불 안에서 이런저런 망상을 해보며 마츠다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렌카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놈이 더 트집을 잡지 못하게 군말 없이 해야겠다.
그 다음엔 복수의 시간.
자신에게 남은 소원을 어떻게 사용할지 아직 정하지는 못했지만, 마츠다의 심신을 아주 지치도록 만들어버릴 것이다.
그리 생각한 렌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때,
우웅-!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팔을 위로 뻗어 더듬더듬 휴대폰을 집어든 렌카는, 그것을 이불 안으로 가져와 화면을 켜보았다.
[마츠다 켄 님께서 기프티콘을 발송하였습니다.]
..... 뭐야?'
갑작스레 기프티콘이라니?
고개를 갸웃하며 알림창을 터치한 그녀는, 쇼핑몰 30퍼센트 할인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보내준 것이 애니, 게임과 관련된 서브컬쳐계에서 유명한 할인권이었기 때문이다.
여기 소속된 가맹점엔 유명한 피규어 매장이 꽤나 많았기에, 렌카 자신으로서는 무척 유용한 선물이었다.
헌데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많고 많은 선물 중에서 하필이면 이것이라니.
혹시 마츠다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가?
불안한 마음이 싹튼 렌카가 이 선물의 진의를 파악해보고 있을 무렵,
우웅-!
[저번에 피규어랑 관련된 것들을 사 모으면서 남은 건데, 부장 쓰세요.]
마츠다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것을 본 렌카가 입술에 침을 묻히며 휴대폰을 두드렸다.
[이걸 왜 나한테 줘? 내가 쓸 일이 어디 있다고...]
[조카가 피규어를 좋아하잖아요. 유효기간이 많이 남아있어서, 언제 선물을 또 살 때 쓰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저번에 한정판 피규어를 샀을 당시 했던 변명을 마츠다가 기억하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안심해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일말의 의심을 남겨둔 채로 경계를 일부 푼 렌카가 답장을 보냈다.
[잘 쓸게. 쓰레기.]
[칭찬 고마워요.]
사람이 어떻게 저리 뻔뻔할 수 있지?
원래 저렇게 낙천적인 놈이었나?
그래도 자신을 쉬게 해줬던 걸 보면 배려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마지막 소원은 자신도 적당히 봐줄까....?
그러한 생각을 하던 렌카의 고개가 마구 흔들렸다.
'아, 아니지... 그게 왜 배려야?'
자신은 마츠다의 요상한 성벽을 받아주는 정당한 거래를 통해 쉬는 시간을 쟁취했을 뿐이다.
그러니 현혹되지 말자.
라며 정신을 가다듬으려고 노력하던 렌카는,
"아아악!"
마구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뻥뻥 찼다.
개고생을 하기 싫어 몸으로 쉬는 시간을 사버렸다고 생각하니, 엄청나게 쪽팔렸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오늘 미친 추태를 보여버리고 말았다.
근데 뭐 어떡하랴. 처음 맛보는 케이지 안은 최악 그 자체였는데.
'미치겠네....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며 오늘의 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노력하던 그녀는, 이어서 온 마츠다의 문자를 확인하고 콧방귀를 꼈다.
[근데 지금 뭐하세요?]
[신경 꺼]
[알겠어요. 수고해요.]
그 문자를 끝으로, 마츠다는 더 이상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조용한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렌카는 지친 마음을 달래려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이 기분은 뭘까?
홀가분한 마음을 착각한거겠지?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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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친척 집에서 돌아온 미유키는 곧바로 미도리가 짐을 푸는 것을 도와주며, 넌지시 외박 의사를 밝혔다.
"엄마. 나 오늘 친구 집에 가도 돼?"
"거기서 외박할 거면 안 돼.”
“아 왜애... 나 요즘 잘 들어오잖아...”
“대체 친구 집에서 뭐하려고?"
부해야지... 기말고사도 안
"저번엔 중간고사 핑계를 대더니 이번에도 똑같네?”
"아... 그랬어?"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미유키.
자신의 철부지 딸을 보며 헛웃음을 켠 미도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와타루를 찾는 듯하더니 물었다.
“진짜 친구 집에 가는 거 맞니?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라...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순간 미유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응...? 그럼 그냥 친구지 누구겠어...
"정말?"
“.... 그렇다니까...?”
“그래? 오늘 돌아올 거면 가도 돼."
“자고 오는 건 왜 안 되는데?"
“친구 부모님한테 민폐잖니.”
자꾸 ‘친구’를 강조하면서 목소리 톤을 높이는 것이, 뭔가 낌새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니, 알아차린 것 같은 게 아니라, 엄마는 미유키 자신과 마츠다와의 관계를 분명히 눈치챘다.
하긴, 신원미상의 친구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주지 않았고, 마츠다의 집에 옮겨놓기 위해 생활용품을 몇 개 빼돌렸던 적도 있었는데다가, 최근 자신이 마츠다를 언급하는 횟수가 늘었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엄마는 진작 눈치를 챘으나, 자신을 위해 여태까지 모른 척해주었을 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의 눈빛만 봐도 모든 걸 아니까.
'미치겠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고, 막상 그때가 닥쳐오면 무척 창피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마음이 평온하다.
왜일까? 엄마가 혼을 내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고 있어서 그런 건가?
모르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지르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미유키가 말했다.
“마츠다 군 집에 가도 돼?"
그 말에 미도리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미유키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졌다.
“가도 돼....?"
"언제 올 건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물음.
자포자기한 미유키가 반문했다.
“언제 오면 돼..?"
“늦지 않게 와. 내일은 평일이잖아."
내일은 평일이라... 이것 또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온화한 미도리의 대답에 마음속의 짐을 덜어낸 미유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나간다....?"
“그래.”
암묵적으로 허락도 받았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을 나선 미유키는 대중교통을 타고 마츠다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열쇠로 대문을 열어, 정겨운 돌길을 건너 툇마루에 오른 뒤 굳게 닫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콧속으로 확 들어오는 마츠다 특유의 시원한 냄새.
기분이 좋아진 미유키는 요 위에서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는 마츠다의 품으로 쏘옥 들어가려다가,
"응...?"
요 옆의, 다리가 펴진 탁상 위에 올라가있는 전자제품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노트북?'
딱 봐도 새 것이었다. 마츠다가 구입한 걸까?
샀으면 샀다고 말이라도 하지.
그리 생각한 미유키는 마츠다를 깨우려다가, 열려있는 노트북을 보고는 호기심이 생겼다.
무언가를 보다 잠든 것 같은데... 아침에 톡을 할 당시에, 마츠다는 그냥 집에서 TV를 보고 있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속였다는 뜻이 된다.
물론 노트북으로도 TV를 볼 수 있겠지만, 바로 앞에 있는 거대한 TV를 놔두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그랬다면 마츠다는 자신에게 말을 했을 것이었다.
혹시 야동이라도 본 걸까?
남자친구가 있는 친구들이 그랬던 적이 있다. 여친이나 아내의 유무와 관계없이, 야동을 안 보는 남자는 없다고.
만약 보지 않는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고.
그래서 그때 생각했었다. 언제 한 번 마츠다한테도 물어봐야겠다고 말이다.
이 주제로 그를 놀려주려 했는데, 마침 기회가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다.
여전히 미동도 없는 마츠다를 홀끗 살핀 미유키는, 작게 킥킥거리며 탁상 앞에 앉았다.
이후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찾으려 눈을 굴리다가,
"미유키...?"
뒤에서 들려오는 잠에 취한 목소리에 어깨를 떨었다.
"흐의....?"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본 미유키는, 상체를 일으킨 채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마츠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 일어났어...?"
“어.”
"언제...?"
"방금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아까는 들어와도 모르고 있더니 지금은 잠귀가 밝다.
참 톡톡 튀는 남자다.
“근데 뭐하냐?"
“아... 노트북 산 것 같길래 한 번 보려구...”
그 말에 마츠다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미유키의 허리 옆으로 무심한 듯 손을 뻗어 노트북을 덮은 그는, 그것을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미유키의 손목을 잡고 그녀를 품에 껴안으며 누웠다.
좀만 자자... 자고 일어나서 얘기해."
방금 마츠다가 뭔가를 숨기려 하지 않았나?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치고는 행동이 빨랐던 듯한데... 저 판도라의 상자 안에 야동이 들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확신이 더해지는 기분이다.
저거... 언젠간 봐줄 테다. 신나게 놀려줘야지.
속으로 그러한 다짐을 한 미유키는 마츠다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와의 해후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