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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44화 (144/313)

<144화 > 타격감이 좋은 렌카

“마츠다 군. 노트북은 왜 샀어?"

일어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나봐?

자연스레 알게 될 거야.

미유키의 눈 밑을 닦아내준 나는, 내 눈을 비비적거리며 대답했다.

“컴퓨터 하나 있으면 좋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너무 뜬금없는 거 아니야? 산다는 얘기도 없었는데."

“딱히 뜬금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어. 친척 집은 잘 다녀왔냐?"

"응. 야키니쿠용 고기 받아왔는데 나중에 우리 집에서 먹자. 엄마가 마츠다 군이랑 같이 먹으면 좋겠다.”

“그래."

“아, 그리고 엄마가 이상한 말을 했어. 내가...”

미유키는 여기 오기 전에 자신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비몽사몽한 채로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거 봐. 다 알고 계신다니까. 네가 티를 내는데 모를 수가 있겠냐?"

“....표정 엄청 재수 없는데...”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뭘 어떡해. 들킨 마당인데 당당하게 굴어야지. 참견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먼저 관계에 대해서 상담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게 아닌 이상, 연애훈수만큼 짜증나는 일이 없긴 하지.

그나저나 이제는 가족 공인인가? 늦긴 했다.

사방팔방으로 삐죽 튀어나와있는 미유키의 머리를 정리해준 내가 말했다.

"그러지는 않으실 거야. 근데 지금까지 외박한 것도 들킨 듯한데, 돌아가면 뻘줌하겠다?"

“그 얘긴 엄마가 날 배려해서 안 꺼낸 것 같아. 굳이 먼저 그 얘길 꺼내진 않으려구."

"그렇게 해."

투둑.

미유키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나는 창밖에서부터 빗소리가 들려오자 귀를 쫑긋했다.

미유키 또한 마찬가지. 창까지 조금 열어젖히며 내리기 시작한 비를 반겼다.

“요즘 뜸하더니 갑자기 내리네? 일기예보엔 비 온다는 말이 없었는데.”

얼굴에 화색을 띤 채로 일어난 미유키의 말.

청바지 위로 그녀의 종아리를 주물럭거린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미유키가 기가 찬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날 나무랐다.

"일어나자마자 뭐하는거야?"

“종아리 만지는데.”

"그러니까 왜 종아리를 만지냐구...”

“배고픈데 밥 먹으러 나갈래? 그 라멘집 어때?"

미유키와 내 캐릭터가 그려진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가게.

그곳을 언급하자, 미유키가 반색하며 대답했다.

"거기 좋아."

"가자 그럼."

"응."

**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지나간 장마가 다시 온 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줄기도 거셌고, 오늘까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날에 미유키와 잤었어야 하는 건데... 아쉽지 않을 수가 없다.

습기로 가득한 교실 안에서 수업을 들은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 미유키, 테츠야와 함께 급식실로 향했다.

이후 평범한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었고,

“미유키, 잠깐 나랑 매점 좀 같이 가주라. 딸기우유 사줄게.”

"응? 알았어."

"우산 같이 쏠까?"

“아니. 나 우산 있어."

"아, 그래..."

미유키에게 찝쩍대본 테츠야가 단호하게 거절당하는 것을 보며 놈을 비웃었다.

이젠 경쟁상대도 전혀 아닌데, 왜 저놈이 쩔쩔매는 꼴을 보면 만족감이 상당할까?

참 미스터리한 놈이다.

"마츠다 군도 같이 갈래?"

테츠야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내게 우산을 씌워주려는 듯 가까이 다가온 미유키의 물음.

요즘 더욱 적극적으로 변한듯한데... 보기가 너무 좋다.

나는 그녀에게 한손을 흔들어보였다.

"아니. 잠깐 나나세 선배랑 부실에 들러서 제습기 켜놔야 돼. 호구에 습기 차면 안 되거든."

“고생하네? 알았어. 이따 봐. 나나세 선배한테 안부 전해줘.”

오냐."

그렇게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던 나는 눈을 빛냈다.

붙어있긴 한데, 예전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물론 우산을 따로 쓰고 있어서라는 이유도 있기야 하겠지만...

방금 미유키가 테츠야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던 것도 그렇고, 스스로 벽을 치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

우산을 슬쩍 재껴 음산한 하늘을 올려다본 나는 솔솔 풍겨오는 흙내음을 맡으며 교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때마침 급식실에서 나오고 있는 렌카를 발견하고는 마음을 바꾸었다.

“안녕하세요, 부장."

그녀에게로 걸음을 옮긴 내 무덤덤한 인사에, 렌카가 오만상을 썼다.

“큭...!"

철천지원수에게 칼침을 한방 맞은 사람마냥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볼만하다.

그런데 왜 급식실 안에서는 못 봤지? 서로 붙어있는 치나미와 렌카는 언제나 눈에 띄는데.

구석에서 먹었나? 아마 그런가보다.

“날씨가 좋네요.”

“.... 비가 이렇게 거센데 뭐가 좋아?"

“비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보네요?"

"꿀꿀해서 싫어해."

청춘물의 한 장면처럼 각자의 우산을 쓴 채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데, 대화내용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전 좋아하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부장도 좋아해줬으면 좋겠다고요.”

“그럴 일은 평생 없을 거야."

그럼 좋아하도록 만들어줄게.

“코스프레는 언제 하는 게 좋아요?”

그 말에 렌카가 다급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저러고 있는데, 가린다고 안 들킬 줄 아나? 머리가 저렇게 긴데?

은근히 허당 같은 면이 있다니까.

빗소리밖에 들려오지 않는 급식실 주변.

사람이 없음에 안도한 렌카가 내게 성큼 다가오더니 경고했다.

"입 다물어...! 그 얘길 왜 지금 해?"

"부실에서 하는 것보단 낫잖아요. 사람 없으니까 한 건데?"

"......"

“그래서, 언제 할 거냐고요."

“소원이 끝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뭐가 이렇게 급해...? 좀 기다려."

"흥분돼요."

“무, 뭐...?"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자 눈에 띄게 당혹스러워하는 그녀.

빗물로 적셔 흙을 밀어내며 뒷걸음질을 친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흐, 흥분된다고...?"

“예․ 빨리 보고 싶어요."

"미친놈 아니야...?"

“의상 주문해놨어요. 내일 중으로 온대요.”

"야...! 그걸 왜 상의도 없이 혼자 주문해....!”

상의는 날짜와 시간만 하면 되잖아요. 의상에 관한 결정권은 오직 저한테만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건 그렇지만... 뭘로 주문했는데....?”

고개를 약간 내리깐 채로 눈만 굴려서 날 쳐다보는 모습이 귀엽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부장도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봐... 아, 아무튼 그건 따로 얘기하든지 해... 문자로 할 수도 있잖아.”

전화로 할 건데? 목소리 듣고 싶어.

라는 말을 삼킨 나는, 입가를 닦으며 급식실에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는 치나미를 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달려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스승님, 식사는 잘 하셨나요?"

그에 배시시 웃은 치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후배님은 어떠셨나요?"

“저도 잘 했죠. 아, 미유키가 안부 전해달래요.”

"앗! 하나자와 후배님께서요? 최근 연락이 뜸했는데 이참에 해봐야겠군요.”

어느새 우리 곁으로 온 렌카는 연신 헛웃음을 치고 있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내 사근사근한 태도와 말투에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나중엔 질투도 하려나?

렌카의 반응을 눈치챈 치나미가 자신의 머리를 15도 각도로 틀었다.

“으응? 왜 그러세요?”

그러자 렌카가 찔끔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 아무것도 아냐.”

“알았어요. 친우님께서는 먼저 교실로 돌아가실래요? 저는 후배님과 함께 청소 준비를 해놓아야 돼요.”

"나도 도와줄게."

“도와주실 필요는 전혀 없어요. 부실 전체에 제습기를 틀고, 죽도와 호구 상태를 간단하게 확인하면 끝이거든요. 15분도 안 걸려요.”

“손이 많으면 더 좋잖아. 그치?"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럼 됐네? 얼른 가자. 우산은 나랑 같이 쓰고.”

치나미를 내 마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모습이 눈물겹다.

그 우정, 변치 말도록 하렴.

**

렌카는 호구를 체크하는 척을 하며 나와 치나미를 면밀히 살폈다.

토요일 날 취향을 드러낸 이후 경각심이 크게 오른 듯한데, 그러한 태도는 렌카 본인에게만 보여주는 걸 알고 있긴 한 걸까?

분명히 부장한테만 이러는 거라고 말도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눈은 호구에 두고 있지만, 시선만큼은 내 쪽으로 향해있는 렌카를 턱짓했다.

부장.

“....왜.”

"부장이 지금 2분간 보고 있는 호구요. 그거 제가 확인한 건데?”

“넌 아직 보는 눈이 별로 없잖아. 미숙한 만큼 다시 확인해보려는 거지."

임기응변이 제법이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숙하게 받아치네?

“그런가요?"

"그런 거야."

“그럼 좀 알려줄래요? 어느 부분을 중점적으로 봐야하는지 배우고 싶네요.”

그리 말한 나는 발을 옆으로 크게 디디며 렌카에게 바짝 붙었다.

그러자 숨을 훅 들이켠 렌카의 팔이 크게 출렁거렸다.

순간 힘이 빠져버린 것이다.

놓쳐버린 뻔한 호구를, 손목에 힘을 빡 주는 것으로 간신히 막아낸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조, 좀 떨어져...! 죽을래...?"

치나미가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자그마한 목소리로 타박을 하는 렌카.

절친한 친구에게 험한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나보다.

“왜요? 알려달라니까? 근데 샴푸 뭐 써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냄새 좋아서."

넌지시 칭찬을 해주자 급속도로 빨갛게 변하는 렌카의 얼굴.

치욕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이 너무 예쁘다.

낄낄거런 나는 그녀를 더 놀려주려다가,

“두 분이서 속닥속닥 뭐하세요? 호구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어리둥절한 낯으로 다가온 치나미의 말에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부장에게 호구를 잘 보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스승님이 잘 알려주긴 했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이 어떤지도 봐야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욱이 부장은 스승님처럼 경력도 많으니까... 잘 배워서 흡수하려고요."

“오오..! 아주 훌륭한 마음가짐이에요...! 후배님의 검도인으로서의 덕목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네요...!”

손뼉까지 치며 좋아라하는 치나미.

그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던 렌카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미치겠네... 호구를 다른 시선으로 볼 데가 어디 있다고...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혼잣말을 한 렌카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눈앞에 보이는 호완을 하나 집어, 그 안쪽을 가리켰다.

“손부터 집어넣어봐. 축축한지 확인해."

“알겠습니다. 근데 호완이 부장 거네요?"

"내 거라고?"

“예. 방금 이노오 렌카라고 쓰여 있는 진열대에서 빼왔잖아요.”

“뭐 ...?"

흠칫한 렌카가 이름표와 호완을 확인했다.

그 틈을 탄 나는 재빨리 그녀의 호완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최대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스윽...

약간의 냉기가 느껴지는 그 안으로 침입하는 내 손.

마치 렌카의 깨끗한 속살 안에 물건을 삽입하는 듯한 느낌이다.

“음... 조금 눅눅하네요. 제가 오늘 깨끗하게 해드릴게요."

안쪽의 무언가를 체크해보는 듯한 묘한 내 말과 행동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을까?

렌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의도적으로 오해를 살만한 발언을 하긴 했지만, 반응을 보니 진짜로 그렇고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데... 너도 변태적인 면이 충만하구나.

그제 이후로 리액션이 훨씬 좋아졌는데, 앞으로 아카데미가 재미있어질 것 같다.

그리고 슬슬 치나미에게 마지막 마사지도 해줘야하니, 이번 주는 더 바삐 움직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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