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다
"앗! 마츠다 후배님! 하나자와 후배님!”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활기찬 목소리에 나와 미유키, 그리고 테츠야가 몸을 돌렸다.
치나미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는데, 막 급식실에 가려던 참이었는지 손에 복숭아 맛 음료수를 두 개 들고 있는 게 눈에 띈다.
그녀의 뒤엔 렌카가 있었다.
어제 일이 생각났는지 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로 긴장을 하고 있는 모습.
속으로 킬킬거린 나는 밝은 낯으로 허리를 꾸벅 숙이는 미유키를 지켜보았다.
“안녕하세요. 선배."
치나미는 우리에게 다가오자마자, 테츠야에게 눈인사를 건넨 후 미유키의 손에 500ml짜리 음료수갑을 하나 들려주었다.
무심코 그것을 받아든 미유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네. 방금 식사를 끝마치신 듯한데, 입가심용으로 드세요.”
“선배가 드시려는 거 아니었어요?"
“후배님을 위해 이 정도쯤은 양보할 수 있답니다. 저는 또 사면 돼요.”
"그럼 감사히 먹겠습니다!"
시종일관 발랄한 미유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을까?
까르르 거린 치나미가 급식실에 들어가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는 미유키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사이렌카가 가까이 다가와 미유키와 손인사를 나누었는데, 나는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를 향해 이죽거려보였다.
"욱...!"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마구 구기는 그녀.
렌카의 곁으로 자리를 옮긴 테츠야가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왜그러세요?"
“아, 아냐... 속이 조금 안 좋아서..."
"아... 그럼 식사하지 마시고 쉬어야하는 거 아니에요?"
“재수 없는 걸 봐서 그래.”
“재수 없는 거...?"
“그런 게 있어. 오늘 밥은 어때?”
“평소와 똑같은 급식실이에요."
“하... 도시락이라도 싸올 걸 그랬네. 밥맛도 떨어지고....”
저런 말을 하는 렌카의 시선은 날 향해있었다.
나중에 어쩌려고 자꾸 업보를 쌓는 거지?
혼내주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겠지?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볼게요! 후배님! 부활동 시간에 뵈어요!"
어느새 대화를 끝낸 치나미가 상큼하게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렌카와 함께 급식실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던 미유키가 말했다.
“나나세 선배는 항상 텐션이 높으시네...? 그리고 왠지 챙겨주고 싶어. 가만히 놔두면 막 넘어지실 것 같아."
치나미가 보호본능을 일으키긴 하지.
좋아해줘서 다행이다.
그 마음, 앞으로도 쭉 갖고 가주렴.
**
렌카는 재미있게 본 작품이 있다면, 애니 커뮤니티에 리뷰를 쓴다.
짤막한 리뷰와 함께 별점을 남기는데, 가끔 아주 기다란 장문의 리뷰나 칼럼을 쓸 때도 있다.
활동시간이 아주 긴데다, 큰 사고가 없다면 작품을 까지 않고 담백한 리뷰를 쓰고 친절하기에 커뮤니티 내에선 소위 말하는 네임드 유저로 통했고, 대다수의 유저들이 그녀가 쓴 글을 좋아했다.
휴대폰으로 '애니쉐어'라는 큰 사이트에 접속한 나는, 회원가입을 하고 리뷰 란을 찾아보았다.
렌카가 쓰는 닉네임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큰 어려움 없이 그녀가 가장 최근에 쓴 글을 찾을 수 있었다.
[주인공인 탄지로의 여정이 감동적이었습니다.]
[별점 : ★★★★☆]
[추천 : 5102] [비추천 : 121]
최근에 인기를 끌었던 애니메이션의 리뷰를 간략하게 남겨놓은 글.
작성자는 [달려라 이노쨩], 렌카가 활동할 때 사용하는 깜찍한 닉네임이었다.
프로필 사진에는 어떤 귀여운 여자 캐릭터가 한손을 위로 뻗은 채 웃고 있었는데, 저게 이노라는 애인가보다.
렌카는 분명 자신의 성씨인 이노오를 줄여서 저 닉네임을 만들었을 텐데...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저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게끔, 그리고 자신의 정체를 절대 눈치챌 수 없도록 함정을 판 게 티가 난다.
저 닉네임과 프로필 사진을 보고 '이노오'라는 성씨를 떠올릴 사람은 단언컨대 없겠지.
단, 나만 빼고.
동산 벤치에 앉은 나는 사람들이 있나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후 렌카가 쓴 글에 댓글을 남겼다.
[개는 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버스 탄 거지. 렌고쿠랑 젠이츠가 진주인공인데, 제대로 본 거 맞냐? 만알못이네.]
부활동 시간이 끝나면 렌카가 집으로 돌아가서 댓글을 볼까?
아니면 작성일이 꽤 지난 글이라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으려나?
그렇다면 그냥 쪽지를 보내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내 개인 계정으로 쪽지가 하나 도착했다.
[MK 님. 안녕하세요. 애정하는 캐릭터가 있다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다른 캐릭터를 내려치는 건 그 캐릭터를 덕질하는 사람들에게 반발심만 일으킬 뿐이에요. 리뷰 가장 밑에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사족도 남겨놓았는데, 참고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입일을 보니 최근이네요? 저희 같이 열심히 활동해 봐요! q(@‘7°@)]
렌카의 답장이었다. 떡밥을 바로 물었구나.
잠깐 쉬는 시간을 갖고 있는 상황이라, 마침 심심풀이로 들어갔다가 댓글을 확인한 모양인데... 타이밍이 딱 알맞은 걸 보니 역시 우린 운명이 맞다.
근데 왜 여기선 이렇게 온순하고 난리야?
푸짐한 욕설을 기대했는데 계도를 위한 장문의 쪽지라니, 이러면 마음이 약해지잖아.
그리고 저 순둥순둥한 이모티콘은 뭐냐? 가면을 벗어라, 이 앙칼진 것.
입맛을 다신 나는 휴대폰을 두드렸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덕질 초창기에는 MK 넘처럼 한 캐릭터를 심하게 좋아했던 터라 그 마음은 이해해요. 애니쉐어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재미있게 보신 만화, 애니가 있다면 부담 없이 소개해주세요. 혹시 추천해주실 만한 작품이 있을까요?]
[성인만화도 좋아해요?]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기피하지도 않아요.]
[주인님의 비밀이라는 작품 알아요?]
[처음 들어봐요. 만화인가요? 애니인가요?]
[만화요.]
[추천 감사합니다. 주말에 한 번 봐볼게요.]
진짜 보려나? 조금 하드한 조교물인데.
소년만화 리뷰가 대다수인 그녀의 작성글 목록, 그러나 나와 여러 일을 겪으면서 점점 성인물 리뷰가 잦아지고...
종국에는 죄다 조교물 작품만 리뷰하게 되도록 타락하는 성실하고 순수한 유저였던 렌카....
이상하게 꼴리잖아?
내게 커뮤니티 활동을 들킨 것도 모자라, 서로 쪽지까지 주고받았던 사이라는 걸 알게 된 렌카가 지을 표정도 궁금해진다.
혼자 음습한 망상을 하며 쓴 댓글을 삭제한 나는, 부실로 내려가다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나오는 렌카를 발견하고 그녀를 불렀다.
부장."
"어헉...?"
다급하게 휴대폰을 등 뒤로 숨기는 렌카.
반응이 상당히 격한데, 설마 내가 말해준 작품을 찾아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뭐야...? 일 안해? 농땡이피우지 마...."
“다 하고 잠깐 쉬는 중이었는데요. 그러는 부장은 안 해요?”
“우, 우리도 쉬는 시간이라서...."
“그래요? 밖은 왜 나왔는데?"
“바람 좀 쐬러...”
“그래요? 근데 부장."
“뭐..!"
"점심시간에 저한테 재수 없다고 했죠?”
가라앉은 목소리에, 찔끔한 렌카가 허리를 바짝 세웠다.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는 듯 눈에 힘을 빡 준 그녀가 대답했다.
"맞아. 너 재수 없잖아."
"자꾸 서운하게 할래요?”
“.... 뭐 어쩌라고...”
친절하게 대해요.
“넌 친절하게 대할 수가 없는 놈이야.... 나한테 하는 짓들만 봐도...”
“부장도 좋아했잖아."
“조, 좋아하긴 무슨...!"
틱.틱.틱.
발끈해선 대드는 렌카의 허리춤에서 무언가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그쪽을 바라보니, 그녀의 등허리에 감춘 팔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나와 단둘이 있는 게 꽤나 어색해서 애꿎은 휴대폰 뒤판을 두드리는 모양이다.
어제 넌지시 좋아한다고 말한 걸 마음에 두고 있었나?
그래서 부끄러웠던 거야? 귀여워가지고...
렌카의 코앞까지 성큼 다가간 나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장.."
“뭐...!"
“마지막 소원은 언제 빌 거예요?"
“몰라...! 아직 시간 많이 남았으니까 재촉하지 마...!”
“재촉한 적 없어요. 왜 오해를 하고 그래요?”
"......"
“근데 마지막 소원으로 코스프레 해주면 안 돼요? 이번엔 바니걸이나 간호사로.”
“... 사람이 진짜 뻔뻔하네... 네 소원이 아니라 내 소원이거든...? 말 같지도 않은 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일이나 해.”
부장."
“아이 씨... 왜 자꾸 부르는데..!”
부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다 씩씩대며 몸을 돌리는 그녀에게, 싸울 마음이 없다는 뜻으로 양손을 들어올린 내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냥요. 일하러 가볼게요. 부장도 수고해요.”
“.... 꺼져 빨리.”
자꾸 욕하지 마라. 고백으로 혼내준다?
렌카에게 히죽 웃어보인 나는 동산으로 올라가 마른 빨래거리를 회수했다.
날이 춥다. 자지도 춥고.
빨리 따뜻하게 해줘야지.
**
콕․콕.
등을 찌르는 앙증맞은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쿠헥!”
치나미가 비명을 터뜨리며 넘어지려고 했다.
팔에 몸이 밀린 치나미의 허리를 재빨리 잡아챈 나는, 그녀를 똑바로 세우고 엉덩이를 탈탈 털어주었다.
"괜찮아요?"
“읏...? 저... 후배님, 저는 안 넘어졌는데요...”
뜬금없는 스킨십에 목소리가 모기만도 못할 정도로 작하진 치나미.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인 내가 말했다.
"버릇이라서 그랬어요. 그런데 왜요? 시킬 일이 있어요?"
“아뇨. 그게 아니라... 이번 주 마사지는 곤란할 것 같아서 직접 말씀드리려구요.”
“왜요?"
“날씨가 갑작스럽게 확 추워져서, 부모님과 함께 겨울나기 용품을 사러 가야해요.”
허허.... 이러면 곤란한데?
두 번째 장인어른과 장모님,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하시면 저... 나쁜 마음을 먹어버려요?
혹시 부부관계는 어떠신지...
아니다. 이런 못된 생각은 하지 말자.
치나미와의 마사지 겸 잠자리를 즐기기 전에, 신께서 내게 급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상기시켜줬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다.
"그렇군요. 그럼 다음 주는 괜찮은 건가요?"
“네... 다음 주 월요일부터는 언제든 가능해요. 그런데 저어.....
말끝을 흐런 치나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둔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까지 엉덩이를 털어주고 있는 내 손을 상기된 얼굴로 지켜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안 넘어졌다고 말씀드렸는데....”
“먼지가 묻어서 덜어주고 있는 겁니다."
".... 그런가요...?"
“네, 그런 거예요.”
마지막으로 두 번, 치나미의 엉덩이를 약한 힘으로 팡팡 두드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치나미의 뺨을 양손으로 꾸우욱 누르며, 그녀의 이마에 내 이마를 콩 대었다.
"히금 머하히는..."
뭐하긴. 활력을 충전해놓는 거지.
렌카가 와서 방해하기 전에 기운을 많이 받아놔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