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운명의 향기
"우리 스승님, 주말은 잘 보냈어요?"
"......"
안부를 물었음에도 대답하지 않고 날 올려다보는 치나미.
아이스크림을 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뜬 모습이 왜 이렇게 깜찍할까.
볼은 빵빵해가지고... 귀여워 죽겠다.
“왜 말을 안해요?"
내 재촉에 열심히 입을 우물거리던 치나미가 아이스크림을 떼어냈다.
“후배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세요.”
“이번에 열릴 전국 동계대회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딱히 관심은 없는데... 왜요?”
“후배님께서 참가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때 기억나시나요? 후배님이 검도부에 들어오고 얼마 뒤에, 제게 가르침을 청하셨잖아요. 저는 동계대회를 위해 힘내보자고 했구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음음... 그때 약속을 했으니 이번엔 참가를 하시는 게 맞다고 봐요.”
딱히 약속을 한 기억은 없지만 뭐....
치나미가 가자고 하면 가야지.
현재 내 입장에선 영양가가 없는 대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가주마.
가끔 리프레쉬도 필요한 거지. 암, 그렇고말고.
“알겠습니다. 단체전이라면 참가할게요."
흔쾌히 승낙해서 기뻤을까?
치나미의 입가가 활짝 펴졌다.
팔을 쭈욱 뻗어 내 등을 두드런 그녀가 말했다.
“개인전은 2, 3학년 위주로 나가게 될 예정이라 자리가 없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예. 근데 스승님."
“네?”
"혼자 아이스크림을 먹는 건 너무 치사하지 않나요?"
“앗... 맞는 말씀이에요. 그러면 제가 새 아이스크림을 가져올까요?”
“아뇨. 하나 다 먹기엔 조금 그렇고, 한 입만 먹을게요. 그거 주세요."
“뭘요?"
"그거요. 스승님이 먹고 있는 거."
어리둥절해하는 치나미의 허리춤에 있는, 타액이 잔뜩 묻어있는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는 나.
내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그녀의 눈에 크게 뜨였다.
"이걸 달라구요....?”
“예. 한 입만 먹고 줄게요.”
"이, 이건 제가 침을 묻혀놓은 건데요...?”
“상관없는데."
“네에에...? 그럴 수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한 리액션이다.
언제 봐도 맛있어.
나는 자신이 먹던 걸 주는 게 망설여지는 듯 우물쭈물하고 있는 치나미의 손목을 잡았다.
이후 그녀가 화들짝 놀라는 사이, 아이스크림 윗부분을 삼키고 베어 물었다.
"흐아아앗...!?"
경악을 한 치나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입안 가득 퍼지는 복숭아 향을 목 아래로 삼킨 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네요."
“...넷? 그 그러신가요....?"
“오늘 할 일은 뭔가요?"
“그... 호구 청소랑... 비품 체크랑... 아, 그 전에 소모품이 배달오기로 했는데... 짐을 좀 날라야하기도 하고...”
“나르는 건 제가 할 테니까, 스승님은 비품 체크할까요?"
“앗... 같이 해도 되는데...
치나미는 알고 있을까?
지금 자신의 몸이 배배 꼬이고 있다는 것을.
아이스크림을 먹은 것으로 간접키스라도 했다고 생각하나보지?
치나미답다. 치나미다워.
나는 무릎을 굽혀 치나미와 시선을 맞추고, 얼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이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힘 쓰는 건 제가 할게요. 알았죠?”
"....네.."
오늘 부활동 끝나고 뭐해요?"
“레, 렌카와 놀기로 했어요...”
"그래요? 뭐하면서?"
“렌카가 자기랑 단둘이 케이크를 먹으러 가자고 그래서...”
나만 빼놓고 간다 이거지?
버릇없는 노예의 반항... 주인님께서 담아두지 않을 수 없지.
"그래서, 스승님은 알겠다고 했고요?”
"네에....."
“제자는 쏙 빼놓고 둘이서 케이크라니...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네요.”
"어허...! 따돌림이라니, 말씀이 심하세요..! 저야 당연히 후배님을 데리고 가고 싶지요...! 가능하다면 하나자와 후배님도 같이요..! 다만 오늘은 렌카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여서, 친구끼리 속을 터놓고 대화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여지끼리의 대화... 뭐 이런 건가요?"
"음음! 맞아요. 그런 거예요. 다음엔 꼭 후배님을 데리고 갈 테니, 널따란 마음으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 호의?"
치나미가 말을 하다 말고 온몸을 달싹였다.
내 손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와 토실토실한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라인을 사근사근 쓰다듬었기 때문이었다.
“후, 후배님...! 손버릇이 아주아주 나쁘시군요...!”
지금 뭘 하시는 거냐며 따질 줄 알았는데, 레퍼토리를 벗어난 대사를 치네?
게다가 내가 만지고 있는 곳이 야릇한 부위인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까지 풍기다니.
우리 치나미... 성적으로 많이 발전했다.
"그냥 쓰다듬어주는 건데?"
“무, 물론 그렇겠지만... 여긴 바깥이에요... 남들이 본다면 괜한 오해를 해서 남사스럽다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몰라요...”
“아무도 없잖아요. 동산은 부원들이 올라오지도 않고요.”
"......"
할 말이 없어졌는지 아이스크림을 앙 무는 그녀.
김이 새어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에 저게 잘도 들어가는구나.
헌데 요새는 복숭아를 아끼나? 도통 먹는 모습을 못 봤네.
"조금만 이렇게 있다가 일할까요?"
나긋나긋한 내 물음에, 치나미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쑥스러웠는지 발을 안쪽으로 오므리는 그녀의 등에서 전해져오는 온기.
그 덕에 차디찼던 손이 적당히 따뜻해졌을 즈음, 나는 콧바람을 훅훅 내뿜고 있는 치나미의 머리카락을 잘 정리해주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
시끌벅적한 소리는 물론, 사람들까지 빽빽한 어느 건물 안.
어두컴컴한 조명과 번쩍번쩍 빛나는 기계 사이를 가로질러간 나와 미유키는, 분홍분홍한 분위기가 감도는 어느 코너의 부스 앞에 섰다.
"여기야?"
"응."
우리가 온 곳은 도심에 있는 큼지막한 오락실 안에 있는, 스티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 부스였다.
미유키가 지갑에 넣을 사진을 찍고 싶다기에 왔는데, 이런 아날로그, 레트로 감성을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다.
무엇보다 신선해서 좋았다. 매번 같은 장소만 왔다 갔다 하다가, 새로운 곳에 오는 게.
“사람 없네? 운 엄청 좋다... 얼른 들어가자."
내 손목을 잡아끌어 부스 안으로 들어가는 미유키.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하는데,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부스 안에 마련된 의자에 껄렁하게 앉아있던 내가 물었다.
"이런 거 많이 해봤나보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랑 자주 찍었었어."
"그러냐? 미우라랑도?"
“응. 많이는 아니지만 찍긴 했지."
“짜증나네."
그 말에 미유키가 고개르 홱 돌리더니 눈웃음을 쳤다.
투덜거리는 내가 웃긴 듯한 모습.
저 요염한 얼굴을 보니 여기서 한 판 하고 싶어지는데... 진정하렴, 내 자지.
시도 때도 없이 꼴리면 어떡하니. 이러다가 블루볼 현상이 일어나면 어떡하려고.
귀여운 효과음이 튀어나오는 화면을 터치하여 필터와 효과를 이것저것 넣은 미유키는 자리에 앉아 내 팔에 팔짱을 껴왔다.
[하나, 두울...!]
미유키의 태도에 좋아하는 사이, 기계 안에서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빨리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나는,
찰칵!
카운트다운이 지나가고 사진이 찍히자 꾸미기 화면에 나온 우리 둘을 살펴보았다.
뭔가 한쪽 공기가 찬데. 내 표정이 조금 어색한가?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미유키가 화면에 똥 스티커를 잔뜩 붙여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얼굴에.
그런 그녀의 행동에 어이가 없어진 내가 물었다.
"뭐하냐 지금?"
“표정이 마음에 안 들어. 두 번째엔 좀 웃어봐. 알았지?"
그렇다고 똥을 뿌리냐... 너무하네.
콧방귀를 낀 나는 미유키가 두 번째 사진을 찍기 위해 버튼을 누르자, 일부러 뚱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미유키는 청개구리 같은 모습을 날 보며 킥킥거리더니,
[하나, 두울...]
부스 안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한 카운트다운이 셋을 세기 직전에, 돌연 한손으로 내 턱을 감싸더니, 뺨에 자신의 입술을 들이밀었다.
한쪽 뺨에서부터 느껴지는 따스하고 말랑한 감촉.
그에 내 입꼬리와 눈초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위로 쭈욱 솟구치며, 헤픈 웃음을 만들어냈다.
오늘 미유키가 뭘 잘못 먹었나? 적극적인데다 애교가 마구 묻어나오는데 미치겠다.
쓰리섬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날 홀리는 건가?
“이러니까 얼마나 좋아? 진작 웃지.."
사진이 나온 화면을 본 미유키가 만족스런 미소를 흘렸다.
그녀는 곧 나와 함께 배경을 예쁘고 귀엽게 꾸미기 시작했고, 두 장을 더 찍은 후 밖으로 나와 사진을 오렸다.
미유키가 하는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내가 말했다.
"지갑에 붙일 거냐?"
“가죽에 붙이면 잘 떼어지니까... 사진 째로 카드 포켓에 넣어놓으려구.”
몇 개는 따로 책상에 붙여놓고 싶다.
테츠야가 보고 동서남북으로 울부짖을 수 있게.
“나는 지갑 안들고 다니는데.”
“휴대폰 케이스 뒤나 집 테이블에 붙여놔.”
“테이블은 안 돼․ 밥 먹다가 음식물 흘리면 얼룩지잖아.”
“그렇겠다. 마츠다 군은 가뜩이나 홀리면서 먹으니까... 하루도 채 안 지나서 이것저것 묻겠네?”
“매를 번다 또."
서로 장난을 치며 스티커 사진을 오린 우린, 한데 모아놓은 그것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
스오오...
콧속으로 상큼한 향이 은은하게 빨려 들어왔다.
달짝지근한 설탕을 잔뜩 집어넣은 레몬 향인데... 굉장히 좋다.
운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은은하지만 확 꽂히는 냄새였다.
그리고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낄 정도라면 이 냄새의 주인은 아마도...
'히요리인가?'
마지막 히로인인 히요일일 가능성이 있을 거다.
연말을 앞둔 지금,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려는 건가?
테츠야가 아니라?
그렇다면 호재이긴 한데... 오락실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히요리의 뒷모습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래? 화장실 찾아?"
우뚝 멈춰있는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날 향한 미유키의 물음.
그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아니, 가자."
"뭐야...? 진짜 괜찮은 거야?"
"어."
정말 이 냄새의 주인이 히요리가 맞다면, 조만간 마주치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