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 고민이 깊어지는 밤
"미유키!"
한 동급생의 다급한 외침.
머리를 위로 틀어 묶은 채로 리시브를 준비하던 미유키가 스핀이 걸린 채로 떨어지고 있는 배구공을 향해 달려가 몸을 날렸다.
파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위로 떠오르는 공을, 세터가 아포짓에게 토스한다.
높게 점프한 아포짓은 블록을 피해 스파이크를 때리는 것으로 마무리.
미유키의 수비가 빛을 발한 한 판이었다.
"잘했어! 나이스 디펜스!"
점수를 따내 좋아라하는 팀원들.
얼굴에 식은땀이 맺혀있는 미유키를 향해 몰려드는 그녀들을 체육관 한켠에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체육시간에 배구를 할 때마다 두각을 나타내는데, 우리 미유키는 못하는 게 뭘까?
운동신경이 좋아서 배구선수로 진로를 잡아도 대성했겠다.
“마츠다, 축구할래?”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로 미유키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는 날 향한 동급생의 물음.
대충 한손을 휘저은 내가 대답했다.
"아니."
"왜?"
"귀찮아."
“그래? 알았어. 할 생각 있으면 운동장으로 나와. 미우라도 같이 한대."
뭐 어쩌라고? 그 새끼 지금 왜 언급하고 난리야?
좋던 기분이 팍 상하네. 내가 놈이랑 친한 줄 아나보다? 선 넘지 마라.
"오냐."
교사가 볼 수 없는 위치에 아예 벌러덩 누워버린 나는, 체육시간이 다 끝나갈 때까지 시간을 보냈다.
이후 수건으로 땀을 닦은 미유키가 이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상체를 일으켰다.
“마츠다 군은 체육시간이 수면시간인줄 아나보네?"
물을 한 모금 들이켠 미유키의 나무람.
시큰둥한 표정을 지은 내가 말했다.
“뭐 어때서. 뭐라고 하지도 않는데.”
"마츠다 군이 숨어있으니까 못 봐서 그런 거잖아."
“잔소리하려고 왔냐?"
“오늘 왜 이렇게 삐딱해? 얼굴 가까이 내밀어봐."
“뺨 때리려고?"
“아 뭐래...! 새집 진 거 정리해줄 테니까 빨리 가까이 와.”
순순히 고개를 빼꼼 내밀자, 미유키가 손을 깨끗하게 닦아내더니 내 옆머리를 조심조심 누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의심만 많아가지고....
휑한체육관 안.
학생들이 죄다 샤워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꼼꼼하게 머리를 정리해주는 미유키의 손목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쪼그려 앉아있던 미유키의 몸이 균형을 잃고 내 품 안으로 쏘옥 들어왔다.
“마, 마츠다 군...! 뭐해...!"
당혹스러워하며 내게서 벗어나려는 그녀.
나는 땀으로 약간 촉촉해진 미유키의 체육복을 만지작거리면서, 연한 윤기가 흐르는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쪼옥 빨았다.
"흐익...!"
짤막한 신음을 터뜨리며 양팔을 바짝 오므런 그녀는, 이내 내 어깨를 때려댔다.
“미, 미친 거 아니야...? 나 땀나잖아...!"
힘은 당연히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애정표현의 일환.
낄낄거런 나는 미유키의 체육복 상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어, 다섯 손가락 첫 마디를 그녀의 미끌미끌한 허리에 대고 오므렸다 폈다 하며 간지럼을 태웠다.
그에 미유키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어깨를 마구 두드리던 손은 어느새 내려가, 내 팔을 붙잡은 상태.
그윽한 눈빛으로 미유키와 시선을 맞대고 있던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체육관 안에 있는 보관실로 살짝 가는 것을 보았다.
“저기서 하고 싶어?"
“아니거든.....? 누가 하고 싶다고.."
“난하고 싶은데."
“지, 지금....?"
“쉬는 시간까지 포함하면 30분 정도 남았잖아. 짧게 끝내자."
"아니... 갑자기 왜...”
“네가 싫으면 안 하고."
“.... 지금은 안 돼... 샤워도 안 했고... 저번에도 곤란했단 말이야..."
정문을 지킬 때 체육관 창고에서 했던 일을 말하는구나.
좋긴 했지만, 스릴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아 약간 아쉬웠었다.
"그러냐? 알았어. 일어나자."
미유키와 함께 나란히 일어난 나는, 안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오금에 팔을 쭉 밀어 넣어, 그대로 들어올리면서 앞으로 안아들었다.
"오아앗..!?"
깜짝 놀라선 내 목에 자신의 팔을 휘감는 미유키.
그녀는 곧 내가 보관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장난해.....? 안 된다고 했잖아....!”
"알았다니까."
“알았으면 발 돌려 이 바보야...! 뭐하는 건데...!”
“그래, 그래.”
그러려니 하며 미유키를 무시한 나는, 보관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구고 그녀를 내려놓았다.
“마츠다 군...! 진짜 미쳤어....?"
이후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체육용품이 쌓여있는 구석으로 향했다.
퀴퀴한 냄새 사이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자두 향.
변태마냥 코를 킁킁거런 나는 미유키의 쇄골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움찔 움찔.
입술이 피부를 스쳐지나갈 때마다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미유키가 내 머리를 붙잡고 밀어냈다.
"나 냄새나...! 이거 하지 마...."
안나."
“누,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문 잠가놨잖아.”
“그래도... 여기 올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아직 테니스 하는 애들이..."
“없어. 라켓이랑 공 갖다 놓는 거 봤거든.”
"그건 또 언제 봤는데...?”
“너 배구하고 있을 때.”
“.... 어이가 없어서... 이것도 야동에서 본 거야...?”
"그거랑은 관계없는데."
“그래....?”
자포자기한 듯 한숨을 푸욱 내쉰 그녀가 내 손에 의해 말려 올라가는 자신의 상의를 붙잡고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미간을 좁히며 당부했다.
“안에는 하면 안 돼... 씻기 힘들어... 그리고 사정하기 전에 말해. 수건에다가 뿌려야 되니까...
아니, 왜 벌써부터 거기까지 생각하냐?
모든 대비를 해놔야 안심이 되는 거야? 모범생답다 정말.
시작하기도 전에 온갖 걱정을 하는 그녀를 쳐다보며 황당한 헛웃음을 내뱉은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
“창문도 잠가야 되고, 가글도 해야 돼․ 땀도 닦아야하니까 기다... 홉!"
온갖 요구사항을 말하다 말고 숨을 삼키는 그녀.
갑작스런 키스에 놀라 눈이 질끈 감긴 미유키의 한쪽 다리를 잡아 허리춤까지 올린 나는, 인중을 간지럽히는 따스한 콧바람을 느끼며 그녀를 애무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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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유키, 나 읽을 만한 소설책 좀 빌려줘.”
천진난만한 카나의 목소리에, 이불을 덮고 누워있던 미유키가 책상을 가리켰다.
"알아서 골라..."
“응. 너 근데 어디 아파?"
“아니... 그냥 힘이 없어서 그래..."
“왜? 마츠다 군이랑 그거 해서?"
카나의 농담 섞인 물음에, 미유키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상한 소리할 거면 나가...!"
“왜 화를 내? 찔려?”
“찔리긴 뭐가 찔려...! 책 안 빌려줄 거야...!"
“난 빌릴 건데?"
콧방귀를 낀 카나가 책장을 유심이 살펴보더니, 두꺼운 책을 한 권 빼내고는 침대로 다가갔다.
“딸기 먹을래? 엄마가 방금 사왔대."
“딸기....? 갖다 줄 거야?"
“아니. 네가 내려와서 먹어."
“그럼 안 먹을래. 얼른 나가. 책 스포일러 말해버리기 전에.”
"와... 사람이 왜 저렇게 유치해졌지...? 혹시 지금 그날이야?"
“아 좀...!"
"알았어, 나갈게. 미안."
예민한 동생의 모습에 찔끔한 카나가 사과를 하고는 재빨리 방에서 도망갔다.
고요해진 방 안을 만족스럽게 훑어본 미유키는, 다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아랫배가 쿡쿡 쑤신다.
기분 좋은 고통. 요 며칠사이 성욕이 높아진 것 같다.
마치 오늘의 마츠다처럼 말이다.
체육실 안에서 한 번, 찬바람이 부는 옥상에서 한 번, 집 근처 자동차 뒷좌석에서도 한 번...
평일 날 세 번이나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아...’
차에서의 관계를 끝냈을 땐 진이 죄다 빠져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막상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나니 또 하고 싶어진다.
혼자 위로하면 조금 괜찮아지려나?
그러한 생각을 하던 미유키는, 자신이 망측한 상상을 했다는 사실에 저 혼자 찔끔하고야 말았다.
이건 다 마츠다 때문이다. 자신을 이렇게나 밝히게 만들다니...
지금쯤 속편하게 자고 있겠지? 갑자기 얄미워지는데, 달려가서 그를 깨운 다음 하자고 확 들이댈까 싶다.
그런데 마츠다가 왜 오늘 야외에서의 관계를 원했던 걸까?
야동을 언급하며 농담 겸 도발을 한 자신을 벌하기 위해서?
아니면 쓰리섬 야동을 보고 난 후 미유키 자신에게 뭔가 성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걸 채우려고 신선한 시도를 한 건가?
아니, 이 이유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과의 관계는 물론, 성관계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마음이 더 와 닿을 정도였고, 행동으로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본격적으로 삽입을 하기 전에 온힘을 다해 자신을 흥분시켜주었고, 하고 난 후엔 상냥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듣기 좋은 말을 해주었었다.
쓰리섬에 대한 건 없는 셈으로 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에 자꾸 걸렸다.
왜?봐버렸으니까. 마츠다의 취향을 알아버렸으니까.
우웅-!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끓어오르는 성욕을 억누르던 미유키는, 베개 옆에 놓아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기기를 집어 들었다.
[뭐해? 집이야?]
마츠다의 톡인 줄 알았는데, 테츠야가 보냈구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미유키가 화면을 두드렸다.
[나 그냥 누워있어.]
[그래? 할거 없으면 산책할래?]
산책이라...
찬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깨끗하게 비워놓고 싶긴 하고, 테츠야와 마지막으로 산책을 나간지도 오래 되어서 혹하긴 하지만...
지금은 쿡쿡거리는 아랫배 때문에 나갈 엄두를 못 내겠다.
[미안. 속이 안 좋아서.]
[속은 왜? 뭐 잘못 먹었어?]
그 속이 아니라 다른 속인데...
[그건 아니구... 잘 모르겠어. 일단 눈 좀 붙일게. 미안해, 테츠야 군.]
[아냐. 푹 쉬어. 심해진다 싶으면 가장 먼저 나한테 연락하고, 알았지?]
[믿음직스럽네? 고마워. 그렇게 할게.]
빈말로 답장을 보낸 미유키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형광색으로 빛나고 있는 스티커.
예전엔 저걸 보면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까.
오히려 약간 거슬리는 것 같기도 하다.
마츠다에게 영향을 받아서 어둑하고 음침한 게 좋아졌나보다.
'저게 문제가 아닌데...
지금은 스티커에 관심을 둘 때가 아니라, 지금 이 간질간질한 아래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가 문제다.
오늘 아예 마츠다의 집에서 자버릴까?
겸사겸사 취향에 대해 진지한 대화도 나누어보고, 마츠다가 잠에 들면 그 폴더에 있는 야동을 제대로 감상해볼까 싶기도 하다.
엄마한테 칭얼거리면 승낙해주려나? 몸을 헤프게 굴린다고 뭐라 할까봐 겁이 난다.
"하아..."
고민이 깊어지는 밤.
진득한 한숨을 내쉰 미유키는 아랫배보다 더욱 아래에 있는 예민한 부위를 꾹꾹 눌렀다.
그와 동시에 전신으로 찌릿하게 퍼지는 전류.
골반 부근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미유키는, 최대한 잠을 청해보려다가 버티지 못하고 침대에서 나왔다.
딸기나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