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61화 (161/313)

<161화>나나세 선배랑 너랑 하고 싶어 #2

미유키는 한참, 정말 한참의 시간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가죽으로 된, 위에 아무것도 없는 대시보드 커버를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있기만 했다.

나는 미유키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려 하다가,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일그러져있는 것을 보고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인고의 시간이 지난 끝에, 미유키가 날 돌아보았다.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나나세 선배의 경험이 없으니까, 마츠다 군이 경험시켜주겠다는 뜻이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구나.

그게 맞아.

"아니 뭐...."

나는 미유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야."

미유키가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날 부르자 온몸이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마츠다 군'이라고 부르던 그녀가 저런 호칭을 쓰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갑자기 전신에 오한이 든다. 히터를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추워.

"...응."

"죽을래?"

"미안..

"내가 마츠다 군이 말하면 다 들어주는 호구로 보여?"

"아니."

"그러면? 진짜 죽고 싶어서 그래?"

소리를 지르지도, 때리지도, 울지도 않고 냉정해서 더 무섭다.

하렘은 만들고 싶지만, 네게 허락을 구하고 싶은 내 마음... 혹시 알아줄 수 있을까?

라고 말하고 싶은데... 괜히 화를 돋울 필요는 없지.

또한 뭘 지껄이든 내가 쓰레기라는 건 변함없잖아.

그러니 그냥 짜져있어야겠다.

"이게 마츠다 군의 상식으로는 가능한 일인가보네?"

"그게 아니라..."

“아니면 이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뭔데?”

“미유키. 잠깐만..."

나는 슬슬 얼굴이 빨개지려 하는 미유키를 달래기 위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미유키가 팔을 확 휘둘러 내 손을 뿌리쳤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본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음을 느꼈다.

도키아카 인생 최대 위기, 온 것 같다.

나는 머릿속에서 주판을 굴리는 일을 멈추고, 미유키에게 진심을 다한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 진짜."

그에 자신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문 미유키가 격한 감정을 드러냈다.

"씨이이....!"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그녀.

아무래도 좆 된 것 같다. 일단은 안 하겠다고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미유키를 바라보고 있을 무렵, 그녀가 불쑥 손을 뻗어 내 제복 앞섶을 잡아채더니 상체를 끌어당겼다.

속절없이 당겨지는 내 몸.

미유키가 처음 보여주는 박력 있는 모습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그녀가 인상을 마구 찌푸리더니 물었다.

“나나세 선배랑 뭐 있었어?"

저런 질문을 할 만도 했다.

뭔 자신감으로 다짜고짜 치나미와 자겠다고 한 건가 싶겠지.

"친하기만 해."

“단둘이 마사지도 해줄 만큼?"

“그건 고생했다는 뜻으로...”

“나로는 모자라? 성욕이 감당이 안 돼?”

"야...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러냐...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절대 아니야."

그 말에 미유키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현 상황에서 내가 어떠한 말을 하든 핑계로 들릴 텐데도 저런 반응을 보인다는 건, 미유키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그녀와 관계를 가질 때 얼마나 진심인지 말이다.

여태까지의 노력이 빛을 보는구나.

이런 곤란한 상황에서 타개책으로 쓰기 위해 그런 식으로 행동한 건 아니지만, 미유키의 화를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으면 뭐가 됐든 좋은 거지.

"나 좋아하긴 해?"

"당연하지."

“방금 한 말을 생각해보면 안 믿기는데?”

"어떡해야 믿어줄 건데? 지금 옷 다 벗고 차에서 내린 다음 소리라도 지를까?”

“해봐.”

"알았어."

미유키에게서 조심스레 떨어진 나는 제복 와이셔츠에 손을 가져갔다.

위에서부터 하나 둘씩 풀리는 단추, 그로 인해 드러나는 가슴.

절반쯤 셔츠를 벗은 나는 바지의 클럽마저도 풀어버린 뒤, 차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러자 미유키가 내 팔을 때렸다.

"미운 짓만...!"

찰싹!

"골라서 하고 있어.."

찰싹!

"진짜 짜증나게...!"

찰싹!

따끔할 정도의 힘으로 팔을 세 대 때런 미유키는, 잠자코 있는 날 지그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아... 단추 다시 채워.”

나가란다고 진짜 나간 아들을 다시 끌고 오는 어머니 같다.

머리채는 안 잡아서 다행인가?

어쨌거나 마음이 조금 놓인다. 냉랭했던 차 안의 공기가 약간이나마 따스해지는 게 느껴져서.

"응."

순순히 대답한 나는 느릿느릿 옷을 여몄다.

이런 내 모습이 답답했던 걸까?

미유키가 콧바람을 훅 내뿜더니, 내 단추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날 홀깃거리며 투덜거렸다.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거야 대체... 쓸데없이 솔직해가지고...”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못하겠네....”

"됐어, 이 멍청아."

멍청이라니... 바보에서 승격했구나.

이걸 기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모르겠다.

"근데... 마츠다 군이 하고 싶다고 해서 바로 가능해...? 이런 대화를 나눠본 적이나 있어?"

이어지는 미유키의 물음에, 나는 귀를 쫑긋했다.

설마 해주려는 거야? 정말로?

"없어."

“그럼 어쩌려구? 나나세 선배 같은 순진한 분이 승낙해주시지는 않을 것 같은데...”

“지도만 해보려고 했어."

“선배가 싫은 기색을 보이면?"

"그럼 포기해야지."

“그래...?"

미유키의 표정이 더 풀렸다.

치나미가 절대 자신의 몸을 내어줄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조금은 안심하고 있는 건가 싶다.

“마츠다 군은 나나세 선배랑, 그리고 나랑 꼭 하고 싶은 거야?"

“원래는 그랬는데, 네 반응을 보니까 생각이 조금 바뀌려고 하네. 난 아무래도 좋아.”

“....그럼 누구로 섭외할 건데....?”

살짝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는 것 같다.

여기서는 아예 확 물러나자.

단, 물러나는 척만 하면서 상황을 보는 거다.

“섭외가 아니라 그냥 안 해도 돼. 네가 어제 허락해주니까 잠깐 눈이 돌아갔어."

"......"

"안아도 될까?"

"안돼.."

거부하고 있었지만, 미유키는 상체가 아주 미세하게 내 쪽으로 쏠린 상태였다.

그것을 포착한 나는 머뭇머뭇 눈치를 살피며, 미유키를 천천히 끌어안았다.

내 품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있는 미유키의 몸.

나는 그녀의 등을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쓸어내리길 반복했다.

그러자 미유키의 팔이 천천히 들리면서, 내 겨드랑이 사이로 들어와 광배를 압박했다.

그에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린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들어주는 건 진짜 딱 한 번뿐이야."

미유키가 먼저 선수를 쳤다.

“무...."

“말 아직 안 끝났어. 크리스마스 전까지 난 어제오늘 있었던 일을 모르는 일로 치부할 거야. 만약 그때까지 나나세 선배랑 잘 끝나지 않았다? 그럼 그대로 끝. 쓰리섬 같은 건 없었던 일로 될 거야.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알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포옹을 풀고 미유키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는 진지한 투로 말했다.

"억지로 허락해주지 않아도 돼."

"억지가 아냐.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마츠다 군한테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서 그래. 나도 찝찝할 테고..”

찝찝하다라....?

내 취향을 이미 엿봐버린데다가, 특별히 쓰리섬까지 허가해줬는데 여기서 흐지부지 돼버리면, 마음 한구석에 켕기는 무언가가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리고 허락을 해주면 마츠다 군은 앞으로 나한테 더 잘하게 될 거잖아."

"그야..."

“응. 난 그럴 거라고 생각해."

“아니, 내가 말할 틈을 안 주면...”

"그럴 거잖아. 그치?"

“그렇긴 하지... 근데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나는 너한테 잘할 거라는 말을 하고 싶...”

“마츠다 군은 눈치가 없어?"

그 말에 핑계거리를 쏟아내려던 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여기선 쓸데없는 소리는 지양하고 미유키의 천사 같은 자비로움을 받아들이는 게 맞다.

미유키의 저 대답은 날 너무나 생각해서 나온 답이었다.

물론 앞선 대화로 인해 내가 치나미가 관계를 가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해서 저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어차피 안 될 사이인데, 마음껏 시도해보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를 허락해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터.

그런 그녀의 마음도 몰라주고 눈치없이 핑계거리를 쏟아내려고 하다니... 하렘물 주인공 실격이다.

미유키의 반응을 보고 앞으로의 일이 망할 거라고 생각해 판단력이 흐려졌었나보다.

고마워, 미유키.

네 말대로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그리고 네가 쓰리섬에 취향까진 아니더라도, 거부감이 없어질 정도까지는 열심히 달려볼게.

속으로 진심을 전한 나는 미유키를 다시 끌어안고, 차 안에서 오랜 시간동안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기한은 크리스마스까지.

그때까지 치나미에게 미유키와의 쓰리섬을 유도하지 못하면, 하렘은 물 건너갔다고 봐야한다.

촉박하구나. 그래도 어떻게든 해내야지.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내가 치나미와 가까운 건 맞다. 잠자리까지 가는 것도 순탄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렘... 아니, 쓰리섬은 다른 영역.

치나미와 나는, 엄밀히 말해 미유키와 나만큼의 유대감이 쌓여있지 않았다.

시간만 있다면야 천천히 치나미를 녹여 유도를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니...

당장 나와 매일 붙어있다시피 하던 미유키마저도 천운이 따라서 간신히 승낙을 받을 정도인데, 치나미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치나미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그녀와 자는 것이 먼저니까... 거기에만 집중하자.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