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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70화 (170/313)

“무, 뭐하는 거야...? 너무 가까우니까 좀 떨어져...!”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미간을 구기는 그녀.

자존심을 세우려는지 고개를 치켜들려는 모습이 가소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다.

“오늘 돌아가면 뭐할 거예요?”

“몰라...!”

“몰라요? 계획이 없어?”

“치나미랑 놀 거야...!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기로 했어...! 제발 좀 가...!”

큰소리로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짜증을 내자니 쪼잔해보이고...

그런 딜레마에 빠진 게 티가 난다.

거의 앙탈을 부리다시피 하는 렌카를 보며 킥킥거린 나는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다음엔 저도 같이 가요.”

“뭐래... 싫어.”

“왜 싫어?”

“평어 섞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되게 딱딱하게 구네. 알았어요.”

“딱딱한 게 아니라, 기본적인 예의야.”

“그럼 부장은 기본적인 예의가 있어서 절 쓰레기만도 못하게 취급한 건가요?”

“.... 말이 너무 심하잖아... 쓰레기라니... 내가 널 좋게 대하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생각한 적은 없어.”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상을 드리고 싶은데...”

‘상’이라는 단어에 어깨를 달싹인 렌카의 표정이 구겨졌다.

“피, 필요 없어...! 상은 무슨...”

“알아서 줄게요. 근데 혹시 고양이 좋아해요?”

“.... 고양이?”

고개를 갸웃하는 렌카.

내 물음에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려는지, 잠깐 침묵한 채로 눈을 끔벅인 그녀가 반문했다.

“왜...?”

“그냥요.”

“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좋아하긴 하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할까 불안해서 반대로 대답하는구나.

속이 다 보인다.

“알겠어요.”

“.... 뭔데? 왜 물어본 건데?”

“그냥이라고 했잖아.”

“네가 그냥 물어볼 리가 없어... 똑바로 대답해.”

덜컥.

렌카가 날 재촉하는 사이, 탈의실 문이 열리며 얼굴이 붉게 상기된 치나미가 나왔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끊긴 우리의 대화.

입을 꾹 다문 렌카를 향해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나는,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코스프레 복장을 생각했다.

근시일 내에 입히려는 건 아니지만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연말에 재고가 없어질 가능성이 크니까, 슬슬 주문해놔야지.

“아 진짜? 마츠다 군이랑 같이 단체전에 나간다구?”

놀란 듯한 미유키의 물음에, 뒷좌석에 앉아있던 테츠야가 앞좌석 사이로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미유키를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응. 응원 올 거지?”

“음... 언제 하는데?”

“새해 전에. 수학여행이랑 겹치는 시기는 아냐.”

“그래? 그러면 가야지. 꼭 응원할게.”

“알았어.”

만족스런 표정으로 헤실거리는 테츠야.

쪼개는 꼴을 보니 짜증이 난다.

미유키와 할 대화 주제를 하나하나씩 까먹는 이 새끼가 너무 싫다.

이래서 태우기 싫었던 건데... 민폐가 따로 없다.

그렇게 테츠야를 집에 내려주고 미유키의 집으로 가는 길.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는 내게, 그녀가 물었다.

“마츠다 군은 왜 대회에 나간다고 말 안 했어?”

“말하려고 했는데, 쟤가 먼저 했어.”

“왜 마츠다 군이 먼저 안 해?”

음음...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이다.

동시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테츠야가 지껄이는 것보다 내가 알려주는 걸 더 선호하는 듯해서.

아니, 근데 테츠야가 음식물 찌꺼기보다 못한 놈이란 걸 감안하면 당연한 거잖아.

“먼저 하려고 했다니까.”

“근데 안 했잖아.”

“쟤가 선수를 쳐서 그래.”

“마츠다 군이 먼저 치면 되는데?”

“주먹으로?”

“.... 생각하는 거 하고는... 하나도 재미없거든?”

헛웃음을 친 미유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행을 하면서 미유키를 흘깃거린 나는, 차창에 희미하게 반사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아랫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리고 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건가?

가끔 평소엔 무시할 정도로 재미없는, 툭 던지다시피 하는 개그에 터질 때가 있는데 지금 미유키가 그런 상태인가보다.

“웃기냐?”

“.... 재미없다고 한 거 못 들었어?”

“나 봐봐.”

“싫어. 운전에 집중해.”

“웃었네.”

“누가 그래?”

“웃고 있잖아.”

“아니라니까?”

시답잖게 티격태격하는 사이, 차가 미유키의 집에 도착했다.

그에 툴툴거리던 미유키가 안전벨트를 풀고 자신의 가방을 챙겼다.

이후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다가,

“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놀란 탄성을 터뜨렸다.

그 반응에 뭔가 싶었던 내가 물었다.

“뭔데?”

“마츠다 군...!”

“어.”

“눈 와...!”

“눈?”

“응. 눈. 빨리 내려봐.”

미유키를 따라 차에서 내린 나는, 그녀의 말마따나 희고 자그마한 눈송이가 솔솔 내리고 있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첫눈 시기가 되긴 했지. 요즘 고생하고 있는 내게 주는 신의 선물인가?

보통은 크리스마스에 첫눈이 내리고, 그때 뽀송뽀송한 데이트를 하는 게 일반적인 클리셰지만... 지금 보는 게 차라리 낫다고 본다.

크리스마스엔 쓰리섬 때문에 분위기가 묘할 테니까.

“와아...!”

감탄을 하고 있는 미유키의 옆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긴 나는,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내 쪽으로 당겨왔다.

추위로 인해 연한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그녀의 뺨을, 엄지로 부드럽게 쓰다듬은 내가 말했다.

“조금밖에 안 내리네.”

“그러게... 그래도 매번 비만 왔었는데, 오늘 눈 보니까 좋다.”

“많이 내릴 때 놀러가자.”

“응.”

미유키의 표정은 제법 상기되어있었다.

매년 보는 눈이지만 이번엔 나와 함께 있어서 감회가 남다른 듯하다.

말없이 한참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미유키가,

“흐응...”

돌연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눈을 보고 풋풋한 마음이 인 모양이었다. 그녀 특유의 기분 좋은 콧소리를 내뱉기까지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좋아해. 많이...”

내 가슴팍에 자신의 얼굴을 부비적거린 미유키의 고백.

그녀의 등을 토닥인 나 또한 진심어린 감정을 전했다.

“나도.”

**

미유키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치나미에게 연락을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신호음이 두 번도 채 지나가기 전에 전화를 받는 치나미.

독특한 그녀의 인사에 피식한 내가 물었다.

“지금 어디에요? 부장이랑 아이스크림 먹고 있어요?”

-네. 맞아요.

“혹시 눈 내린 거 봤어요? 잠깐 내렸었는데.”

-으응...? 눈이요...? 여긴 내리지 않았어요.

“엄청 조금 와서 못 봤을 수도 있겠네요. 아쉽게 됐습니다.”

-으음... 정말 첫눈이 왔었나요?

“예.”

-세상에... 세상에...! 첫눈을 놓치다니 올해는 아주 불운하겠네요...! 물론 내년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요.

그런 미신도 있었어? 처음 들어본다.

치나미가 스스로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역시 엉뚱하다.

치나미가 눈을 봤다면 당장 달려가려고 했다.

기념할만한 날이니만큼 그녀와도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못 봤다니까 뭐... 다음 기회를 노려야지.

-뭐야? 누구야?

수화기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는 렌카의 의아한 목소리.

한숨을 포옥 내쉰 치나미가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대답했다.

-마츠다 후배님이신데, 첫눈이 내렸대요.

-눈? 여긴 안 왔잖아.

-조금 내려서 못 봤을 수도 있대요.

-거짓말이야. 믿지 마.

렌카가 자꾸 업보 스택을 쌓고 있다.

계속 그렇게 해봐라. 어떻게 되나.

-거짓말이라니요... 마츠다 후배님께서 저를 속이실 이유는 없어요.

-빨리 끊고 아이스크림 먹자. 네가 좋아하는 아이스 모찌도 나오네.

-앗...! 흠흠... 후배님. 먹고 다시 전화를 드려도 괜찮을까요?

나보다 모찌가 더 중요해? 서운하게 하네?

이게 다 렌카 때문이다. 저 악독한 여우가 치나미를 홀려서 그렇다.

갚아주지 않으면 도리가 아니겠지?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나는 곧장 노트북을 열어, 이벤트용 코스프레 옷을 파는 사이트에 들어갔다.

거기서 다음에 사용할 여러 소품들과 옷을 구매해놓은 뒤, 귀여운 장갑을 파는 쇼핑몰에 접속했다.

치나미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본 품목은 장갑이었다.

일반적인 겨울용 장갑이 아니라, 벙어리 장갑 말이다.

부피가 얇은 니트형 벙어리 장갑은 안 된다.

치나미는 무조건 두툼한 것으로 껴야 해. 색깔은 핑크나 베이지색이 어울릴 듯하다.

그 상태로 자신의 자그마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마치 율동을 하듯 손인사를 하는 치나미를 상상해보니 절로 아빠미소가 새어나오려고 한다.

그나저나 다음 관계는 언제 할까.

쓰리섬 전에 몇 번 해서 치나미를 적응시켜놓고 싶은데... 날을 한 번 잡아봐야겠다.

**

다음날.

미유키와 함께 등교를 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테츠야가 들어오자 미간을 좁혔다.

놈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어있었기 때문이다.

“테츠야 군, 왔어? 오늘 오후수업 때 쪽지시험 있으니까 미리 복... 습...”

미유키 또한 그의 요상한 머리를 발견하고는 인사를 하다 말고 당혹스러워했다.

“스타일 조금 바꿔봤는데... 어때?”

우리의 반응을 살핀 테츠야가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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