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응... 여기까지 해...”
그녀의 수줍은 대답을 들은 내가 물었다.
“갈까?”
“마, 마츠다 군은 양호실로 가서 머리 아프다고 해... 그리고 다음 수업시간 전에 와... 지금 같이 돌아가 버리면 의심할 게 분명하잖아...”
교사에게 써먹을 알리바이를 만들라 이거구나.
확인 같은 건 안 할 거라고 보지만, 미유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알았어.”
“그, 그리고 이번에 빠진 수업 내용은 점심시간에 가르쳐줄 거야... 그렇게 알고 있어...”
“꼭 그렇게까지 해야 돼?”
“해야 돼...! 기말고사 얼마 안 남았잖아... 이 바보야...”
맨날 저 타령으로 날 공부시키려고 하네.
미유키의 흐트러진 앞머리와, 격한 스킨십으로 구겨진 그녀의 와이셔츠까지 잘 정리해준 내가 말했다.
“알겠으니까 1학년 복도까지만 같이 내려가자.”
“안 돼... 누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럼 내가 알아서 잘 둘러댈게. 가자.”
“.... 응.”
**
“마츠다. 잠깐 이리 와봐.”
부활동 시간, 즐거운 마음으로 치나미와의 재회를 꿈꾸며 검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나는 렌카의 부름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발끈한 렌카가 미간을 구기고는 내게 따져왔다.
“부, 불만이라도 있어?”
“아뇨. 없습니다.”
“근데 표정이 그게 뭐야...!?”
“표정이 왜요?”
“방금 귀찮다는 듯이 쳐다봤잖아...!”
음음... 렌카가 점차 내 눈칫밥을 먹게 되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다.
이게 계속되면 관심을 갈구하는 타이밍이 올 테지.
“그런 적 없습니다.”
시치미를 뚝 떼며 렌카에게로 다가간 내가 말을 이었다.
“왜 불렀어요? 할 말 있어요?”
그에 렌카의 콧등에 져있던 주름이 사라졌다.
씩씩대봐야 얻는 게 하나도 없을 거라고 깨달은 듯했다.
그래, 노예는 노예답게 주제를 잘 알아야하는 거야.
엉덩이 한쪽에 칭찬도장 찍어줄게.
“하... 훈련은 잘 하고 있나 물어보려고 불렀어.”
“스승님한테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혼자 연습 같은 건 해?”
“최근엔 안 해요.”
“대회가 코앞인데?”
“바쁜 일이 조금 많아서요.”
“.... 야. 개인차가 있긴 하겠지만 선봉은 대장 다음으로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해. 만약 자만하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면, 피해를 보는 건 너뿐만이 아니라 팀원 전체야.”
그런 건 조연이나 악역한테 나타나는 상황이라고.
주인공인 나한텐 그런 거 없어.
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연습은 해야 맞긴 하다.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재능은 있으나마나니까.
열혈 청춘 스포츠물에서나 나올 법한 생각을 한 내가 순순히, 그리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이랑 같이 열심히 할게요.”
“.... 그래.”
“근데 부장.”
“뭐.”
“어제 스승님이랑 뭐 먹었어요? 요거트 피치?”
“네가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그렇긴 하죠. 근데... 어제 왜 절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 이상한 사람이라니?”
“첫눈 내렸다고 하니까 거짓말이라고 했잖아요.”
그 말에 렌카의 표정이 곤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 그걸 엿들었어...?”
“큰 소리로 말해놓고선 엿들었다 하면 안 되죠.”
“그게... 나나 치나미는 못 봤으니까...”
“제가 봤으니까 혹시 부장이나 스승님도 봤나 연락해본 거죠. 그리고 부장이 못 봤다고 해서 사람을 그렇게 함부로 판단하면 어떡해요?”
“.....”
“할 말 없죠? 이거 기억해두겠습니다.”
이걸 빌미로 검도대회 때 렌카에게 보상을 요구하는 것도 좋아 보인다.
가령 한 점도 내주지 않고 선봉 대결에서 승리할 경우, 뭘 달라는 식으로.
렌카는 당연히 거절하겠지만, 날 거짓말쟁이라며 음해한 것을 들먹이면서 우기면 되지.
“선봉은 후배님 같은 초심자가 나오지 않아요. 대장 다음가는 포지션이라서 엄청 센 검도인을 내세우지요.”
가져온 복숭아 조각을 입에 넣고 냠냠 먹으며 말을 하고 있는 치나미.
렌카가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다.
선봉과 대장의 중요성에 대해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다는 뜻이었다.
“그렇습니까?”
“보통은 그래요. 복숭아 드실래요?”
“주세요.”
“네.”
자그마한 플라스틱 포크로 모모님이 그려진 밀폐용기를 뒤적거린 치나미는, 그 안에서 가장 큰 복숭아를 찍어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한 입에 집어넣은 내가 우걱우걱 턱을 움직이자, 치나미의 입에서 프힣... 하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잘 드시는 모습을 보니 보기 좋네요. 살이 찔 수도 있겠어요.”
“돼지가 되면 스승님이 키워줘요.”
그 말에 치나미의 뺨에 홍조가 감돌았다.
속뜻이 꽤나 야한 중의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자, 자제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는 이런 곳에서 그런 말씀을 하는 건 옳지 않아요...”
말하는 걸 들어보니 확실하다.
나는 그냥 순수하게 농담 식으로 말한 건데... 치나미도 슬슬 변태가 다 되어가는구나.
아니,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던 본성이 깨어나고 있다 해야 옳은 건가?
머쓱한 듯 입맛을 다시며 복숭아의 잔향을 없앤 나는, 수줍어하고 있는 치나미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리고는 치나미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닦아낸 복숭아 즙을 내 입 안으로 쏘옥 가져가 빨았다.
“흐에엑...!”
그 행동에 몸을 달싹일 정도로 놀란 치나미가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양손으로 눈두덩을 꾸우욱 누르고 있는 모습이 귀엽다.
딱 붙인 무릎 위에 올라가있는 모모님 용기가 소품이 되어줘서 평소보다 더 깜찍하게 느껴진다.
이러다 나도 모모님에 미쳐가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후, 후배님...! 그런 망측한 행동을...”
치나미의 할머니 같은 말투에 피식한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턱 밑으로 내렸다.
“뭐가 망측한데요?”
“모, 몰라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회에서의 전략을 생각해보고 집중훈련을 할 때에요...! 그런데 딴 짓을 하면 어떡하나요...!”
“저는 듣고 있었는데 스승님이 먼저 복숭아를 주고, 잘 먹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칭찬했잖습니까.”
“.... 그런가요? 어, 어쨌든 다시 시작하겠어요. 참... 아휴...”
후끈한 얼굴을 식히려는 듯 손부채질을 하더니, 이상한 추임새를 넣는 치나미.
얼마 지나지 않아 다소 진정이 된 듯한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시합이 시작하자마자 선제공격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봐요. 겨눔세를 취하고 있다가 그대로 내리치는 것이지요.”
그렇지. 선빵필승 중요하지.
“그렇군요.”
“다만 후배님의 기검체가 정교하지 못해 상대방이 높은 확률로 공격을 막고 반격을 할 텐데, 그때... 잠시만요...”
모모님 용기를 벤치 옆으로 밀어놓은 치나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후 가상의 죽도를 잡듯 손을 한데 모으고, 뒤로 폴짝 물러나며 손목을 튕긴 뒤 날 바라보았다.
“그때 이렇게 반 보 뒤로 밀어걸으면서, 상대방의 손목을 노리고 퇴격을 하는 거예요. 이해하셨나요?”
“스승님의 설명이 쉬워서 머릿속에 쏙 들어옵니다.”
“훗후... 과찬이세요. 이 공격과 반격을 대회 전까지 틈틈이 연습하여 체득하도록 하세요.”
칭찬에 콧대가 높아진 치나미가 다시 앉더니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본 내가 물었다.
“그것만 연습하면 되나요?”
“물론 다른 기본기도 연습을 할 것이랍니다.”
“알겠습니다.”
“네.”
“예.”
“.....”
“.....”
“....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는 건가요?”
“저도 복숭아 줘요.”
“앗, 죄송해요. 저 혼자만 먹어버리고 말았군요.”
다급하게 복숭아를 내미는 그녀.
미안함이 가득 담겨있는 얼굴을 보니 혼자 다 먹을 생각은 아니었구나 싶다.
뭔가 웃기면서도 달달한 상황이네.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
**
따닥-!
죽도를 맞부딪치고는 뒤로 빠르게 물러나는 렌카와 테츠야.
중심을 잘 잡으며 흔들림 없이 자세를 잡는 렌카와는 다르게, 테츠야의 경우는 균형을 잃어 비틀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렌카가 디딤발을 크게 내딛으며 다시금 공격을 감행했다.
“머리!”
쩌억-!
그러자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심판을 보고 있던 3학년 선배가 깃발을 들어올렸다.
“한판!”
그대로 머리를 허용하고 점수를 내어준 테츠야는, 애꿎은 자신의 호면을 툭툭 두드리고는 구획선 중앙으로 향했다.
그리곤 렌카와 서로의 죽도 끝을 맞대며 입례를 하고는, 죽도를 회수한 채 서로의 눈을 마주치면서 구획선 밖으로 물러났다.
“수고했어. 어제보다 훨씬 낫다.”
그렇게 간단한 경기를 끝낸 렌카의 칭찬.
낑낑거리며 호면을 벗으려 노력하던 테츠야가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 한참 멀었죠.”
“대회 전까지는 경기를 많이 하는 게 좋겠어. 그래야 실전경험이 늘어나니까. 이리 와봐. 호면 끈 푸는 거 도와줄게.”
“아,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씨발.
나는 빨빨거리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저 씨발놈은 속편하게 렌카의 시중을 받고 있네.
렌카는 왜 저딴 떨거지를 챙겨주는 거지?
게다가 내 허락도 없이 저러다니... 노예가 언제부터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는가?
훈육이 필요하다. 벌을 줘야겠어.
“부장! 잠깐 여기 좀 보실래요?”
제법 큰 소리로 렌카를 부르자, 움찔한 그녀의 시선이 내 쪽으로 움직였다.
“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 잠깐 기다려봐.”
미심쩍은 표정으로 날 흘깃거린 렌카는, 테츠야의 호면 끈을 꼼꼼하게 풀어주고 나서야 내게 다가왔다.
“뭔데...? 문제라도 있어?”
“문제는 없고요. 저나 좀 도와줘요. 같이 수건 개요.”
수건을 반쯤 덜어 렌카 쪽으로 옮기자, 헛웃음을 친 그녀가 팔짱을 꼈다.
“미쳤어? 뻔뻔해도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같이 개요.”
“싫어. 내가 왜?”
“같이 개자니까?”
“억지 부리지 마...! 나 지금 애들 가르쳐주고 있잖아...!”
“같이.”
“.... 간다. 알아서 해.”
“갈 수 있으면 가봐요.”
“못 갈 건 뭐가 있는데?”
“가요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