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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73화 (173/313)

의미심장한 말투가 주효했을까?

온몸을 흠칫 떤 렌카가 눈을 굴렸다.

또 내게 무슨 트집을 잡힐지 불안한 듯했다.

“내,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있지. 내 앞에서 테츠야의 더러운 몸을 만진 게 잘못이다.

놈에게 미소를 지은 게 잘못이야. 말을 섞은 것도 잘못이고, 친절하게 대한 것도 잘못.

다 잘못이란다.

“많죠.”

“무, 뭐가 많은데? 그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 때문에 그래?”

“빨리 같이 개요.”

웃는 낯으로 렌카를 살살 구슬린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은 그녀가 수건더미 가장 위의 수건에 손을 대자 입꼬리를 올렸다.

“억지로 하는 거예요?”

“네가 협박했으니까...!”

“협박 아닌데.”

“시끄러워...! 조용히 개게 놔둬...!”

“알았어요.”

원래라면 쓰리섬 이후에 렌카에게 집중하려 했으나, 부끄럼쟁이 치나미에게 다음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살짝 부담스러운 타이밍이라서...

이참에 따로 렌카의 전용 이벤트를 하나 챙겨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어차피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니까, 짬나는 시간에 이것저것 해야지.

예전에도 생각했었지만, 원래 히로인 동시공략을 위해선 뽈뽈 돌아다니는 게 맞는 거다.

겨울에 그녀를 아카데미 밖에서 만났을 때 일어날만한 이벤트가 뭘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서브컬쳐와 관련된 것들.

한두 번 써먹기도 해서 식상하긴 하지만, 이벤트가 발생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이벤트라면 역시 코미케.

다만 이 행사의 날짜는 12월 말로 미리 정해져있어 앞당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전에 렌카의 육체나 정신을 어느 정도 조교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또한 내가 애니쉐어에서 그녀에게 쪽지를 보내는 사람임을 의심할 정도로만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씹덕기질이 충만한 그녀의 특성을 잘 고려해보면서 방법을 찾아보자.

“야.”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렌카의 부름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요?”

“수건 똑바로 개. 죄다 비뚤거려서 성의가 전혀 없어 보이잖아.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데 집중을 못해?”

“부장이 갠 것도 마찬가지로 비뚤거리는데요?”

“눈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어딜 봐서?”

“여기 귀퉁이 튀어나왔잖아요.”

“네가 갠 거랑 비교하는 거야? 이상한 억지 부리지 마.”

“이상한 억지는 부장이 잡고 있는 게 아닐까요?”

“아니거든?”

새침한 태도를 보여주는 렌카.

불만이 가득한 그녀의 표정을 바꿔주고 싶다고 생각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원들 모두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다.

테츠야는... 대회에 참가하는 선배 한 명에게 가르침을 받는 중이었다.

나와 렌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이를 확인한 내가 렌카를 불렀다.

“부장.”

“부르지 마.”

“오늘도 스승님이랑 제가 단둘이 있으면 방해하러 올 거예요?”

“뭐라는 거야... 내가 언제 방해했어? 매니저 일을 도우려고 했던 거지.”

“그렇다고 칩시다. 근데요... 부장.”

“부르지 말라니까? 일하라고. 일...!”

“다른 사람한테 친절하게 굴지 마세요.”

“.... 응?”

“짜증나요.”

“.... 뭐래?”

렌카가 자신의 눈을 두세 번 깜박였다.

얼빵한 표정을 보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짜증이 아니라 질투가 난다며 대놓고 말할 걸 그랬나?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정도도 못 알아듣지는 않을 거다.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아마 집에서 밥을 먹는다거나 자려고 누울 때, 이번 대화의 맥락을 곰곰이 되새겨보다가 눈치채겠지.

대신 멘트를 추가로 쳐서 임팩트를 심어주자.

렌카가 지금 이 대화를 곱씹을 수 있도록.

그리 생각한 나는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있는 렌카를 쓰윽 쳐다보며 지나가듯 말했다.

“아닙니다. 근데 오늘 예쁘네요.”

“무, 뭐...? 뭐라고...?”

대놓고 외모를 칭찬하자, 렌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순식간에 귀까지 빨개지는 그녀의 얼굴.

그녀의 반응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나는, 말없이 수건을 접기 시작했다.

@@

“갈게, 치나미. 재미있었어.”

“저도 재미있었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치나미.

언제나 예의가 바른 자신의 친구를 보며 포근한 미소를 지은 렌카가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치나미와 헤어진 그녀는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깍듯한 인사를 드렸다.

이후 샤워를 마친 뒤, 자신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말렸다.

마지막으로 방 안에 놓여있는 피규어 진열대를 눈으로 살폈다.

하루 일과의 끝을 알리는 감상.

그것을 마친 렌카는 침대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덮었다.

“하아...”

서늘했던 이불이 체온으로 인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노라면 겨울이 왔다는 게 실감난다.

여름엔 따뜻한 이불이 싫어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시원한 부분을 찾았는데, 지금은 꼼짝도 하기 싫다.

벌써부터 밖으로 나가기 싫은 기분. 귤을 까먹고 싶어지기도 한다.

“.....”

조용한 방 안에서 멍하나 있다 보니 오늘 부실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아니, 사실 치나미와 놀 때부터 틈틈이 떠오르고 있었다 해야 옳았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히 굴지 말라는 마츠다의 말.

처음엔 이상한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었으나, 이어진 마츠다의 ‘오늘 예쁘다’는 칭찬을 듣고 나서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대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한 걸까?

마츠다는 치나미와 좋은 관계를 갖고 있지 않나?

서로 굉장히 화기애애한 것 같던데...

그런 와중에도 자신에게 예쁘다고, 다른 사람들한테 친절하게 굴지 말라고?

‘미친놈 아니야...?’

미친 바람둥이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놀려주기 위해서.

둘 중 하나가 틀림없었다.

자신에게 가만히 서있으라며 명령을 내리고, 철창에 가둬버리고, 메이드복 코스프레를 시킨 걸 보면 후자일 것 같긴 하지만...

소원을 사용했을 때마다 보여준 이상야릇한 눈빛이 걸린다.

심지어 마지막 소원이 끝났을 땐, 나가기 전에 자신이 너무 좋아지려고 한다고까지 했었다.

‘그것도 놀리는 거겠지...?’

자신이 알기론 그때도 치나미와의 관계가 좋았었는데, 만약 저 칭찬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면 마츠다는 또라이가 맞다.

얼굴만 믿고 여러 여자들에게 들이대는 쓰레기란 소리다.

물론 얼굴 외에도 좋은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목소리였다.

바닥으로 깔리는 중저음. 특히 조용히 말할 땐 귀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아냐...!”

갑작스레 쓸데없는 부분으로 생각이 넘어간 렌카가 자신의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어쨌거나 마츠다가 순진한 치나미를 벗겨먹을 기색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당장 그녀를 녀석의 마수에서 벗어나도록 만들 것이다.

속으로 그리 다짐한 렌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가,

우우웅-!

베개 옆에 놔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기기를 집어 들었다.

[부장. 머리 막고 받아허리에 대해서 여쭤볼 게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미우라가 보낸 톡이었다. 대회가 다가옴에 따라 요새 굉장히 많은 질문을 하는데, 재능도 있는데다 열정마저도 많은 후배를 둬서 기쁘다.

[전혀 안 귀찮아. 뭐가 궁금해?]

[감사합니다. 이게 팔이 생각대로 움직여지질 않아서 자꾸 삐걱거리는데, 어떻게 해야 부드럽게 반격에 나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건 글로 설명하는 건 조금 힘든데... 혹시 지금 연습 중이야?]

[이론만 찾아보고 있었어요.]

[그러면 내가 내일 아침에 따로 만나서 알려줘도 될까?]

[아,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다른 궁금한 건 없어?]

[내일 한꺼번에 여쭤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도 돼.]

[감사합니다, 부장. 푹 쉬세요.]

미우라와의 대화를 끝마친 렌카가 실소를 터뜨렸다.

예의가 참 바르다. 누구와는 다르게.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휴대폰에 또 다시 진동이 울렸다.

우우웅-!

[뭐해요.]

이번엔 마츠다의 톡이다.

미우라와는 달리, 글씨에서부터 예의가 없는 게 팍팍 드러나고 있다.

콧방귀를 낀 렌카는 답장을 하지 않으려다가, 왠지 마츠다가 꼬투리를 잡을 것 같은 우려가 들어 화면을 두드렸다.

[왜 연락하고 난리야?]

[심심해서. 스승님한테 연락하니까 답이 없어요.]

아니, 그럼 자신은 치나미와 연락이 안 되면 심심할 때 놀아주는 심심풀이용인가?

이렇게 생각하긴 싫지만, 마츠다가 부실에서 했던 말과 지금 이 톡이 맞물려서 모든 게 부정적으로 보인다.

신경질적으로 답장을 보내려던 렌카는, 자신이 왜 마츠다의 톡 하나에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러면 마치 그를 짝사랑해서 전전긍긍하는 소녀 같잖은가.

마츠다에게 감정 같은 건 없는데... 짜증이 난다, 짜증이 나.

[샤워하고 있겠지. 나 잘 거니까 그만 연락해.]

[저녁 여덟 시밖에 안 됐는데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졸리니까 자야지. 심심하면 검도 연습이라도 해. 장비도 골라줬잖아. 썩혀두지 마.]

[30분 정도 했어요.]

[더 해.]

답장을 보내고 화면을 빤히 쳐다보던 렌카는, 더 이상의 메시지가 오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대화를 나누길 포기한 건가? 자신의 싸늘한 태도가 먹힐 사람은 아닌데...

그래도 다행이다. 이제 편안하게 쉬어야지.

안도한 렌카는 휴대폰에 깔린 [애니쉐어] 어플을 켰다.

이후 요즘 관심을 두고 있단 신작 애니메이션 굿즈에 관한 정보를 얻어보려고 하다가, 쪽지가 와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쪽지함을 터치했다.

[추천해준 거 봤어요? 여자친구 조교일지. 안 본 건 아니죠?]

MK라는,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유저가 보낸 쪽지였다.

처음에 자신이 쓴 리뷰에 악플을 남겼길래 계도해보기 위해 친절하게 대해줬었는데, 여전히 예의가 없다.

‘여자친구 조교일지’는 보긴 봤다.

‘주인님의 비밀’보다 수위가 더 높은, 아예 그쪽 취향이 있는 사람들을 타겟으로 한 만화.

솔직히 보면서 재미도 느꼈고,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기도 했었다.

명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수작 정도는 될 정도의 만화였다.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렌카는 MK의 회원정보를 터치해, 그를 차단했다.

이놈은 악성 유저였다.

특별히 이 유저가 추천해준 작품까지 보고 리뷰까지 남겨줬건만... 별점이 낮다고 투정까지 부리는 사람.

자신에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존재였기에, 괜히 신경을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바에야 속편하게 차단을 해서 무시하는 게 나을 터였다.

BDSM 물을 많이 보는 사람이라서 궁금한 게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자신이 직접 찾아도 되니까 괜찮다.

‘그런데 이 사람 닉네임이...’

MK라... 마츠다 켄과의 이니셜 앞자리가 똑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마츠다일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요즘 그가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커뮤니티까지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냥 예절이 없는 말투와 이기적인 태도가 비슷해 닮았다는 느낌만 들었고, 이니셜이 같아 그저 떠오르기만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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