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74화 (174/313)

헌데 취향도 같지 않나? 이러면 조금 의심해볼만한 것 같기도...?

‘아냐... 그럴 리가 없지.’

그러려니 하며 번뇌를 싹 날려버린 렌카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곰돌이 젤리 봉지를 머리맡으로 갖고 왔다.

그리고는 누워서 신작의 정보를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

다음날.

미유키와 함께 주차장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가던 나는, 급식실 옆 식수대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렌카와 테츠야를 보았다.

렌카가 겨눔세를 취한 채로 허공에 손을 휘두르고 있는데, 테츠야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진지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딱 보니 열정이 과한 테츠야가 대회를 대비하겠답시고 기술 같은 걸 물어본 거구만.

저런 식으로 접점을 만드는 것도 능력이긴 하다.

그나저나 렌카가 어제 내 쪽지를 씹고, 애니쉐어에 신작에 관한 질문 글을 올렸었는데...

오늘 아마 관련된 굿즈를 사러 아키하바라에 갈 듯하니, 거기서 뭘 해봐야겠구나 싶다.

매번 애니와 관련된 이벤트를 찾아가다보니 조금 질리긴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지금의 나로서는 이런 한정적인 상황을 주워 먹는 방법밖엔 없지.

“뭐야? 테츠야 군이네? 이노오 선배도 계시고...? 검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을 발견한 미유키의 물음.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그렇겠지.”

“마츠다 군은 대회 대비 안 해?”

“하고 있어.”

“전혀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연습은 잘 하고 있는 거야?”

“어제도 너 데려다주고 혼자 했다. 잔소리 하지 마라.”

“이게 무슨 잔소리야... 걱정되니까 말해주는 거지.”

“무슨 걱정?”

“첫 번째로 나가는 선수라며? 상대 선수 실력이 좋아서 져버리면 어떡해? 마츠다 군은 그렇다 치더라도 팀원들의 기가 죽을 것 같은데... 그럼 엄청 미안하지 않을까?”

이기라고 응원해도 못할망정 저런 소리를 하다니.

대회 끝나고 보자. 너도 가벼운 엉덩이 때찌 정도는 각오해야할 거다.

수학여행 때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밤에 몰래 미유키의 방으로 가서 질펀하게 놀다가 눈치 없는 테츠야가 오면, 문을 살짝 열어놓거나 아예 닫은 채로 대화를 나누게 하고...

그러다가 깊숙이 들어간 자지에 헐떡거린 미유키가 의아해하는 테츠야에게 핑계를 늘어놓는 그림...

마음에 든다.

대부분의 NTR, BSS물에서 묘사하는 장면이라 식상하긴 하지만, 그만큼 꼴리는 시츄에이션이라서 많이 나오는 거지.

왕도를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저주하지 말고 응원 좀 해라.”

“응원은 당연히 하지. 이노오 선배한테 인사드리러 갈까?”

“그러든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을 하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미유키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미유키를 내려다보며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나는, 빠른 걸음으로 테츠야와 렌카를 향해 다가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노오 선배!”

활기찬 미유키의 목소리에 이쪽을 바라보는 렌카.

미유키에게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그녀는, 곧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다가오고 있는 날 발견하더니 인상을 구겼다.

눈빛이 앙칼지구나. 스팽킹을 당해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애니쉐어에서 날 차단하지 않았나?

쪽지를 읽은 이후로 답장이 없길래 다시 보내봤지만 전송에 실패했다고 하던데... 만약 차단이 맞다면 건방지기 짝이 없는 행동이다.

그런 말썽꾸러기에게는 회초리질이 필요해요.

아프다고, 그만 때리라고, 내게 친절히 대해달라고 앙탈을 부리도록 만들어주지.

렌카는 항상 눈에 띈다.

세련된 코디는 차치하고서라도, 엉덩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포니테일 덕에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곧바로 찾을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인파가 몰린 이 복합쇼핑몰의 서브컬쳐와 관련된 코너에 진입하자마자, 나는 곧바로 여러 상품을 구경하고 있는 렌카를 발견했다.

집중한 채로 굿즈 코너를 살펴보고 있는 렌카.

마스크를 쓰고 있어 눈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눈빛에 행복감이 가득해보인다.

오늘은 코디가... 렌카치고는 평범하네. 저번에 날 마주친 이후로 경각심이 생긴 건가?

하긴, 씹덕기질을 숨기고 싶었다면 옷차림도 신경을 써야겠지.

발목까지 덮는 검은색 워커와 딱 달라붙은 같은 색의 진이 꽤나 섹시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렌카에게 접근했다.

이후 여전히 정신없이 굿즈를 살펴보고 있는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부장.”

“허억...!”

그러자 감전이라도 된 양 몸을 부르르 떤 렌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 마츠다...?”

“예. 접니다.”

“.....”

렌카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당황스럽겠지. 다른 곳도 아닌 애니, 만화와 관련된 것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마주쳤으니까.

렌카가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그녀의 얼이 빠진 표정을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우리 은근히 잘 만나는 느낌이네요.”

그에 정신을 차린 렌카가 헛기침을 했다.

“네, 네가 여기 왜 있어...?”

“만화책 사려고 왔는데요. 부장은요?”

“난... 조카가 신작 만화 키홀더랑 미니 스탠드가 나왔대서... 혹시 구해줄 수 있냐고...”

“그때 그 조카요? 부장이 피규어 사줬던?”

“.... 응.”

“조카 사랑이 굉장하시네요. 부장을 많이 따르나보죠?”

“그, 글쎄...? 내가 이런 걸 구해다주니까 좋아하는 척만 하는 것일 수도 있지... 보통 애들이 그렇잖아.”

임기응변으로 만들어낸 조카의 설정에 나름의 디테일을 녹여놓았구나. 웃기다.

혹시라도 장사를 하고 있는 렌카의 삼촌을 도와줄 기회가 또 생긴다면, 그때 렌카를 놀릴 겸 물어볼까 싶다.

그녀에게 만화, 애니를 좋아하는 어린 조카가 있냐고 말이다.

“그렇긴 하죠. 그래서, 키홀더랑 미니 스탠드는 샀어요?”

“아직... 판매시간이 안 돼서...”

“그러면 저랑 같이 만화책 고를래요?”

“만화책...? 내가 왜...?”

“저 안 반가워요?”

“딱히...”

“우연히 만났는데 같이 돌아다니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웃는 낯으로 좋게좋게 부탁을 하자, 잠시 머뭇거린 렌카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 그러지 뭐... 할 것도 없었는데...”

“잘 생각했습니다.”

“근데 무슨 만화책을 사려고?”

“성인용이요. 야한 거.”

“아... 성인용...”

어벙한 얼굴로 수긍하는 렌카.

속으로 대소를 터뜨린 내가 물었다.

“벌레 보듯 쳐다볼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아니 뭐... 보는 게 나쁜 건 아니지... 나도 가끔씩은 보고... 막 하드한 것만 아니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야...”

“하드한 거라면 어떤?”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서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

“음... 촉수가 나오는 동인지... 이런 거는 하드한 쪽인가요?”

“.... 그, 그런 동인지도 있어...?”

수두룩한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기는.

표정관리나 좀 하고 물어보지?

“있죠.”

“그런 장르는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내 기준에선 충분히 하드하지... 일반적인 취향은 아니니까... 그래도 존중은 할 수 있을 것 같네... 강요하는 건 문제가 있을 것 같고...”

“그렇군요. 근데 가끔 야한 걸 본다고?”

“.... 친척 집에 놀러가서 심심하면.”

“친척? 그 삼촌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다른 친척...”

“혹시 친척 집에서 본 그 만화책이 재미있었나요?”

“그,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건데...?”

“재미있게 봤으면 저도 한 번 봐볼까 해서요.”

“난 몰라. 오래 전에 본데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 안 나니까 네가 알아서 골라...”

“알겠습니다. 성인용 코너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

“저쪽... 에서 본 것 같긴 해.”

기다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키는 그녀.

일부러 찾지 않으면 그 코너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구석에 있는데, 그럼에도 위치를 알고 있다는 건... 날 만나기 전에 그쪽도 한 번 확인해봤다는 뜻이다.

렌카와 함께 성인용 만화 코너로 향한 나는, 노골적인 표지들 사이에 있는 나름 얌전한 책을 하나 골라 집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농염한 여자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밑가슴을 들어 올리고 있는 표지.

그것의 제목과 그림을 확인해본 렌카가 흠칫하더니 물었다.

“너 그거 어떤 만화인 줄은 알고 사는 거야...? 제목이 조금 의미심장하지 않아?”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 이게 뭐가 의미심장한데요?”

“아니... 음... 평범한가?”

내가 고른 것은 NTR, 조교물이 섞인 만화.

이쪽 계열에선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가 그린 동인지였다.

렌카는 이 책의 내용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어서 저런 질문을 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3자가 봤을 때, 내용을 유추하기 힘든 제목인데 오지랖을 부리려 하다니.

날 속이려면 제대로 연기를 하든가... 성인용 코너의 위치를 알려준 것도 그렇고, 아까부터 계속 허술하게 굴고 있잖아.

“‘아들의 친구에게 빼앗겨 타락하는 유부녀’보다는 훨씬 얌전하지 않아요?”

“.....”

옆에 있는 책의 적나라한 제목을 읊자, 렌카의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그녀의 눈이 사방팔방으로 굴러갔다.

내 목소리를 누가 들었을까 걱정되는 것 같다.

그녀에겐 다행스럽게도, 성인용 코너는 다른 코너에 비해 상대적으로 휑했다.

이에 렌카가 안도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네... 그것보단 얌전하다...”

근데 저것도 재미있어 보인다.

아들을 테츠야로, 친구를 나로 대입하면 상당히 꼴릴 것 같은 느낌이야.

“그런데 아까부터 왜 풀이 죽어있어요?”

“내가...?”

“예. 아니에요?”

“아닌데? 네 착각이겠지. 내가...”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찾아내려 머리를 굴리던 렌카는, 저 멀리서부터 신작 만화 굿즈를 사러 온 사람들은 줄을 서라는 직원의 큼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다 골랐지? 난 지금부터 줄 서야 되니까 넌 가 봐도 돼.”

어디서 날 쫓아내려고.

넌 절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알아둬라.

“부장이랑 같이 서면 안 되나? 제가 그렇게 불편해요?”

“그건 아닌데...”

“이 책이랑 굿즈랑 한꺼번에 계산해도 상관없죠?”

“계산은 상관없지...”

“그럼 같이 줄 서요. 지금 가자. 벌써 사람들 몰리고 있네.”

나는 아무런 사심도 없는 척 렌카의 손목을 잡았고,

“어...? 야...!”

갑작스런 스킨십에 화들짝 놀란 렌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쯤, 그녀를 이끌고 굿즈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의 뒤에 섰다.

이후 손목을 놓아준 뒤 태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왜요? 불렀어요?”

“.... 아무것도 아냐.”

자신의 마스크를 고쳐 쓰고는 기다란 줄을 쳐다보는 렌카.

방금의 터치는 그냥 줄을 빨리 서기 위해 한 행동이라 판단하고는 그러려니 하며 넘어가기로 했나보다.

어쩔 땐 굉장히 쪼잔해보이는데, 또 어쩔 땐 지금처럼 쿨한 면을 보여주네.

예전이었으면 야한 만화를 본다고 편협하게 생각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어디야.

우리 렌카... 많이 발전했다.

아직 한참 멀었지만.

**

“.... 야, 마츠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