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75화 (175/313)

“왜요.”

“고마워.”

밖으로 나온 렌카의 인사.

그녀가 답지 않게 감사를 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굿즈는 각 사람 당 1개씩밖에는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카를 핑계 삼은 렌카가 내게 자신과 다른 종류의 굿즈를 사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고, 덕분에 그녀는 굿즈를 추가로 가져갈 수 있게 되었다.

이날 하루만 판매하는 물품이라 나머지는 중고로 구매할 각오까지 했을 텐데, 돈을 절약하게 돼서 고맙겠지.

물론 우리가 산 것 외에도 굿즈 종류가 더 있어서 발품을 팔긴 해야겠지만, 상대적으로 인기가 있는 종류를 전부 챙길 수 있었으니 의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뭘요. 조카한테 제 얘기 전해줘요.”

“그럴게. 그리고 내가 찾아봤는데...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 그거 있잖아. 장르가... 아, 혹시 스포일러 싫어해?”

“장르를 말해주려는 거예요?”

“응.”

“그 정도는 괜찮아요.”

“다행이네. 그 만화 장르가 조교물이래. 네토라레 쪽도 섞여있다는데?”

“그래요? 언제 찾아봤는데?”

“그... 방금 너 화장실 갔을 때.”

내 취향을 떠보고 싶어 하는구나.

네가 찾아본 것 좀 보여줄래? 한 번 확인해보게.

라는 말을 삼킨 내가 말했다.

“더 좋네요. 저 조교물 좋아해요.”

“.... 조교물을 좋아한다고?”

“예.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저번에 부장이랑 같이 호텔에 있을 때.”

“으힉...!?”

그때 일을 들먹이자 놀란 렌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그런 얘길 왜 크게 하고 난리야...!”

“크게 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어쨌든 기억 안 나요?”

“글쎄... 난 기억이 잘 안 나네...?”

지금은 당혹스러워하고만 있는데, 렌카가 조금만 더 생각을 깊게 해보면 무언가가 떠오를 거다.

애니쉐어의 MK라는 유저 말이다.

나는 결정적인 힌트를 하나 줬다.

가령 렌카가 리뷰를 남긴 애니에 단 댓글.

함께 그 애니와 관련된 피규어를 샀던 일과 댓글을 연관지어보면, 그리고 호텔에서 했었던 플레이, 오늘 조교물을 좋아한다는 약간의 단서 등을 포함하면 MK와 내가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무척 강해지겠지.

이후엔 날 캐보기 위해서 차단을 풀고 쪽지를 보내올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때 내 정체를 들키진 않을 것이다.

터뜨리기엔 타이밍이 일러.

이건 적어도 렌카가 조교를 당한다는 데에 흥미를 더 붙일 때 생각해봐야할 문제다.

“아쉽네요.”

“저, 전혀 안 아쉬운데 뭐가 아쉽다는 거야...? 기억에서 잊었어. 너랑 있었던 일은...”

“전혀 잊은 얼굴이 아닌데요.”

“.... 아무튼 오늘 고마워. 이제 가볼게.”

“밥 먹고 가지?”

“이미 먹었어.”

“그럼 데려다줄게요.”

“나 혼자 가도 괜...”

“따라와요.”

발을 빼려는 렌카의 말을 끊은 내가 손짓을 하자, 움찔한 그녀가 망설이더니 내 뒤를 따랐다.

막무가내 식으로 명령을 했음에도 순순히 따르는 이유는 아마도... 굿즈를 추가로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 고마워서겠지.

당분간은 이런 식으로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면서 말을 듣도록 하고, 천천히 추억을 쌓아가자.

그렇게 서서히 허물을 벗겨나가면 된다.

그나저나 이대로 그냥 돌아가긴 아쉬운데... 차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자고 해봐야겠다.

오늘 렌카의 모습은 상당히 귀여웠다.

얼굴이 귀엽다는 게 아니라, 행동이 그렇다는 얘기다.

구매한 굿즈가 담긴 1회용 쇼핑백을 품에 꼭 안은 채로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데, 누가 보더라도 나처럼 생각할 거다.

신호에 걸려 브레이크를 밟은 나는, 여전히 미동도 않는 렌카를 쓰윽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피곤해요?”

“.... 딱히?”

“그럼 커피 마시러 가지 않을래요?”

“커피?”

“예. 커피요.”

“난... 음...”

어쩔까 고민하던 렌카가 흘끗 내 눈치를 보더니,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 오늘 일도 있으니까 커피는 내가 살게.”

별다른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아까 혼자 가겠다고 말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의 대답은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추가구매해준 굿즈에 대한 빚을 지워버리고 싶은 건가?

뭐가 됐든 내게는 좋은 일이었기에, 나는 차를 몰고 근처 커피 체인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렌카는,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능숙하게 메뉴를 커스텀했다.

“녹차 크림 프라푸치노에 시럽은 화이트 모카로 바꿔주시고, 캐러멜 소스하고 엑스트라 파우더 추가해주세요.”

그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에 내가 잠시 벙 찐 사이, 주문을 끝낸 그녀가 날 돌아보며 물었다.

“너는?”

“음... 전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마실게요.”

“그럴래? 알았어.”

커피 값을 계산한 렌카는 진동벨을 받고, 나와 함께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보이는 표정. 다만 어색한 분위기 자체는 껄끄러워하는 듯했다.

그녀의 생각을 읽어낸 내가 물었다.

“아까 그런 식으로 자주 주문해요?”

“뭐가? 아... 응. 이 체인점에 오면 항상 그렇게 주문해.”

“스승님이랑 많이 오나보네요?”

“치나미는 여길 잘 안 와. 가자 그래도 싫어해.”

“왜요? 복숭아와 관련된 뭔가가 없어서?”

“맞아. 치나미는 복숭아 과육을 추가하길 원하는데 여긴 그게 없거든. 그래서 치나미랑 카페를 갈 땐 다른 곳으로 가는 편이지.”

역시 치나미다.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그럼 여긴 누구랑 오는데요?”

“혼자 올 때도 많고, 다른 친구랑 올 때도 있고...”

“다른 친구 누구.”

“.... 네가 모르는 사람이야.”

뭘 그런 것까지 물어보냐는 얼굴로 날 노려보는 그녀.

킥킥거린 나는 테이블에 놓아둔 진동벨이 울리자 그것을 가리켰다.

“벨 울리네요.”

“내가 가?”

그럼 주인인 내가 갈까?

고얀 지고...

“같이 갈래요?”

능글맞은 내 말투에 불안함을 느낀 건지, 렌카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진동벨을 집어 들었다.

“아냐... 내가 갖고 올게.”

이후 나더러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까끌까끌한 트레이를 들고 와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잘 마실게요.”

“응.”

“부장 거 한 입만 마셔 봐도 돼요?”

“당연히 안 돼.”

“딱 한 입만.”

“싫어. 네 거나 마셔.”

단호히 거절의 의사를 밝힌 렌카가 녹차 프라푸치노를 손에 들고 몸을 반쯤 돌렸다.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기 싫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 내게 조금은 익숙해졌으니까 저런 행동을 하는 거겠지?

새초롬해가지고... 마음에 든다.

피식한 나는 얌전히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면서, 렌카와 드문드문 짧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

다음날, 점심시간.

미유키가 교무실에 들를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테츠야와 찢어져 부실로 향했다.

오늘 할 일을 미리 조금 해놓기 위해서였다.

테츠야와 영양가 없는 시간을 보낼 바에야 이러는 게 낫지.

이러면 치나미와 꽁냥거릴 시간도 늘어날 테고.

그렇게 부실에 도착한 내가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할 때,

“마츠다?”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렌카가 미간을 구긴 채로 서있었다.

어제 사복 차림을 봐서인지, 제복을 입은 그녀가 퍽 신선하게 보인다.

보통은 반대가 되어야 정상 아닌가? 사람의 마음이란 아리송하기 짝이 없다.

뜬금없는 렌카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한 내가 물었다.

“웬일이에요?”

“너야말로 웬일이야?”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유치하게 나올래? 그럼 난 부장이야.”

“권력으로 내리누르겠다?”

“그런 거지. 어쨌든 여기서 뭐해?”

“할 거 없어서 짬 난 김에 일하려고. 부장은 왜 왔어요?”

“나? 나도 뭐... 일하려고 왔는데... 굿즈 값도 할 겸...”

음음... 은원관계가 확실하구만.

자발적인 노예의 봉사... 기특하다.

“굿즈 값은 커피로 퉁 치지 않았나?”

“그걸론 조금 모자라다고 생각해서... 네가 무슨 이상한 트집을 잡을지도 모르고...”

“어떤 이상한 트집?”

“나야 모르지...”

그냥 고마워서 도와줄 생각이라고 말하면 되지, 쓸데없는 이유를 갖다 붙이기는.

전형적인 츤데레 같은 모습에 실소를 터뜨린 내가 말했다.

“조카한테 선물은 잘 줬어요?”

“.... 그걸 어떻게 하루 만에 줘? 같이 사는 것도 아닌데.”

“그럼 언제 줄 건데?”

“주말에 주든가 해야지...”

“그럼 주말에 내려가겠네?”

“태, 택배로 보내도 되고...”

“망가지면?”

꼬치꼬치 캐묻는 내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을까?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리며 시선을 피한 렌카가 대답했다.

“키홀더는 망가질 걱정도 없고, 스탠드는 뽁뽁이 잘 둘러서... 아니 내가 왜 이런 방법까지 설명해줘야 돼...?”

“나한테도 지분 있으니까.”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근데 너 왜 자꾸...”

“평어를 섞냐고?”

“.... 잘 아네... 예의 좀 갖추지...?”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전혀 안 괜찮은데...”

“아직은 조금 껄끄럽다고?”

“누, 누가 아직이래...? 그런 말 한 적 없어...!”

왜 렌카와는 대화만 해도 재미있을까?

타격감이 찰져서 그런가? 미유키와 치나미와는 다른 즐거움을 얻는 기분이다.

계속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더 이상의 선은 넘지 말아야지.

“알았어요. 미안해요.”

“알면 됐어... 나 뭐하면 돼?”

“제가 시켜요?”

“나 혼자 왔으면 알아서 했겠는데, 네가 왔으니까 하라는 걸 해야지... 한참 서툴긴 하지만 그래도 매니저니까...”

“한참 서툴다고요? 진짜로? 스승님은 어엿한 매니저가 다 됐다면서 좋아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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