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보기엔 아직 멀었어.”
렌카도 마음속으로는 날 매니저로 인정하고 있을 거다.
그럼에도 서툴다고 한 건, 치나미와 단둘이 있을 때 난입하기 위해서 핑계거리를 삼은 거라고 보면 되겠지.
“그런가요?”
“그런 거야. 나 뭐하냐니까? 아니면 알아서 해?”
“아뇨. 저랑 죽도 닦아요.”
“너랑...?”
“예. 왜요? 이상한 짓 할까봐 불안해요?”
“그건 아니지만... 다른 일도 많은데 왜 굳이 같이 하자고...”
“같이 하는 게 더 재밌잖아요. 시간도 잘 갈 거고.”
그리 말한 나는 보관실 문을 열고, 새끼강아지를 부르듯 렌카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우물쭈물 거리던 렌카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걸음을 옮겼다.
나름 순둥해진 렌카도 나쁘진 않네. 바락바락 대들다가 순종하는 게 더 좋긴 하지만.
**
쩌억-!
상대방의 호면에서 들려오는 죽도 특유의 묵직한 충격음.
머리에 제대로 타격을 성공시킨 나는 이건 무조건 한판이라고 확신했지만, 방심하지 않은 채로 자세를 잡고 심판의 판정을 기다렸다.
“한판! 위치로!”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빨간 깃발을 드는 고로.
제대로 점수를 따내고 대련을 끝낸 나는 상대와 인사를 나눈 뒤, 물개박수를 치고 있는 치나미에게 다가가 활짝 웃었다.
“어땠어요?”
“멋졌어요. 기세도 좋고, 자세도 완벽까진 아니지만 훌륭했답니다. 이 정도면 선봉으로서 아주 좋은 자질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절대 방심해서는 안 돼요. 대회는 실력이 무척 뛰어난 사람들이 즐비하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자, 이제 앉아보세요. 호면을 풀어드릴게요.”
치나미의 앞에 무릎을 굽히며 앉자, 그녀가 꼼꼼한 손길로 호면 끈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 나는 정신 사납게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자 치나미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날 노려보더니,
콩-!
호면을 아주 가볍게 때렸다.
“가만히 좀 계세요...! 뭐하시는 건가요?”
“제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스승님이라니... 조금 슬퍼지려고 하네요.”
“어허...! 손찌검이라고 생각하시면 서운하지요. 이건 애정이 담겨있는 훈육이에요.”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근데 스승님.”
“말씀하세요.”
“내일 마사지해줄까요?”
“느엣...?”
끈을 풀다 말고 손을 멈칫한 치나미의 입에서 새어나온 탄성.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녀가 아주아주 작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사지요...? 오일 마사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예.”
“흠흠... 잘 모르겠네요... 갑작스러운 제안이라서 당황스럽군요...”
“그래요?”
“미리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흠... 오늘 집으로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본 후에 답변을 드리도록 할게요...”
“알겠습니다.”
“네에...”
몸을 배배 꼬는 치나미의 얼굴이 곧 터질 것처럼 급속도로 빨개졌다.
마사지 외에 뭘 한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밝히기는.
“이제 끈 풀어주셔야죠?”
“앗... 네...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면 혼낼 거예요...”
“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네... 알아요...”
횡설수설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풍겨 나오는 쑥스러운 감정.
반응을 보아하니 긍정적인 대답이 들려올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들박... 한 번 시도해볼 수 있으려나?
시도만 해보는 건 괜찮잖아. 그치? 치나미?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
치나미의 연락을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던 나는, 휴대폰이 울리자마자 화면을 바라보았다.
[후배님의 제안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거절을 해야겠어요.]
안타까운 답변이다.
예상하고 있던 답이기도 했다.
[얌전히 마사지만 하겠습니다.]
[앗, 그러면 다시 생각해보고 내일 말씀드릴게요.]
금세 태도가 바뀐 그녀
저런 대답을 한다는 건 내가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들이댔을 때, 치나미도 섹스를 상정하고 있었다는 뜻.
역시 우리 치나미는 변태가 맞다.
방금 거절은 미유키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겠지.
문자에서 느껴지는 깜찍함과 변태스러움 한 스푼에 입꼬리를 올린 내가 답장을 보냈다.
[그렇게 해요.]
[네. 안녕히 주무세요.]
톡을 이어나갈 수도 있겠지만, 이 늦은 시간에 구태여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더욱이 내일 치나미와 중요한 일도 있는 만큼, 푹 쉬게 해주자.
대화를 끝낸 나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살펴보았다.
하트 눈 모모님 그대로인데... 렌카는 저걸 봤을까?
오늘까지의 반응을 보면 아직 모르는 것 같긴 하다.
나는 이번엔 렌카에게 톡을 보내보았다.
[자요?]
휴대폰은 한참을 기다려도 조용했다.
렌카가 내 톡을 그냥 씹은 건지, 아니면 자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안 자.]
츤데레 같은 기질이 물씬 풍기는 답장이 도착했다.
[왜요?]
[그냥.]
[뭐하고 있어요?]
[누워있어. 용건이 뭐야?]
[용건 없으면 연락하지 마요?]
[지금 늦었잖아.]
[그래서 연락하지 말라고요?]
[그런 말 한 적 없어.]
반응이 미적지근한데도 왜 재미있을까.
좋아서 그런가? 하루 종일 문자만 나눠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렌카도 나처럼 생각할 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근시일 내로는 무리겠지?
[뭐해요?]
[누워있다고 했잖아.]
[누워서 뭐하냐고요.]
[대화하잖아.]
[그 전엔 뭐했는데요?]
[휴대폰.]
[휴대폰을 하고 있었다면 제 톡을 봤을 텐데, 답이 늦었네요.]
렌카가 찔끔했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다시 조용해진 휴대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변명이 섞인 답이 도착했다.
[영상 보고 있느라 그랬어.]
[알았어요. 봐줄게요.]
[내가 왜 너한테 이유를 설명해야하는지 이해가 안 가네. 네 톡을 보면 꼬박꼬박 제때 답장해야 돼?]
자기변호는 다 해놓고선 자존심 세우기는.
귀여워가지고.
[그래주면 좋죠.]
[싫어.]
[감사합니다.]
[싫다고 했는데 왜 고맙다고 하는 거야?]
[근데 부장, 대회에서 이기면 뭐해줄 거예요?]
[말 돌리지 마.]
[소원 들어준다고요? 알았어요.]
[너랑은 대화 자체가 안 되는 것 같네.]
[잘 자요.]
저 인사를 끝으로, 렌카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자꾸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지는 마음을 뒤로하며 애니쉐어에 접속한 나는 쪽지함을 확인했다.
광고 쪽지 몇 개 외엔 없다. 아직 렌카가 차단을 안 풀었나보구나.
그러려니 한 나는 내일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다.
**
“마츠다 군, 1교시에 시험 있는 거 알지?”
다음날 오전, 교실.
책상 아래에서 책을 꺼내 펼친 나는, 미유키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자 미간을 구겼다.
“시험? 뭔 시험?”
“수학 쪽지시험 있다고 말했잖아. 기억 안 나?”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기말고사 대비 테스트를 본다고 했던 것도 같다.
당시 수업 중간에 미유키와 장난을 치다 흘려들었었고, 미유키 또한 말을 하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는데... 지금 보는 모양이다.
“수행평가에 반영되는 건가?”
“그건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대체 왜 보는 거야?
교사가 참 열정적이다. 아니면 수업하기 귀찮아서 시험으로 퉁치는 건가?
“어렵게는 안 내신다고 하셨으니까... 스무 문제 중에서 열다섯 문제 이상은 맞아야겠지?”
내가 수학에 약하다는 건 나는 물론 미유키도 알고, 빵녀와 부반장도, 버러지 테츠야도, 심지어는 반 애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열다섯 문제를 맞히라고?
황당한 표정으로 미유키를 쳐다본 내가 물었다.
“그럼 75점인데... 기대치가 너무 높은 거 아니냐?”
“지금의 마츠다 군이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부응해야지.
안 돌아가는 머리, 잘 굴려서 기승위를 따내야겠다.
“알았다.”
“테츠야 군도 75점이 커트라인이야. 알겠지?”
상체를 수그린 채 테츠야를 바라보며 기대를 거는 미유키.
그러자 그림을 끄적이고 있던 놈이 어깨를 움찔 떨더니 무안한 듯 쪼갰다.
“그, 그럴게...”
“왜? 자신 없어?”
“자신은 없지... 나도 마츠다처럼 수학에 약한데...”
“힘내.”
예전의 미유키였다면, 테츠야에게 모르는 공식이나 문제를 말해보라고, 시험 시작 전까지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다. 그녀는 테츠야에겐 간단한 격려만을 하고, 내 허리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며 필기노트를 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테츠야는 미유키의 이런 행동을 봤을까?
보고 저번에 내게 뺨을 맞기 전처럼 열등감을 폭발시켜줘서, 미유키의 소꿉친구라는 질긴 인연의 끈을 제 손으로 끊어냈으면 좋겠다.
물론 내가 끊는 것도 좋지만 말이다.
나는 미유키의 성화에 못 이긴 척 노트를 펴고 열심히 벼락치기를 했고, 교사가 들어온 이후 시작된 쪽지시험에서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1교시가 끝나고 정답을 확인해본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점수가 기대치에 한참 못 미쳤기 때문이었다.
‘뭔...’
분명히 아는 문제여서 풀 땐 머리가 잘 돌아갔는데... 왜 이런 점수가 결과로 나왔을까?
인간의 머리는 참 신비롭다.
그나저나 이대로면 기말고사가 걱정스럽다. 틈틈이 공부를 해놔야겠어.
“마츠다 군, 몇 점이야?”
어느새 채점을 끝낸 미유키가 웃는 낯으로 점수를 물어보았다.
그에 어색한 미소를 지은 내가 솔직히 대답했다.
“40점.”
“.... 40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