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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다 군, 뭐해?”
귓가에서 들려오는, 황당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던 내가 눈을 뜨자, 열린 창문 틈새로 들어오는 빛과 함께 미유키의 신형이 보였다.
“.... 왔냐?”
“응. 근데 뭐하냐구.”
“뭐하긴... 자고 있었잖아.”
“왜 이러고 자고 있는데...?”
“따뜻하니까.”
“이 바보야...!”
그리 말한 미유키가 내 다리 부근을 가리고 있던 코타츠 이불을 걷어냈다.
그와 동시에 훅 들어오는 찬바람.
미간을 마구 찌푸린 내가 말했다.
“뭐하냐 지금...? 빨리 다시 덮어라.”
경고를 가볍게 무시한 미유키가 벌겋게 변해있는 내 다리를 만져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온도를 최고로 해놓으면 어떡해...! 화상 입을 수도 있는데...! 다리 뜨거운 거 봐... 하아... 미치겠네...”
“조금 뜨겁긴 하네.”
“그런 태평한 소리가 나와?”
“편한데 어떡하냐? 불안했으면 애초에 이걸 사질 말았어야지.”
“그건 무슨 억지야 대체? 말을 못하겠네...”
헛웃음을 치며 주저앉은 미유키가 내 다리를 조심조심 주물러주기 시작했다.
정성이 담겨있는 손길과 미유키 특유의 따스한 체온 덕분인지, 다시 졸음이 쏟아지려고 한다.
오늘은 이대로 쭉 누워있고 싶다. 미유키와 함께.
“그 안에서 자고 싶으면 온도조절은 꼭 해. 알았어?”
이어지는 미유키의 말에 대충 고개를 주억거린 내가 대답했다.
“어.”
“진짜 손 많이 간다... 피부 그을린 거 봐... 지켜보다가 안 가라앉으면 병원 가야겠어.”
오늘따라 엄마 모드로 들어갔구나.
갑자기 미도리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농염한 미시의 손길을 느끼고 싶어.
물론 미유키의 손이 별로라는 건 아니고, 말이 그렇다는 거다.
“좀만 더 아래...”
철없이 구는 내게 어이가 없었을까?
미유키의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졌다.
말없이 오랜 시간동안 내 다리를 만지작거리며 풀어준 그녀가 물었다.
“마츠다 군, 방학 계획은 짰어? 알바 같은 거 해?”
“안 하지.”
“그럼 공부하자. 저번 방학 때처럼 과외 해줄게. 테츠야 군이랑 같이.”
어떻게 수학 쪽지시험 점수를 확인했을 때 예상했던 게 딱 들어맞을 수가 있냐.
방학 전에 하지 않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저나 알바와 방학 하니까 생각난 건데, 슬슬 렌카의 지갑사정이 안 좋아질 때가 됐다.
피규어를 시도 때도 없이 구매하는데다, 치나미를 비롯한 친구들과 먹거리에 돈을 쓰다 보니 자금에 한계가 찾아오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원래라면 렌카는 방학 때 알바를 시작하게 되지만... 시간축이 어그러진 지금 상황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 시간대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에 다니는 학생 신분에, 하고 싶은 것도 많은 그녀가 학기 도중 일을 하려고 하진 않을 테니까.
방학이 오기 전까지는 테츠야만 조심하자. 혹시라도 놈이 이벤트를 선점해버리면 곤란하니까.
알바 중간중간에 발생하는 돌발 이벤트는 렌카 공략의 꽃.
벌써부터 기대된다. 발기도 되고.
모든 이벤트를 챙기려면 나도 단기알바 형식으로 렌카가 일하는 곳에 들어가야 하나?
이건 그때 상황을 봐서 결정해야겠다.
“일주일 내내 하는 거면 거절할게.”
“그 정도로 열심히는 안 시킬 거야. 배운 것들만 다시 생각날 정도로 할게.”
“차라리 기말고사 전까지 알려주는 건 어때?”
“물론 그렇게도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로?”
“응. 저번 중간고사가 14등이었으니까... 이번엔 10등 이내에 드는 걸 목표로 삼아보자. 힘들지는 몰라도 노력은 해봐.”
14등과 10등.
차이는 고작 4지만, 10등 이내 등수는 수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한자리수 등수를 가진 학생들의 저력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수학도 다 까먹고 40점을 맞는 판국인데, 주인공 버프를 받았다 치더라도 회의적이라고 본다.
“노력이면 돼?”
“응. 최선을 다한 노력이면 만족해.”
저건 날 무시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였다.
10등 안쪽은 공부를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해온 학생들이 포진해있는 등수 범위이니만큼 진짜로 어려울 것 같아서 저렇게 말을 하는 거다.
나 또한 딱히 반박할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승부욕이 생기기는 했다.
이걸로 큰 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가령 쓰리섬을 한 번 더 제안한다거나 같은...
어쨌거나 도전한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건 전혀 아니니까, 해봐야겠다.
메인 퀘스트 동선에 서브 퀘스트가 끼어있는데, 이걸 참으면 문제가 있는 거지.
서브 퀘스트 난이도가 무지막지하다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언제부터 시작할 건데?”
“음... 크리스마스 지나고...? 마츠다 군만 좋으면 그쯤 할까 생각 중이야.”
약간 작아진 미유키의 톤.
크리스마스를 언급하니 치나미와의 쓰리섬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게 생각난 것 같다.
지금쯤 잘 되고 있는지 아닌지 궁금하겠지?
아니, 눈치 빠른 미유키는 이미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
치나미와 내 사이가 더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미우라는?”
“테츠야 군은 좋다고 했어.”
자존심도 없는 놈답게, 냅다 알겠다고 지껄였구나.
어떻게든 예쁜 여자들 옆에 붙어있으려는 변태 같은 새끼.
어차피 상처를 받는 건 너 하나뿐일 텐데, 계속 그렇게 해봐라.
영화를 보고 잠깐 백화점을 둘러보던 미유키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
한 의류매장 앞에 놓인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옷을 본 직후에 일이었다.
“마츠다 군, 저거 입어봐. 어울릴 것 같아.”
구멍이 숭숭 뚫린 망사 상의, 심지어 남자 옷이다.
대체 누가 저런 의상을 사길래 마네킹에까지 입혀놓은 걸까?
여성 호르몬이 넘쳐나는 남자도 저건 안 입겠다.
콧방귀를 낀 나는 미유키의 어깨를 감싸고 내 쪽으로 끌어왔다.
그리고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도 입으면.”
“남자 옷이잖아. 나는 못 입어.”
“여자 것도 팔겠지.”
“입었으면 좋겠어?”
“어. 전신으로. 속옷 다 빼고.”
“전신...?”
말은 이렇게 했지만, 미유키처럼 청초한 외모를 지닌 여자에게 전신망사는 안 어울린다.
그건 렌카에게 딱 맞는 의상이야.
치욕적인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날 노려보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흥분된다.
“농담이다. 가기나 하자. 늦겠다.”
“응.”
어깨 아래로 내려온 내 손을 꼬옥 잡는 미유키.
누가 봐도 사이좋은 커플처럼 딱 달라붙은 채로 주차장까지 내려간 우린, 차에 타고 미유키의 집으로 향했다.
영화를 보기 전, 미도리가 미유키에게 연락을 하여 밥을 먹자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미유키의 집에 도착한 나는, 그녀가 먼저 현관문을 여는 사이 주차를 마쳤다.
이후 우리 집보다 더 정겹게 느껴지는 미유키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 마츠다 군.”
현관 앞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로 날 맞이하는 미도리가 보인다.
저 온화한 목소리... 너무 좋다.
쌀 때도 옳지, 옳지 하며 보듬어줄 것 같아.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좌우로 툭 튀어나온 골반도 돋보인다.
미유키와 카나는 분명히 자연분만이었겠지?
순산했을 거야.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잘 지내셨죠?”
“물론이야. 추우니까 얼른 들어와. 밥 다 됐으니까 바로 앉으면 돼.”
“예. 실례하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날 향해 한손을 들어올리는 와타루를 발견했다.
자주 온다고 이젠 일어나지도 않는구만.
와타루에게도 공손히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자, 2층 계단에서부터 카나가 눈을 부비적거리며 내려왔다.
“마츠다 군이네...? 왜 왔어?”
“밥 먹으려고요.”
“그래...?”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거예요?”
“응...”
외간남자가 왔는데 세수는 좀 하고 내려와라.
게을러 터져가지고... 내가 키워주고 싶다.
흐느적흐느적 내려와선 미유키의 옆자리에 앉은 카나가 입가를 가리며 하품을 했다.
젓가락을 들고 밥그릇을 깨작거리던 그녀는, 미도리가 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자 찔끔하더니 얌전해졌다.
얼굴은 미유키랑 닮았는데 하는 행동은 차이가 크네.
속으로 킥킥거린 나는 자리에 앉은 와타루가 간단한 덕담을 건네자 감사인사를 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
“야채 많이 먹어.”
조신하게 젓가락질을 하던 미유키의 말.
목소리에 쑥스러움이 묻어나와 있다.
아무리 가족들이 우리 사이를 안다고는 해도, 면전에서 날 챙기기는 조금 낯간지러운 모양이다.
그런 미유키에게 방긋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그녀의 말대로 야채를 하나 집었다.
그러자 미도리의 입꼬리가 쓰윽 하고 올라갔다.
와타루의 경우엔 정신없이 반찬을 집어먹고 있고... 카나는 별꼴이라는 듯 눈을 흘기고 있다.
미유키에게 전신망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카나에겐 한 번 입혀보고 싶다.
눈매가 미유키보다 사나워서 왠지 잘 맞을 듯한 느낌.
게다가 밤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들이댈 것 같다.
그나저나 평화롭고 평범한 집안이다.
요새 신나게 달려왔었는데, 오늘은 푹 쉬면서 이 분위기를 즐기자.
중간에 음습한 망상도 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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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끝내고 소화를 시킬 겸 미유키의 집에 있는 작은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야.]
렌카의 톡이 와있다.
심심하던 찰나에 온 연락이라서 반갑긴 하지만... 주인님에게 싹퉁머리 없이 야가 뭐니.
혼나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코웃음을 친 나는 답장을 보냈다.
[뭐.]
[뭐?]
[아, 부장이었군요. 친구가 보낸 줄 알았습니다.]
[보낸 사람에 내 이름 뜨잖아. 너 일부러 그랬지?]
[아닐 걸요?]
[아니면 아니지, 아닐 걸요는 뭔데?]
[그럴 수도 있죠.]
[말장난하자는 거야?]
[아뇨. 왜 연락했어요?]
[할 수도 있지.]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렌카.
제법이긴 하지만 주제넘게 도발을 한 대가로 야외노출을 시켜줘야겠다.
[그렇긴 하죠. 뭐해요?]
[방금 집에 왔어.]
[잘했네요. 길은 안 잃어버렸어요?]
[뭐라는 거야? 내가 왜 길을 잃어버려?]
이해하지 못한 건가? 렌카에겐 너무 어려운 농담이었나?
아니면 이해는 했는데 받아주기 싫어서 저러는 건가?
뭐가 됐든 재미있다.
[아닙니다. 그래서 왜 연락했냐고요.]
[네가 저번에 샀던 만화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치나미와 어제 뭘 했냐고 물어볼 줄 알았는데 만화 얘기를 꺼내고 있다.
신경이 쓰이긴 하지만 참견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기특하다.
근데 으레 하는 오지랖이 없어서 왠지 허전하게도 느껴진다.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
[어. 그거.]
[그게 왜요?]
[봤어?]
[아직 안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