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바빠서요.]
[그러니까 왜 바빴는데?]
참견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돌려서 날 캐내려 하는 거였나?
봤다고 대답했으면 다른 주제의 질문으로 어제 일을 물으려 했을까?
아니다. 급진적인 생각은 자제하자.
순수하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본 것일 수도 있잖아.
그럴 가능성은 아주 낮지만.
[바빴으니까요.]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하네. 머리에 문제 있어?]
[주인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못씁니다.]
[누가 내 주인이야? 죽을래ㅐ?]
답장이 무척 빨리 왔고, 오타까지 섞여있다.
렌카의 감정이 격앙되었다는 증거.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그녀를 상상해보니 꼴린다.
[자꾸 예의 없게 굴면 곤란해요. 제가 저번에 뭐라고 했죠?]
[뭘 뭐라고 해?]
[공손하게 말하라고 했잖아요. 기억 안 나요?]
[안 나.]
[서운하게 구시네요. 그런데 만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가 왜 궁금했어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떴음에도 오지 않는 답장.
이는 즉 렌카가 핑계거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었구나. 감히 주인님을 떠보려 하다니...
기특하다고 생각했던 건 취소다. 불여우 같은 것.
[다 봤으면 빌려달라고 하려 했어.]
생각해낸 변명이 고작 대여라니.
우리 렌카는 거짓말을 잘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성인물을요?]
[가끔 심심할 땐 본다고 했잖아.]
[월요일 날 갖고 갈게요.]
[안 봤다며.]
[오늘부터 보려고 했어요. 어차피 1권짜리니까 금방 봐요.]
[그래? 알았어. 수고해.]
[부장도 수고해요.]
대화를 끝낸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후 렌카를 어떻게 능욕할지 고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마츠... 흐흠. 마츠다 군.”
뒤에서부터 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유키를 흉내내려 하다가 재빨리 자신 고유의 음색으로 바꿔버리는데, 저번에 날 놀리려 했다가 허리를 잡힌 일이 생각난 듯했다.
“예, 누나.”
“미유키랑은 잘 지내고 있어?”
시답잖은 질문을 하는 걸 보니까 딱히 할 말이 없나보구나.
집 안에 있으려니 익숙한 사람들만 있어서 재미가 없으니까, 간만에 온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나보지?
“그럼요.”
“괜한 걸 물어봤네. 잘 지내고 있으니까 여기 온 걸 텐데. 그치?”
“물어볼 수도 있죠. 미유키랑은 얘기 끝났어요?”
“끝났어. 너 데리고 와달래. 자기는 공부 준비한다고.”
“그래요? 감사합니다.”
“근데 무슨 공부야? 궁금하다.”
뒷짐을 진 채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카나.
방글방글한 얼굴을 보니, 동생의 방에서 그렇고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공부가 공부죠. 궁금하면 같이 할래요?”
“으응...? 나, 난 그럴 생각은 전혀 없는데...?”
반응이 의외로 격하다. 마치 제 스스로 찔끔한 사람처럼.
오해를 할 만하게 말하긴 했지만 저런다는 건 야한 생각을 했다는 방증이었다.
카나도 미유키만큼이나 성적 호기심이 충만하구나.
피는 못 속인다던데, 그러면 미도리도 마찬가지일 테지?
아리따운 모녀 셋과의 4P... 상상만 했는데도 뇌가 쾌락으로 타버릴 것 같다.
하반신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전신으로 퍼지는 못된 유혹을 억누르고 마음속 깊숙한 곳에 담아둔 내가 말했다.
“알았어요. 이만 올라가볼게요.”
“그래... 과일 먹을래?”
“가져다주시게요?”
“아니. 부엌에 담아둔 거 있으니까 가져가라고 말한 거야. 나 이만 간다? 안녕.”
한손을 빠르게 흔든 카나가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의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걸음걸이가 시원시원한데, 미유키보다 더 발랄할 것 같은 느낌이다.
**
“부장!”
큼지막한 부름에 흠칫한 렌카의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못 들은 척 멀어지려 해보지만, 뛰어서 다가가는 날 따돌리기는 불가능한 노릇.
“부장! 왜 무시해요?”
결국 그녀는 지척까지 온 나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좀 해...! 사람들 듣잖아...!”
“들으면 뭐 어때서 그래요? 내가 불편해?”
“그런 말이 아니라... 예의는 지켜야지...”
“여기 운동장인데?”
“운동장이라도... 공공장소잖아...”
“사람들도 멀찍이 떨어져있고.”
“.... 됐어. 왜 불렀는데?”
“이거 주려고요.”
이를 드려내며 웃은 내가 종이로 된 쇼핑백을 내밀었다.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유추했는지, 렌카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이거... 그거야?”
“예.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
“야...! 조용히 해...!”
다급하게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대는 렌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는 모습이 웃기다.
“이거 진짜 재밌더라고요. 단순히 야한 것뿐만이 아니라, 스토리가 너무 좋아요.”
“그, 그래...?”
어색한 미소를 지은 렌카가 쇼핑백을 슬쩍 열어보더니, 내게 볼멘소리를 냈다.
“이걸 왜 지금 주고 난리야... 어떻게 가져가라고...”
“쇼핑백에 담겨있는데 뭐 어때서요? 라커에 넣어놓으면 되지.”
“.... 들키면 벌점인데...”
“그냥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하세요.”
“그건 또 무슨...! 하아... 아니다, 됐어.”
“읽고 꼭 감상 말해줘요.”
“감상을 말하라고...? 내가 왜...?”
“같이 이야기할 사람 있으면 좋잖아요. 근데 스승님은 어디 가고 혼자 있어?”
“매점에 복숭아 빵 새로 나왔대서 사러 갔어.”
복숭아 빵이라... 두렵다.
왠지 오늘 부활동 시간에 먹어보라고 할 것 같은 기분이야.
“알겠습니다. 그럼 가볼게요.”
“빨리 가버려...”
“고맙다고는 안 해요?”
“뭐?”
“빌려달라고 해서 빌려줬잖아요. 그럼 뭐라고 말해야 돼요?”
“.... 고, 고마워...”
반쯤 억지로 듣는 감사인사... 나쁘지 않다.
렌카에게 천천히 보고 돌려달라는 말을 한 나는 매점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업시간까지 얼마 안 남긴 했지만, 치나미의 뺨을 만질 시간은 있지.
추위 때문에 불그스름하게 변한 그녀의 볼살을 누르면서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
[남편의 하찮은 아기씨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전자...! 제 안에 가득 넣어주세요...!]
얼굴이 완전히 녹아내린 여자주인공이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자신의 위에 올라탄 남자에게 사정을 하고 있다.
경찰복 코스프레를 입고 침대에 수갑으로 결박되어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외설적이다.
대사까지 저렴하기 짝이 없다.
“하... 진짜 미치겠네.”
마츠다는 눈이 약간 삔 게 틀림없다.
이게 뭐가 스토리가 좋다는 말인가.
그저 즐거운 시간을 위한, 자극적인 그림만 죄다 때려 넣은 만화인데.
소위 말하는 뽕빨물. 이 만화는 그런 종류의 장르였다.
물론 이 작가의 스타일을 알고 있긴 했고, 초창기 작품도 몇 번 봤지만 이번 건 너무... 노골적이었다.
그래도 그림을 정말 잘 그리는데다 얼굴 표현력이 뛰어난 건 장점이긴 하다.
묵묵히 아사가오 씨의 다양한 표정변화와 몸매를 감상하며 분석을 하던 렌카는 책을 덮었다.
음란한 목적이 있지 않은 이상, 더 볼 필요는 없었다.
마츠다가 이걸 빌려줄 때 굉장히 상기된 표정을 짓던데...
설마 이 책으로 그 행위를 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마츠다가 자신의 물건을 주무른 책을 만지고 있는 셈이 되는 건가?
“히익...!”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렌카가 기겁을 하며 침대 위로 책을 던져버렸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선 책이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확인해보았다.
깨끗하다. 구겨진 부분도 없다.
다행이었다. 갑자기 발광을 한 자신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황금 같은 휴식시간에 혼자 뭔 짓을 하는 건지...
자괴감이 밀려온 렌카는 책을 베개 옆에 놓아두고,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 다 읽어야하나...?’
마츠다가 감상을 말하라고 하긴 했는데... 그때 명확하게 거절하지 않았었다.
만약 마츠다가 이걸로 딴지를 걸면 어떡하지?
너무 과대망상인 듯하나, 그라면 가능할 것도 같다.
초반부와 중반부, 그리고 후반부의 중요한 장면 중 하나만 기억해두면 되겠지.
어디가 좋았냐고 물어보면 이걸 들먹이면서 대충 둘러대야겠다.
그리 생각한 렌카가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어휴...’
초반부부터 튀어나오는 조교 신이 참... 낯부끄럽다.
사람들이 왜 이런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속으로 투덜투덜 불만을 터뜨린 렌카의 눈이 느릿하게 책을 훑었다.
“.....”
그저 쾌락만을 추구하기 위한 동인지라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까 일상대화 같은 것에서 재미 포인트가 있긴 하구나.
여자주인공이 왜 남편에게 싫증이 나고, 어떻게 점점 외간남자에게 빠져 들어가는지 보이는 듯하다.
원래 이런 장르에선 여자 주인공이 네토리남을 만나고 그의 거근에 빠지거나 하며 시작을 하는 게 왕도인데, 그것을 타파하려는 시도가 신선했다.
첫 감상의 비관적인 평가를 일부 수정한 렌카는, 치나미가 준 복숭아 젤리를 입으로 가져가며 만화를 읽어 내려갔다.
우우웅-!
그러는 와중 울리는 휴대폰 진동.
뭔가 싶어 확인해보니, 관광지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는 큰삼촌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읽고 있던 책 사이에 자신이 직접 산 캐릭터 책갈피를 끼워 넣고 덮은 렌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큰삼촌.”
-렌카, 잘 지내냐?
“나야 뭐... 항상 똑같지. 큰삼촌이랑 작은삼촌은 어때?”
-우리도 똑같다. 그런데... 너희 이제 곧 겨울방학이지?
“응. 기말고사 끝나면.”
-그럼 켄이랑 한 번 내려올래? 혹시 공짜로 관광하면서 알바비까지 두둑하게 타갈 생각은 없냐고 물어봐라.
그 말에 렌카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안 돼.”
-왜?
왜냐니,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삼촌들을 도와준 마츠다가 콧대를 세우며 생색내는 꼴을 보라고?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만큼 자신은 가만히 있어야할 텐데...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그리고 켄은 무슨 켄이란 말인가.
딱 한 번 본 게 전부면서 이름으로 부르다니... 삼촌들도 참 웃긴다.
원래 정이 많은 사람들도 아니잖은가.
마츠다의 가식... 이라기엔 뭣하고, 붙임성이 좋은 모습에 홀라당 넘어가버린 삼촌들이 안쓰럽다.
기다란 자신의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배배 꼰 렌카가 대답했다.
“왜냐니... 그건 실례잖아. 삼촌들은 먼 거리에서 장사하고 있고... 차로 한 시간 거리인데...”
-아니, 물어만 보는 것도 실례냐? 강요하는 거 아닌데?
“삼촌들은 무섭게 생겼잖아. 마츠다가 상상하면서 무서워할 거야.”
-켄이? 우리를?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큰삼촌.
마츠다가 저번에 음식점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되새긴 렌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삼촌들을 무서워할 사람은 아니지.
“아무튼 곤란해...”
-직접 전해주기 껄끄러운 거면 전화번호라도 줘봐라. 우리가 물어보게.
“싫어.”
-왜 싫은데?
“그냥.”
-뭐? 너 술 마셨냐?
“아 뭔 술이야...! 나 지금 바쁘니까 끊어줄래?”
-그러냐? 요즘 장사가 잘 안 되는데... 곤란하군.
치사하게 금전적인 면을 들먹이다니...
이러면 마음이 약해지잖은가.
“많이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