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는 아니고, 조금.
“힘든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밝은데... 혹시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허, 설마 우리가 널 속일까?
“나 어렸을 땐 많이 속였잖아. 맨날 내 동정심을 유발하면서 심부름시키고...”
-예전엔 그랬긴 했지. 어쨌든 전화번호 안 줄거면 대신 물어봐줘라. 이만 끊는다.
“뭐? 안 된다고 했...”
뚝.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큰삼촌.
그에 속이 확 끓어오른 렌카가 중얼거렸다.
“하... 어이없어...”
막무가내로 저러는 모습이 마치 마츠다 같다.
그래서 세 사람이 잘 맞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이 씨...!”
머리를 벅벅 긁은 렌카가 침대에 다시 상체를 뉘였다.
이건 내일 생각하자. 오늘은 평온하게 만화를 보고 싶다.
**
“그건 왜? 버리려고?”
속이 망가진 호구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창고로 가던 나는, 부실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3학년 선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수리 보낼 겁니다.”
“왜? 멀쩡해 보이는데.”
“오래 되기도 했고, 안쪽이 망가져서 잘못 움직이면 다칠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 수리하는 김에 같이 보내려고요.”
“그러냐?”
“예. 장비 막 쓰지 마십쇼.”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다른 애들한테 말해.”
“선배는 단체전 대장으로 나가지 않아요? 리더면 리더답게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끌어안을 줄도 알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버리는 대장 모르냐?”
버리는 대장이란, 강한 선수를 앞에 배치해서 3점을 선취하고 대장까지 차례가 오기 전에 시합을 미리 끝내놓는 전술을 말함이었다.
검도의 단체전에선 팀 내에서 가장 믿음직한 선수를 대장으로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드물게 이 대장을 버리는 전술을 사용할 때도 있다.
상대팀과 우리 팀의 실력차가 클 때 허를 찌르는 용도로 가끔 쓰긴 하는데, 이러는 팀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저 선배도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고, 그저 내게 농담을 던진 것뿐이었다.
“그냥 지금 버려드릴게요.”
“꺼져 새꺄.”
웃는 낯으로 손을 휘젓는 선배.
그와 낄낄거리며 농담을 주고받은 나는, 창고에 도착해 수리를 보낼 호구를 정리했다.
이후 비품대장을 작성하고 있을 때,
“후배님, 후배님.”
인기척도 내지 않고 들어온 치나미가 내 등 뒤를 콕콕 찔렀다.
“예, 스승님.”
“늦어서 죄송해요. 렌카가 절 놓아주지 않아서요.”
“괜찮아요. 근데 놓아주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에요. 일을 해야 한다니까 후배님 혼자 괜찮다면서, 저와 함께 다른 후배님을 지도하자고 하셨어요.”
주인의 눈이 없는 사이를 틈타 선동을 했단 말이야?
아주 못돼먹은 노예로군.
“그런 일이 있었어요? 잘 빠져나왔네요.”
“후배님에게 홀로 일을 시킬 수는 없지요. 그런데... 후배님은 여전히 악필이시군요.”
비품대장을 곁눈질한 치나미의 말.
펜으로 옆머리를 긁적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노력은 하고 있는데, 쉽게 고쳐지지는 않네요.”
“괜찮아요. 서서히 후배님의 필체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우리 치나미는 어쩜 말하는 것도 이렇게 착한지...
저럴수록 자꾸 만지고 싶어지잖아.
“먓...!? 흐해닝!”
갑작스럽게 볼살을 꾸욱 눌린 치나미가 붕어처럼 된 자신의 입술을 움직였다.
양팔을 버둥거리며 날 밀어내려고 해보지만, 리치 차이가 워낙 커서 몸에 전혀 닿지 않는다.
결국 반항을 포기한 그녀는, 내 손길에 순응하며 얌전히 섰다.
그런 치나미의 말랑말랑한 뺨을 손바닥으로 누른 채 이리저리 움직인 내가 물었다.
“잠깐 이렇게 있을까요?”
“.... 마흠해로 하헤요.”
“마음대로 해요?”
“녜...”
가슴이 아프다.
치나미가 너무 귀여워서 아파.
애가 타는 마음을 달랜 나는, 복숭아를 먹었는지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토옥.
“흐믐!?”
돌발적인 행동에 눈을 부릅뜨는 그녀.
마음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설마 이런 행동을 할 줄은 예상치 못했나보다.
순식간에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분홍빛으로 물드는 치나미의 얼굴을 감상하던 나는, 어버버 거리고 있는 그녀의 뺨을 놓아주고 다시 비품대장을 작성했다.
치나미와의 관계도 비약적으로 발전했겠다, 이제 슬슬 안 돌아가는 머리를 쥐어짜낼 때가 왔다고 본다.
어떻게 하면 치나미를 자연스럽게 쓰리섬으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는 하루다.
**
“마츠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날 부르는 렌카.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그러나 그 안에 약간의 쑥스러움이 있는 그 말투에 히죽거린 내가 대답했다.
“왜요.”
“이거 가져가. 잘 읽었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검은 비닐에 싸인 책을 건네는데, 마약이라도 거래하는 상황 같다.
그것을 받아든 내가 물었다.
“재미있었죠?”
“그냥 뭐... 그럭저럭.”
“그게 끝이에요?”
“초반부에서 아사가오가 남편과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뛰쳐나왔잖아? 이후에 화해를 하기로 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기 위해 마트에 갔다가....”
렌카가 기다렸다는 듯 감상을 읊었다.
나름 상세하게 스토리를 풀어나가며 어디가 좋았고, 어디가 아쉬웠는지 쉴 틈 없이 말하는데, 내가 트집을 잡을까 우려해서 준비한 게 틀림없다.
속 보이는 짓을 하고 있구나.
자발적인 복종을 하는 기색이 조금 보이긴 하니까, 아까 치나미를 유혹하려 했던 건 특별히 넘어가주도록 하마.
“.... 여기까지야. 됐어?”
“됐냐고요? 그걸 왜 저한테 물어봐요? 부장이 만족스럽게 봤으면 된 거지.”
“네, 네가 그게 끝이냐면서 날 몰아세웠잖아...!”
“몰아세웠다고요? 물어보기만 하지 않았나?”
“.... 어, 어제는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않냐고 해놓고선...”
“농담입니다. 삐치지 마세요.”
“삐치긴 누가 삐쳤다고...! 혼자 망상에 빠지지 마...!”
“알았어요. 왜 소리를 지르려고 해요.”
시종일관 능글맞은 내 태도에 짜증이 났는지, 렌카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저런 모습도 보여주는구나. 내가 많이 편해졌니?
음음... 저 자두 맛이 날 것 같은 입술을 핥다가 씨즙을 뿌려주고 싶다.
새침한 태도로 이상한 말을 웅얼거리며 부실 창문 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돌연 날 불렀다.
“야.”
“예.”
“나한테 하나 남은 소원... 그거 얼마 안 남았지?”
“그렇죠.”
“조금 미뤄줄 수 있어?”
“갑자기요?”
“.... 그게... 너 혹시 큰삼촌이랑 작은삼촌 기억해?”
야쿠자보다 더 무섭게 생긴, 그러나 천성은 순박한 재미있는 쌍둥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물론 기억하죠.”
“겨울방학 때 도와달라는데, 너 데리고 가려고.”
“그래요? 그걸 마지막 소원으로 빌고 싶다?”
“그런 거지...”
“마지막 남은 소원은 기대하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엄청 고생시킨다며?”
“아니 뭐... 딱히 생각도 안 나고, 음식점 장사도 잘 안 된다고 하니까... 어쨌든 미뤄줄 수 있어?”
상황을 보니, 그 삼촌들이 렌카에게 힘들다며 전화를 했나보다.
나야 상관은 없는데 또 다시 요리물을 찍어야하는 건가?
그렇다면 거기서 아예 렌카와 하루를 묵던지 해야겠다.
거기 공원이 예쁘던데, 밤에 산책을 하면 운치도 있고 좋을 것 같다.
“뭐... 그렇게 하죠.”
흔쾌히 승낙을 하는 내가 의외였을까?
렌카의 눈이 약간 크게 뜨였다.
“그, 그래도 돼?”
“가족이 운영하는 음식점 매출을 생각하는 부장의 마음이 기특하고, 저도 오랜만에 삼촌들 얼굴을 보고 싶기도 하니까... 특별히 들어주는 걸로 할게요. 근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트집 같은 걸 잡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아닌데...? 또 망상하네?”
아니긴 무슨...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픽 하고 실소를 터뜨린 내가 말했다.
“어쨌든 그렇게 하는 걸로 해요.”
“그래... 고마워. 아, 그리고...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게 있어.”
“해보세요.”
“네가 선심을 써준 건 정말 고맙고, 내가 너한테 빚을 진 것도 알아. 하지만 나는 소원을 쓰는 거야. 그렇지?”
“그렇죠.”
“그러니까 막 이걸 구실로 대가를 받으려 하거나... 그런 건 하지 마.”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었다.
건수를 잡고 이상한 걸 시킬까봐 눈치를 보는 렌카가 무척 웃겨서였다.
렌카도 점점 잘 익어가고 있구나. 아주 좋다.
“알았어요.”
“.... 진짜지?”
이걸로 대가를 받을 생각 따윈 없었다.
어차피 다른 걸로 받으려 했으니까.
“손가락 걸까요?”
“무, 무슨 손가락이야...! 됐어.”
새끼손가락을 내밀려고 하자 앙칼지게 고개를 홱 돌리는 그녀.
틀어 묶은 포니테일 끝부분이 옆으로 쏠리는 모습이 꽤나 예쁘다.
오늘따라 순해진 말투로 틱틱대는 렌카를 지켜보던 나는, 문이 열리며 테츠야가 나오자 기분이 팍 다운되는 걸 느꼈다.
저 씨발놈은 분위기를 깨는데 일가견이 있다. 언제 한 번 제대로 물을 먹여줘야 하는데.
“마츠다 군은 혈액형이 뭐야? 내가 맞춰볼게. B형 맞지?”
“맞아.”
“그래서 이렇게 막무가내인 거구나.”
장난기가 가득한 투로 농담을 건네는 미유키.
피식한 내가 말했다.
“너는 O형이라서 오지랖이 넓은 거냐?”
“응. 그런가봐.”
“빵녀는 소심해서 A형인가?”
그 말에 앞에서 부시럭거리며 빵을 먹고 있던 마사코가 콜록! 하며 기침을 했다.
쟤는 언급만 해도 사레가 들리네. 섹스할 때도 저러려나?
의외로 나쁘지 않을지도...?
미유키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던 테츠야가 우리 대화에 끼어들자 짜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얘들아, 혈액형 성격설은 과학적 근거가 없어. 믿으면 안 돼.”
어휴... 씨발놈. 초 치는 거 봐라.
그래서 네가 안 된다는 거다.
미유키가 바보라서 혈액형 성격설을 맹신하는 것 같냐?
흥미로운 대화를 할 만한 이슈로 활용하는 거지.
그딴 식으로 대화 자체를 끊어버리면 미유키가 어떻게 생각하겠니?
그저 소꿉친구 버프만 갖고 있는 과거회상 원툴 찐따...
스스로 비호감 스택을 차곡차곡 쌓는 네가, 나는 너무나도 자랑스럽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렴.
“사이코에 음침한 성격은 무슨 형이냐?”
노골적으로 테츠야를 저격하는 발언에, 미유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 팔을 가볍게 때렸다.
사소한 해프닝이 지나가고 시작된 수업.
미유키는 기말고사 때 내가 정말 좋은 성적을 얻길 바라는지, 수업을 듣는 와중에도 틈틈이 내게 모르는 부분이 있는지 물어봤다.
“여기 이 부분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긴 채로 조목조목 잘 설명을 해주다가,
“하나자와. 과외는 쉬는 시간에 해라.”
이를 눈치챈 교사에게 지적을 당해 얼굴이 빨개지는 건 덤.
다급하게 내 책상과 거리를 두고 수업에 집중을 하는 그녀가 웃기기도 하고, 예쁘기도 하다.
특히 인중 위에 샤프를 올려놓고 입술을 쭉 내밀며 칠판을 주시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이게 러브 코미디 장르에서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반하는 순간인가?
원래라면 초반부에 나오는 클리셰지만 지금 보는 것도 느낌이 나쁘지 않다.
이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미유키가 무안한 얼굴로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책상 밑으로 슬쩍 한손을 뻗어, 내 손을 잡고 깍지를 껴왔다.
의자 사이의 빈 공간에서 서로의 팔을 앞뒤로 흔드는 우리.
달달한 기분이다. 미유키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옆에 숨소리가 큰 테츠야만 없었더라면 내가 주인공인 완벽한 러브 코미디라고 생각했을 텐데... 오늘도 혐오수치가 차오른다.
그렇게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겨울치고는 따스한 날씨의 햇빛을 받고 싶어 창문을 연 나는,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오다니는 것을 보았다.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팜플렛을 받아가고 있었다.
대다수는 학부모처럼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이게 뭔가 싶었던 내가 미유키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