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84화 (184/313)

  

“오늘 무슨 날이냐?”

  

“뭐가?”

  

“운동장에 사람이 많아.”

  

“아... 그거? 오늘 입학설명회 있는 날이라서 그래.”

  

“입학설명회? 그걸 지금 해?”

  

“1, 2차는 저번 달에 이미 끝났는데, 그때 홍보랑 안내가 덜 돼서 학부모님들 원성이 자자하셨거든. 그래서 이번에 추가적으로 하게 됐어.”

  

“우리 학교는 추첨제 아니냐? 해서 뭐해?”

  

“지원도 받아. 추첨 반, 지원 반.”

  

“그래?”

  

“응. 몰랐어?”

  

“몰랐지.”

“바보.”

  

애교 섞인 말투로 날 타박하는 그녀.

실소를 터뜨린 나는 책상 밑에서 지갑을 꺼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매점 가려구? 그럼 메론 우유.”

  

“새로 나온 거? 아침에 먹었잖아.”

  

“또 먹을래. 마사코 거랑 호노카 것도 부탁해.”

  

“그러지 뭐.”

  

교실을 나간 나는 곧장 매점으로 가지 않고, 입학설명회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확실하게 확인할 것이 있어서였다.

  

“안녕하세요, 예보니 아카데미 입학설명... 응?”

  

친절한 낯으로 학부모와 학생들을 안내하던 학생회 간부가, 날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츠다 켄이네? 여긴 왜 왔어?”

  

단박에 날 알아보는구나.

하긴, 매번 사고만 치고 다니던 날 학생회가 못 알아볼 리는 없겠지.

어색한 미소를 지은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 무슨 일이야?”

  

“사람들이 많이 오가길래 뭔 일인가 싶어서요. 입학설명회에요?”

  

“응. 근데 왜 가까이 와...?”

  

잔뜩 경계를 하는 눈초리로 날 쳐다보는데, 갑자기 성욕이 막 솟구친다.

화장기 하나 없는 저 수수하지만 예쁘장한 얼굴을 타락시키고 싶어져.

체육관 한켠에서 입을 틀어막고 후배위로 박으면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아.

  

“도와줄 거 있어요?”

  

“도와준다고...? 괜찮은데...? 아, 학부모님! 거기가 아니라 이쪽 입구로 들어가셔야 해요!”

  

미심쩍은 목소리로 의아해하다가, 길을 잘못 들려고 하는 학부모에게 달려가는 그녀.

그 틈을 탄 나는 슬쩍 선배가 서있었던 책상으로 갔다.

  

‘아사히나... 아사히나...’

  

이후 히요리의 성씨를 속으로 되뇌며 방명록을 쭈욱 훑어보다가,

  

‘있다.’

  

하단에서 [아사히나 리온], [아사히나 류우신]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 두 사람은 히요리의 부모님이었다.

1, 2차 입학설명회를 놓치고 이번에 온 모양인데... 이로서 확실해졌다.

히요리는 내년에 우리 아카데미에 입학하는구나.

  

놀기 좋아하는 그녀가 지원으로 이 명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지 못한다 해도 추첨을 통해 오게 될 것이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저번에 오락실에서도 상큼한 레몬 향을 풍기며 등장을 암시했었는데, 빨리 보고 싶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어느새 안내를 끝내고 돌아온 선배의 물음.

태연스레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자리가 비워져있으면 안 되니까 잠시 있었던 거죠.”

  

“그래...? 도와줘서 고마운데 거기 서있으면 안 돼.”

  

왜 이렇게 권위적이야. 훈육 마렵게.

히요리의 부모님 얼굴을 보려면 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순순히 간이 책상에서 물러난 내가 말했다.

  

“알겠어요. 수고하세요.”

  

“응. 잘 가.”

  

**

  

점심시간.

  

잠깐 화장실을 간 미유키를 기다리던 나는, 운동장 구석에서 렌카와 어떤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진지한데, 남자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고백을 한 직후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렌카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얼핏 싸늘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이건 뭐 여자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엑스트라의 고백 이벤트 같은 건가?

호기심이 동한 나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여, 두 사람이 있는 장소 뒤의 벽으로 가려져있는 스탠드에서 대화를 엿들어보았다.

  

“미안해.”

  

무감정한 투로 남자에게 사과를 건네는 렌카.

숨을 훅 삼킨 남자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왜? 어째서?”

  

“안 좋아하니까. 넌 내 취향 아냐.”

  

내 예상이 맞았구나.

엑스트라가 고백을 하고, 도도한 여자주인공은 가차 없이 고백을 거절하는 클리셰가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다.

  

보통 여자주인공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장치로 쓰이는데... 고전적이긴 하다.

그래도 재미있다. 싸움구경만큼 흥미진진한 게 고백, 그리고 실연 장면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아... 그래...?”

  

“응. 네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난 너한테 관심 자체가 전혀 없었어. 그러니까 이제 이러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렌카가 남자에게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했다.

아무리 그녀가 냉정하다지만 속은 따뜻한 편인데 저런 식으로 매정하게 굴다니.

아무래도 남자가 알게 모르게 집착 비슷한 짓을 했었나보다.

  

“그렇구나...”

  

남자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분노에 발악을 했다면 내가 끼어들 건덕지가 생겼을 텐데, 얌전히 가버려서 못내 아쉽다.

  

완전히 풀이 죽어버린 남자의 뒷모습이 마치 테츠야의 미래 같다고 생각한 나는 스탠드 앞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렌카를 내려다보았다.

  

“부장.”

  

“흐아아악!”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기겁을 하며 펄쩍 뛰는 그녀.

낄낄거린 나는 그녀가 진정하길 기다렸다가 말했다.

  

“고백 받았네요?”

  

“다, 다 들었어...?”

  

“본의 아니게 들었어요.”

  

“.... 넌 정말 어디에나 있구나. 짜증나게...”

  

“지금 시비 거는 거예요?”

  

“누가 시비를 걸었다고 그래...! 그런 적 없어...!”

  

엑스트라 남자에게 냉랭하게 굴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응이다.

표정부터 다르다. 맛있다, 맛있어.

이래서 내가 렌카를 괴롭히는 걸 못 끊는다.

  

“아니면 말고요. 근데 부장.”

  

“뭐...!”

  

“부장은 어떤 남자가 취향이에요?”

  

거절의 이유로 들먹였던 말을 하자, 렌카가 움찔하더니 눈을 치켜떴다.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말 안 해.”

  

“알려줘요.”

  

“확실한 건 넌 절대 아냐.”

  

“진짜요?”

  

“어. 진짜로.”

  

진심일까? 아닐까?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면 이런 줄타기를 할 이유가 없어지는데, 그러면 재미가 없어지지.

맨몸으로 도키아카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서운하네요. 지금까지 쌓아온 정이 있는데.”

  

“정은 무슨 정...! 그런 건 단 하나도 없어...!”

  

“진짜 없어요?”

  

“없다니까...! 이제 빨리 사라져.”

  

“없다고요?”

  

“.....”

  

이대로 가면 내가 절대 물러서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을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렌카가 억지로 말을 쥐어짜냈다.

  

“서, 선후배의 정은 있어. 됐냐?”

  

“남녀 간의 정은 없어요?”

  

“그딴 게 있을 리가 있겠어?”

  

“우리 호텔에서 재미있었잖아요.”

  

그 말에 렌카가 화들짝 놀라더니 주변 눈치를 보았다.

  

“시, 시끄러워...!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 그건 너만 재미있었던 거지...! 지 욕구만 채우려고 사람한테 못할 짓을 했으면서...”

  

“부장은 별로였어요?”

  

“별로였어. 최악 그 자체였어.”

  

“그럼 다음에는 부장도 좋아하도록 노력해볼게요.”

  

“그러든가 말든... 뭐? 다음?”

  

“예. 다음이요.”

  

이를 드러내보이면서 렌카에게 웃어준 나는, 저 멀리서 미유키가 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오늘 잘했어요.”

  

“.... 잘했다니? 뭐가?”

  

“부활동 시간에 봐요.”

  

“야...! 뭐가 잘했다는 건데...!?”

  

하나하나 알려주면 재미없잖아.

일부러 오해할만하게 말했으니까 혼자 생각해보렴.

펄쩍펄쩍 뛰며 격앙된 반응을 보여주는 렌카를 놔두고, 나는 자리를 떴다.

“스승님.”

  

창고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민 나는 부실 구석에서 쪼그려 앉은 채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치나미를 불렀다.

  

“네?”

  

작은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차리고는 내게로 고개를 돌리는 치나미.

손짓을 하자 도복 바지 밑단을 훌훌 털어내고선, 앙증맞은 발가락을 뽈뽈 놀리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다.

  

그런 그녀를 창고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 나는, 준비해두었던 쇼핑백 안에서 물건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치나미의 손에 들려주었다.

  

“선물이에요.”

  

두툼한 그것을 받은 치나미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건 장갑이었다.

엄지만 삐죽 튀어나와있는 살구색 벙어리장갑 말이다.

  

“모모님 장갑으로 구해보려 했는데 구하려다가 겨울이 다 지나갈 것 같아서, 더 늦기 전에 드리려고 합니다.”

  

“.....”

  

“한 번 껴보실래요?”

  

착용을 제안해보았음에도, 치나미는 자신의 큼지막한 눈을 끔벅이며 딱 붙인 두 손 위에 올라간 장갑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감격에 겨운 눈빛이지만, 그 안에 복잡한 심경이 섞여있다.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선 장갑을 감상하던 그녀가 날 올려다보았다.

  

“저어... 후배님.”

  

“예.”

  

“선물은 정말, 정말정말정말 감사하지만... 이건 마음만 받아야겠어요.”

  

저런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나와의 관계가 발전되면 발전될수록 미유키가 눈앞에 아른거리겠지.

나는 치나미가 내미는 장갑을 다시 그녀 쪽으로 밀어냈다.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괜찮아요? 미유키랑 같이 만날까요?”

  

“네에...? 하, 하나자와 후배님이랑요...?”

  

“예. 오랜만에 같이 밥 먹어요. 아이스크림도 좋고요.”

  

“하, 하지만...”

  

“미유키도 좋대요.”

  

“늣... 하나자와 후배님께서는... 그... 저희가 그걸...”

  

“했다는 걸 모르지 않냐고요?”

  

“흐아아... 넷... 맞아요...”

  

넌지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화들짝 놀라는 그녀.

가벼운 살웃음을 지은 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아요.”

  

“....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벙 찌는 치나미.

그런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부드럽게 감싼 내가 재차 말했다.

  

“미유키도 알아요. 분명히 알고 있어요.”

  

“그, 그럴 수가...? 왜요...?”

  

어떻게요가 아니라 왜요?

엉뚱한 치나미다운 질문이지만, 또 정상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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