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괜찮은 걸로 알아도 되죠?”
“느앗...? 저는 아직 대답을 한 적이 없는데요...?”
“안 먹을 거예요?”
“아니... 저도 오랜만에 하나자와 후배님과 친목을 도모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래도 될지...”
“미유키도 좋고, 저도 좋고, 스승님도 좋다고 하는데 안 될 건 뭐가 있나요.”
“그, 그런 건가요...?”
“그런 겁니다. 일단 장갑부터 껴보세요.”
“아, 넷...!”
내 말에서 믿음을 느낀 걸까?
다소 안도한 표정을 지은 치나미가 더 이상 재지 않고, 장갑에 붙어있는 상품 택을 건드리지도 않을 정도로 조심조심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순수하고, 진심이 서려있는 감탄을 터뜨렸다.
“예쁘다아... 따뜻해요...”
“괜찮아요?”
“네...! 정말 고맙습니다... 손등 쪽에 모모님 자수를 뜨면 더 예쁠 것 같아요... 그래도 될까요...?”
좋아해줘서 다행이다.
자신의 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는 치나미를 보며 심장이 좋은 쪽으로 아파온 나는, 금세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바뀐 치나미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물론이죠.”
**
바니걸 의상의 포인트는 많다.
커프 링크스, 윗가슴을 드러내는 검은 레오타드, 나비넥타이 형 초커, 팬티 스타킹...
더 나아가 토끼 귀 머리띠와 동그란 흰색 꼬리장식, 그리고 굽이 굉장히 높은 하이힐까지.
여기서 복장을 입은 여자의 Y존이 살며시 드러나면서, 툭 튀어나온 장골이 보이기까지 하면 아주 좋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코스어가 그랬다.
골반이 큰 슬랜더 체형에, 포인트를 딱딱 맞춘 코스프레로 보는 이들에게 흥분감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보정이 들어간 걸 감안해도 최고. 하지만 한 가지 흠이 있었다.
그건 바로 레오타드에 윤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라텍스처럼 매끈매끈한 레오타드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니어서 조금 아쉽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바니걸에서 한 끗 모자라.
그래서 렌카가 필요하다.
빨리 내 개인적인 취향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코스프레를 입히고 싶어.
바깥 벤치에서 여러 여자들의 코스프레 복장을 살펴보면서 시각적인 쾌락을 즐기던 나는,
“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뒤에서부터 렌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도 없이 언제 왔을까.
아마 오늘 점심에 몰래 고백 장면을 엿들은 내게 복수를 하려고 살금살금 다가왔나보다.
놀라게 한다든지, 뭐 이런 식으로.
“뭐가요?”
당당하기 그지없는 내 태도에, 황당한 듯 입을 벌리고 있던 렌카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 그런 걸 보고 있냐고...!”
“일 다 하고 휴식하는 시간인데 보면 안 돼요?”
“그, 그 말이 아니잖아...!”
“그러면요?”
“.....”
입을 꾹 다무는 렌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린 내 한쪽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렌카는 내가 보고 있는 이걸 자신에게 입힐까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눈치 한 번 빠르다. 어떻게 알았지?
“아... 알겠습니다. 확인했어요.”
알만하다는 듯한 내 표정을 본 렌카의 안색이 시퍼래졌다.
“무, 뭐...? 뭘 알아? 뭘 확인했는데?”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지.”
“야...! 너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왜 그런 걸 보고 있냐고 물어보기만 했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다급하게 손사래를 치는 모습이 웃기다.
“알았어요.”
“아니 그러니까 뭘 알았냐고...! 말을 해야 오해를 풀 거 아니야...!”
오해를 풀어주기 싫으면 좀 너무한 건가?
아니, 누구라도 렌카의 이런 반응을 본다면 나처럼 생각할 것이다.
“오해를 풀만한 게 있나요? 부장 혼자 제 개인적인 사생활을 엿본 거잖아요.”
“엿본 건 본의 아니게 그런 거야...! 네가 오늘 점심에 그랬듯이...!”
“그랬어요?”
“그, 그리고 봐버렸으니까 풀어야지. 물론 그냥 코웃음을 치면서 넘겨도 되지만... 네가 이걸 갖고 나한테 막... 생떼를 쓸 수도 있잖아.”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상큼하다.
“무슨 생떼?”
“.....”
떨떠름한 얼굴로 침묵하는 그녀.
곧 죽어도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그녀에게 히죽 웃어보인 내가 화제를 돌렸다.
“그 남자랑은 같은 반이었어요?”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어.”
“친하게 지냈었나보다.”
“전혀.”
“친했었으니까 고백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냥 동급생처럼 지내기만 했는데, 걔가 멋대로 오해한 것일 뿐이야.”
“그래도 잘해주긴 했죠?”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미우라나 다른 부원들을 대하듯 했어요? 아니면 절 대하듯 했어요?”
“.... 후자라고는 할 수 없겠네.”
“어장관리 하셨구나.”
그 말에 렌카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어장관리라니...!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어...! 날 뭘로 보는 거야? 선 넘지 마...!”
“알았어요. 미안해.”
“하... 너랑 대화만 하면 막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야. 짜증나.”
“재미있지 않아요?”
“지금 내가 재미있어하는 걸로 보여?”
충분히 그런 것처럼 보여.
틱틱대고는 있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고 있잖아.
예전이었다면 여기까지 대화가 이어지기도 전에 렌카가 먼저 등을 돌렸을 텐데, 감회가 새롭다.
역시 사람은 뻔뻔해야 된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밀어붙이니까 렌카도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잖아.
아직 전부 녹으려면 갈 길이 멀긴 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뿌듯하다, 뿌듯해.
“저는 재미있는데.”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방학 때 뭐할 거예요?”
“너는 아까부터 뜬금없는 말을 한다?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몰라.”
“모르는 거예요? 아니면 안 알려주는 거예요?”
“둘 다야.”
“섭섭하네.”
벤치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쭈욱 편 나는, 맞바람에 섞여 콧속으로 들어오는 렌카 특유의 블루베리 향을 음미하며 그녀에게 접근했다.
“무, 뭐야?”
흠칫하면서도 기세를 잃기 싫은 듯 눈을 부릅뜨는데, 위협적이긴 커녕 귀엽기만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데 일단 경계부터 하고 보는 새끼고양이 같아.
“일하려고요.”
“일 다 했다며?”
“1차적으로만 다 한 거죠. 이제 마른 도복 개고, 오늘 생수 오는 날이라 짐 날라야 돼요.”
“그래?”
“도와줄래요?”
“내가 왜?”
“저번에 그러지 않았어요? 아직 매니저 일이 서투를 수도 있으니까 지켜보면서 도와줘야한다고. 스승님 앞에서 그랬던 것 같은데 아마.”
정곡을 찔린 렌카의 어깨가 달싹였다.
“넌 무슨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해?”
“쓸데없이 기억력이 좋아서요. 부장이 메이드복을 입고 목줄을 찬 채로 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나요.”
“야! 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욕지거리를 쏟아내려다가 입을 틀어막는 렌카.
킥킥거린 내가 말했다.
“농담이고, 기억 안 납니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고?”
“믿기 싫으면 어쩔 수 없는 거죠. 부장이 제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일은 제발 기억에서 지워줄래?”
“기억 안 난다니까요.”
무심한 듯 말하고는 렌카의 옆을 지나치자, 그녀가 ‘아이 씨...’ 하며 작은 감탄사를 터뜨리더니 내 뒤를 따라왔다.
“기억에서 지우라고 했다... 알았냐?”
“기억 안 난다고 했어요.”
“기억나잖아. 지워.”
“기억 안 나.”
“평어 섞지 말고.”
“그런 적 없어요.”
“섞었어 방금.”
“안 섞었다니까.”
“이거 봐...! 또 이러잖아...!”
“아 왜 이렇게 평어에 집착을 해요?”
“이건 집착이 아니라, 널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 거야...!”
“뭐래... 귀찮게.”
“뭐? 귀찮아? 야!”
기가 막힌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내 보폭을 따라오는 그녀를 보니 절로 웃음이 터지려고 한다.
넌 나랑 러브 코미디를 찍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야.
조금 뒤틀린 러브 코미디이기는 하지만... 신이 그렇게 점지했어.
방학 때 딱 기다려라.
그렇게 우린 마치 사소한 일로 싸우는 한두 살 터울의 커플처럼, 티격거리며 동산을 내려갔다.
두꺼운 이불 안으로 발을 들이미니 후끈한 열기가 다리를 쬔다.
절로 늘어진 한숨이 새어나올 정도로 포근한 기분.
이래서 사람들이 코타츠, 코타츠 하나보다.
“좋아?”
맞은편에 앉아선 나처럼 코타츠 안으로 다리를 들이민 미유키의 물음.
그녀의 다리 사이에 발을 살며시 들이댄 내가 대답했다.
“그냥저냥 쓸 만하네.”
“표정부터 바꾸고 그런 얘길 하지...”
“내 표정이 뭐 어때서.”
“좋아하고 있잖아.”
“아닌데.”
“아니긴... 바보.”
애정 어린 투로 핀잔을 준 미유키가 책을 펴려다가 움찔했다.
내 발끝이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갔기 때문.
민감한 부위를 지그시 터치하는 감각에 입술을 잘근 깨문 그녀가 날 타박했다.
“뭐해...!”
음음. 좋은 반응이다.
방학 때 테츠야와 공부를 하게 되면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올 것 같아.
장소가 우리 집인 게 아쉽다.
이런 건 테츠야의 집에서 해야 그 맛이 더 살아나는 건데.
상황을 봐서 집을 옮겨다니며 공부를 하자고 해야겠다.
테츠야의 가족들도 한 번 살펴볼 겸 말이다.
혹시 아는가? 테츠야가 계속 선을 넘으면 놈의 집 아들 자리를 내가 차지해버릴지도.
네토리물에서 탁란이 안 나오면 섭하잖아.
음습한 미래를 그리며 미유키의 살을 건드리던 나는, 피부를 건드릴 때마다 짧은 콧바람을 훅훅 내뱉는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야.”
“.... 책부터 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지금 공부하자고?”
“하기로 했잖아... 다리는 좀 치워줄래...?”
“싫은데.”
“꼬집는다...?”
“해봐.”
“진짜 한다...?”
“하라니까?”
태연하게 가벼운 애무를 계속하자 눈썹을 꿈틀하는 미유키.
내 다리에 손가락을 올리고는 살집을 지그시 누르려고 하던 그녀는, 내가 소리 내지 않고 아픈 척을 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됐어... 안 할래.”
“왜?”
“하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안 해도 좋아하는데.”
“그 얘기가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