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86화 (186/313)

  

은근슬쩍 마음을 드러내자, 미유키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약간 올라가있는데,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속이 빤히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피식한 나는 얌전히 책을 폈다.

  

평화로운 금요일이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 서운할 정도로.

그렇게 나는 미유키의 정성이 담긴 과외를 받으며 기말고사를 대비했다.

  

**

  

다음날 점심.

미유키와 함께 치나미와의 약속장소로 향하고 있던 나는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

  

“마츠다 군, 이노오 선배가 자기도 밥 같이 먹으면 안 되냐고 물어보시는데... 된다고 한다?”

  

“부장이?”

  

“응.”

  

여기서 불청객이 끼어버린다고?

테츠야였다면 넌 눈치가 없냐며 엿 먹으라고 했을 테지만, 렌카니까 봐준다.

  

“그래라.”

  

“알았어.”

  

사실 현 치나미의 상태를 생각하면 렌카가 있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자리가 꽤나 어색할 거라고 예상이 되는데, 렌카가 그 부분을 풀어줄 수도 있을 테니까.

불청객은 맞긴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반가운 손님 정도라고 생각하자.

  

떠들썩한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린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후 식당가 층에서 내리자마자 치나미와 렌카를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선배!”

  

허리를 꾸벅 숙이는 미유키.

마주 인사를 한 렌카가 말했다.

  

“고마워, 뜬금없는 제안이었는데 승낙해줘서.”

  

“아니에요. 언제나 환영해요. 나나세 선배는 잘 지내셨나요?”

  

미유키가 웃는 낯으로 안부를 묻자, 치나미가 방글방글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넷...! 잘 지냈답니다. 하자나와 후배님께서는... 아, 하자나와가 아니라 하나자와죠. 죄송해요...”

  

긴장해서 말을 더듬고는 있지만, 내가 예상한 것보다는 나름 자연스럽게 미유키를 대하고 있다.

완전히 굳어버려선 어버버거릴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저번에 해준 괜찮을 거라는 말이 도움이 되었나보다.

  

다행스럽게도, 미유키의 얼굴색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밤이 되면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흐뭇한 얼굴로 치나미와 미유키를 보고 있던 나는 팔짱을 낀 채 서있는 렌카를 흘깃거렸다.

귀여운 코디를 하고 온 치나미와는 정반대의 도도한 옷차림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외형과 성격을 가진 둘이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지 미스터리하다.

  

이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렌카가 입모양으로 ‘뭘 봐’라는 말을 했다.

새초롬하게 구는 그녀를 놀려먹고 싶어진 나는, 치나미와 미유키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리에서 반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는 렌카의 옆으로 슬쩍 자리를 옮겨,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장이 여기 왜 있어요?”

  

“왜? 난 여기 있으면 안 되나?”

  

“원래는 안 되지.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러는 건 민폐에요.”

  

“오늘 치나미가 나랑도 만나는 날인데,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차라리 나도 끼면 어떨까 해서 물어본 거야. 하나자와도 너도 승낙했잖아. 거절했으면 따로 기다리려고 했어.”

  

“농담 한 번 해봤습니다. 잘 왔어요.”

  

“근데 너 웃긴다?”

  

“뭐가요.”

  

“내 앞에선 친근하게 굴더니, 뒤에서는 따돌리고나 있네?”

  

자신에게는 밥을 먹자고 안 물어봐서 섭섭했던 건가?

너 나 싫어하지 않냐? 따돌리든 말든 신경 끄면 되잖아.

라고 말하기엔 우리 사이가 조금... 아주 조금 가까워지긴 했지.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쓰리섬을 앞에 두고 친목을 도모해서, 그 자리의 어색함을 나름 풀어보기 위한 모임이라고는 말 못하지.

적어도 지금은.

  

“아닙니다.”

  

“맞잖아. 솔직하게 말해.”

  

“아니라고요. 어제부터 집착이 심하시네. 혼날래요?”

  

그 말에 렌카가 콧방귀를 꼈다.

  

“혼낸다고? 어떻게 혼낼 건데?”

  

방법이야 많지.

채찍질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귀갑묶기, 구속하고 바이브레이터로 오르가즘 컨트롤 등...

온갖 것들이 다 생각난다.

  

음흉한 상상을 하고 있는 내 표정을 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을까?

침을 꼴깍 삼킨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니다... 얘기하지 마.”

  

“왜요. 꼭 얘기해주고 싶은데.”

  

“하지 마.”

  

“그럼 제 마음대로 혼내면 돼요?”

  

“이게 진짜...!”

  

눈썹을 치켜뜨고는 날 노려보는 렌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 위에서 달랑거리고 있는 화려한 귀걸이를 감상하던 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장난이에요.”

  

속닥속닥 티격거리는 우리가 이상했을까?

치나미와 대화를 하다 말고 뒤를 돌아본 미유키의 고개가 갸웃했다.

  

“둘이서 뭐하세요?”

  

그러자 렌카가 날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냐. 들어갈까?”

  

“아, 네...”

  

**

  

청순하고, 귀엽고, 요사스런 변태 암여우와 같은 스타일이 한데 모여 앉아있는 모습.

굉장히 낯설 것 같았는데 의외로 그림이 나온다.

여기에 자유분방한 히요리까지 합하면 완벽할 것 같다.

  

“.... 그래서 제가 모모님 사이트에 한 번 들어가 봤거든요? 그런데 홈페이지가 조금...”

  

“아...! 너무 대충 만들어진 것 같다고 말씀하려고 하셨지요?”

  

“음, 네... 맞아요.”

  

“거기는 가짜 사이트에요. 모모님 인기에 편승한 사기꾼들이 제작한 곳이랍니다.”

  

“아 진짜요?”

  

“네. 제가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서 잘 알아요. 볼 때마다 몇 번이나 신고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폐쇄가 되긴 하지만 금방 부활해버려요. 그냥 검색을 하면 가장 위에 뜨는 사이트로 들어가시는 게 마음이 편하실 거예요.”

  

“그렇구나... 한 번 보여주실 수 있어요?”

  

“네, 잠시만요...”

  

미유키는 치나미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반응.

치나미가 나와 미심쩍은 관계를 가졌음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텐데도 저러는 것이 참 대인배 같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같은 느낌인가?

아니면 속은 타는데 애써 태연하게 구는 건가?

부디 전자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히로인들과 기싸움을 하는 미유키가 보고 싶긴 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치나미여서는 안 된다.

마음이 약한 치나미에게는 잘 대해주고, 기가 센 렌카에겐 은근한 대립구도를 세우는 미유키... 상상하니 꼴리잖아.

  

정문을 지키던 그녀가 지각한 렌카에게 가차 없이 벌점을 부과하는 모습... 재미있을 것 같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내게는 좋은 일이었기에, 나는 음식을 주문조차 하지 않고 조잘대고 있는 두 사람을 곁눈질하며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렌카가 끼어든 게 결과적으로는 좋은 수였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쭈구리처럼 메뉴만 쳐다보고 있었겠지.

  

“뭐 드실래요?”

  

메뉴판을 내민 내 물음에, 렌카가 메뉴를 쓰윽 훑어보더니 대답했다.

  

“치나미는 나폴리탄 스파게티랑 복숭아 아이스 티로 하고, 나는 치킨 가라아게 덮밥으로 할게.”

  

달달한 걸 좋아하는 초등학생 입맛을 지닌 치나미에게 딱 걸맞은 메뉴 선정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미유키는 야키소바, 저는 오야코동으로 할게요.”

  

“오야코동? 너무 간단한 거 아니야?”

  

“나폴리탄 스파게티나 치킨 가라아게도 똑같잖아요.”

  

“하긴... 근데 하나자와한테는 안 물어보고 막 시켜도 돼?”

  

“오늘 오면서 야키소바가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어요.”

  

“그래?”

  

“예.”

  

“둘이 많이 친한가보다. 근데 미우라는 안 왔어?”

  

“미우라는 왜요?”

  

“셋이서 자주 같이 다니잖아.”

  

그 핵폐기물을 왜 여기에 끼워. 공기 탁해지게.

근데 갑자기 궁금해지긴 한다.

테츠야가 우연히 우리를 발견하면 어떤 얼굴을 할지.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미유키와 렌카... 그리고 그 가운데에 섞여있는 나.

보면 아마 큰 충격을 받겠지?

  

미유키가 여전히 치나미와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한 내가 아주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굳이 부를 필요는 없잖아요. 스승님과의 접점도 없는데.”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린 렌카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약속시간 전에 단둘이 만나서 온 미유키와 내 사이가 수상한 모양.

  

게다가 밀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꽤나 가깝게 붙어 앉아있는 상태였으니 의심할만하겠지.

쓰리섬을 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면 기절이라도 하려나 싶다.

  

만약 네가 이 분위기에 초를 쳐버리잖아?

그러면 나는 너한테 아주아주 큰 벌을 내릴 수밖에 없어.

그렇게 되지 않도록, 오늘은 얌전히 나랑 대화하면서 밥만 먹고 가자.

  

마침 우리 테이블을 지나치고 있는 종업원을 본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한손을 들었다.

  

“여기 주문할게요.”

“그럼... 하나자와 후배님, 다음 주에 뵈어요.”

  

허리를 꾸우벅 숙이는 치나미.

거짓말 조금 보태서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과도한 예의를 차리자, 미유키가 기겁을 하더니 치나미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 다음 주에 봬요. 오늘 정말 재미있었어요.”

  

당혹스러워하는 그녀에게 헤실거리는 미소를 보여준 치나미가 말했다.

  

“저두요. 월요일 날 제가 아끼는 복숭아를 가지고 올 테니, 꼭 같이 먹었으면 좋겠네요.”

  

“어, 얼마든지 먹을게요.”

  

“네, 그럼... 마츠다 후배님도 안녕히 가세요.”

  

자신의 목도리로 입술을 반쯤 가린 치나미가 한손을 들어올렸다.

조막만하지만 비율이 굉장히 좋은 손가락을 딱 붙인 채 손을 흔드는 모습이 예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준 벙어리장갑은 안 꼈네?

나중에 물어봤을 때, 너무 소중해서 고이 보관하고 있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예. 부장이랑 재미있게 노세요.”

  

“넷...!”

  

“부장도 수고하고요.”

  

치나미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말투.

그에 미간을 좁힌 렌카의 고개가 대충 끄덕여졌다.

  

“어.”

  

그녀는 내가 방금 보여준 태도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미유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꼴에 삐치기는. 괴롭힘 마렵게 하네 자꾸.

그래도 오늘 쓸데없는 얘기 같은 건 없이, 미유키와 잘 어울려줬으니까 봐준다.

  

치나미와 함께 쇼핑 코너로 가는 렌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미유키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렇게 주차장에서 내려 세워둔 차로 향하는 중간에, 무언가를 곱씹어보고 있던 미유키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겨울용 복숭아가 따로 나오나? 뉴스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겨울용 복숭아는 왜?”

  

“아니... 나나세 선배가 복숭아를 갖고 오신다길래.”

  

“아... 그거? 저번에 듣기론 초가을쯤에 미리 사놔서 얼려놓는다더라. 여러 품종이 있는데 그중에서 나나세 선배가 특출나게 좋아하는 게 있나봐.”

  

“아... 대단하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오늘 어땠어?”

  

“재밌었어.”

  

나쁘진 않지만 조금 심심한 대답이다.

이게 단가?

  

“나나세 선배랑은 개인적으로 많이 연락을 나눠봐야 할 것 같아.”

  

아니구나. 미유키도 본인 나름대로 느끼는 바가 많았던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대로 내게 쓰리섬과 관련해서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게 자꾸 언급하는 것보다는 좋은 것 같다.

  

나는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아서 고맙다는 뜻으로 그녀의 손을 꼬옥 부여잡았다.

그리고는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러자 미유키가 픽 하는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 눈치챈 것이다.

  

한 번이니까, 한 번 정도는.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담담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헌데 치나미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나누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아직 치나미에겐 쓰리섬을 위한 얘길 하지 않았는데... 설마 그 주제로 대화를 주고받지는 않겠지?

  

조금 걸리긴 하지만 괜히 초 치지 말고 가만히 있자.

나보다 훨씬 현명한 미유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할 것이다.

  

“옆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고 갈까?”

  

“응. 좋아.”

  

**

  

“마츠다로군.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월요일 오전, 부실에 잠깐 소모품 체크를 하러 온 나는 고로 감독을 마주쳤다.

눈 밑이 퀭하고 정기가 제대로 빨린 표정이다.

  

주말에 방어전을 치렀나? 힘들면 내가 조금 도와줄 수도 있는데...

고로의 와이프는 건들지 않기로 다짐했지만 자의면 또 이야기가 다르잖아.

혹시 초대남 같은 건 안 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에 배달 오던데, 잘 왔나 체크해보려고요.”

  

“내가 아까 체크했는데? 다 잘 왔다.”

  

“저도 직접 해봐야죠. 매니저니까요. 아, 감독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정리도 할 겸 보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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