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87화 (187/313)

  

능글맞은 말투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는 고로.

자신의 큼지막하기 짝이 없는 털복숭이 손을 내 어깨에 턱! 하고 올려놓은 그가 물었다.

  

“알았다. 요즘 훈련은 잘 돼가고?”

  

“예. 나나세 선배 덕분에 잘 해나가고 있습니다.”

  

“말은 겸손하게 잘하는구나. 친선전 때 조금만 덜 공격적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고로 앞에서는 비매너 짓을 좀 하긴 했으니까.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자, 고로가 말을 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검도는 예를 기반으로 하는 무도야.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뒷받침되어야만 너 또한 존중받을 수 있는 거다.”

  

“열심히 고쳐보겠습니다.”

  

“그거면 됐다. 수업은 언제 시작하지?”

  

“한 20분 뒤에요.”

  

“그래? 그러면 잠깐 팁 좀 가르쳐줄까?”

  

“저야 뭐... 가르쳐주신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죠.”

  

“좋은 자세다. 잘 봐라.”

  

나와 마주선 고로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안 그래도 컸던 그의 상체가 확 부풀어 올랐다.

그 상태에서, 고로는 죽도를 잡는 시늉을 하며 팔을 머리 위로 들어올려 상단세를 취했다.

  

치나미의 경우, 상단이 주 겨눔세이긴 하지만 체격이 왜소해서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공수를 한 번 교환하게 되면 날카로운 손속에 진땀을 흘리겠지만, 그 전까지는 마냥 귀엽게만 보이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고로는 달랐다.

체격이 워낙 커서 상단세를 취하니 분위기가 대단했다.

몇 번을 갈겨도 부서지지 않는 거대하고 단단한 벽을 마주하는 기분.

나도 한 덩치 한다고 생각했지만, 원체 건장한 고로와 비교하면 세 발의 피였다.

  

“큰데요.”

  

“그래, 크지? 시작 전에 숨을 가슴으로 잔뜩 빨아들여서 상체를 커지게 만들어봐라. 단, 공세에 들어가면 움직임이 무뎌지지 않도록 다시 되돌려야한다.”

  

“기선제압을 위해서인가요?”

  

“정확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상대가 나보다 실력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는 상황에서 기세가 좋은 상단을 마주한다면 심리적인 위축 효과가 커. 한 번 해봐라.”

  

순순히 고로의 말을 따라 숨을 크게 마신 내가 팔을 위로 치켜들자, 내 자세를 지켜보고 있던 고로가 말했다.

  

“여기서 양쪽 팔꿈치를 좌우로 더 벌려봐.”

  

“이렇게요?”

  

“그래. 좌우 폭을 넓혀서 안 그래도 큰 네 체격을 더더욱 크게 보이도록 해라. 시야가 제한되는 호면을 쓴 상태에서 널 본다면 큰 산을 마주하는 느낌일 거다. 도끼눈까지 뜨면 더 좋고.”

  

“알 것 같습니다.”

  

“좋아. 네가 선봉이었지?”

  

“예.”

  

“부담이 많은 자리일 텐데, 뒤로 옮길 생각은 없고?”

  

“없습니다. 만족해요.”

  

“잘 생각했다. 선봉은 너한테 딱 어울리는 포지션이야. 나나세한테 많이 배워둬라.”

  

“알겠습니다.”

  

“소모품 체크하러 가봐.”

  

고로에게 간단한 입례를 한 나는 창고로 움직였다.

거기서 배달 온 소모품을 체크하며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하...”

  

뒤에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몸을 돌려보니, 뚱한 표정의 렌카가 팔짱을 낀 채 날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자주 단둘이 마주치는 느낌인데, 얘 설마 날 스토킹하는 거 아니야?

  

“또 보네요?”

  

“.....”

  

“이젠 대답도 안 하는 거예요?”

  

“.....”

  

“부장.”

  

“.....”

  

말없이 가만히 있는 모습에 이름을 불러볼까 싶었지만, 현재 상태에서는 선을 조금 넘어갈 것 같다.

  

“근데 방금 한숨 쉬었어요?”

  

“.....”

  

“왜? 마주치니까 좋아서요?”

  

내게 좋은 쪽으로 답을 유도하려고 하니 꿈틀하는 렌카.

씨익 웃은 내가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가자,

  

“읏...!”

  

짧고 작은 탄성을 토해낸 그녀의 목에 힘이 빡 들어가는 게 보였다.

  

“왜 대답을 안 해요?”

  

“하, 할 얘기가 없으니까 그렇지...”

  

할 얘기가 왜 없어. 수두룩하기만 한데.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잘 들어갔어.”

  

“스승님이랑 뭐했어요?”

  

“쇼핑.”

  

“옷 샀어요?”

  

“아니.”

  

“그럼 모모님 굿즈?”

  

“아니.”

  

“계속 단답형으로만 대답해보세요.”

  

“.... 그, 그냥 스티커 사진 찍고... 아이쇼핑만 하다가 디저트 먹으러 갔어.”

  

꼭 매를 맞아야 말을 들어요.

아니지, 여기서는 렌카가 잘 조교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오늘도 봐줬다. 너그러운 주인님의 마음씨에 고마워하여라.

  

“스티커 사진? 한 번 봐도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싫어.”

  

“부장이 안 보여줘도 어차피 스승님한테 보여 달라고 할 건데요.”

  

“그럼 치나미한테 보여 달라고 하면 되지.”

  

“지금 보고 싶으니까 부장이 보여줘요. 소원도 미뤄...”

  

‘소원’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렌카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이, 이거 봐...! 생색 내지 말라니까 막...”

  

“생색이 아니라 호의를 베풀어줬으니까 보여줄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려 했던 건데.”

  

“그게 생색이야...!”

  

“그런가? 어쨌든 보여줘요. 그럼 귀찮게 안 할게요.”

  

“.....”

  

무어라고 꿍얼거린 렌카가 자신의 외투 안쪽을 뒤적거리더니 휴대폰을 꺼내, 그 뒷면을 내게 보여주었다.

  

“자.”

  

한 장의 스티커 사진이 케이스 안쪽에 딱 붙어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동요 율동을 하듯 양손을 어깨 위로 올린 치나미였다.

포즈가 치명적일만큼 귀엽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져.

  

그리고 렌카는... 정말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치나미의 뒤에 서있다.

밝기를 보정한 얼굴 양옆에 아기자기한 병아리 캐릭터를 집어넣어놓았는데, 의외로 어울린다.

나름 깜찍해보여.

  

“됐지?”

  

빤히 사진을 보고 있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렌카가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나도 노예랑 사진 찍고 싶다.

방학 때 같이 알바를 하면서 사이가 더 가까워지면, 퇴근시간에 찍자고 들이대봐야지.

  

“됐어요. 예쁘게 잘 나왔네요.”

  

“.... 이제 귀찮게 하지 마.”

  

“알았어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렌카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그러자 렌카가 의아한 투로 날 불렀다.

  

“야, 너 어디 가?”

  

“가려고요.”

  

“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아니... 조용히만 하고 있으면 되는데... 그냥 다시 일해. 나 금방 갈 거야.”

  

자신 때문에 일을 하다 말고 돌아가는 게 미안했던 건가?

아니면 싫은 척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간다니까 허전했던 건가?

현 렌카와의 사이를 고려하면 전자일 가능성이 조금 더 높긴 하지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다.

  

“알았어요. 그런데 부장.”

  

“왜.”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 다음 권 나온다는데 알고 있었어요?”

  

“.... 전혀 몰랐는데? 그걸 내가 왜 신경 써?”

  

얼굴을 보아하니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책이 퍽 마음에 들어서 한 번 확인해봤겠지? 알만하다.

  

“재미있었다길래 찾아본 줄 알았지.”

  

“애초에 취미도 아닌데 찾아볼 이유는 없잖아. 근데 귀찮게 안 한다며? 일이나 해.”

  

“그럽시다.”

  

시큰둥하게 대답한 나는 다시 창고 안으로 돌아와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렌카 또한 오늘 대련을 준비하려는지 호구가 놓여있는 곳으로 가서 장비 상태를 체크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려오는 창고에서 각자의 일을 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일을 대부분 끝낸 내가 이제 교실로 돌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렌카가 돌연 날 돌아보며 물었다.

  

“감독님한테 팁 받았다며?”

  

“예.”

  

“머리에 잘 새겨놔. 감독님의 조언은 너한테 무조건적으로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려고요.”

  

귀찮게 하지 말라더니... 막상 조용한 곳에서 함께 있다 보니 침묵이 어색해졌나보다.

저런 당연한 얘길 하는 걸 보면.

은근하게 눈치를 보면서 주뼛대고 있는 렌카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피식한 나는 창고 문을 열었다.

  

“전 다 했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잘 가.”

  

“부장은 안 가요? 곧 수업시간인데.”

  

“난 아직 할 거 남아서.”

  

“그래요 그럼. 부활동 시간에 봐요.”

  

“응.”

  

얌전한 렌카의 대답을 듣고 창고를 나간 나는 교실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요즘 할 게 너무 많아진 느낌이라고 말이다.

  

곧 다가올 쓰리섬은 물론 대회도 신경 써야하고, 수학여행도 남아있다.

방학 때 본격적으로 렌카를 공략해야하는 것도 그렇고... 확 바빠질 시기인가?

열심히 달려보자.

“후배님.”

  

“예, 스승님.”

  

“오늘 점심에 하나자와 후배님과 복숭아를 먹었는데, 후배님은 쏙 빼놓아버렸어요.”

  

아, 그래서 미유키가 잠깐 없어졌던 거였구나.

근데 약 올리냐 지금?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할 필요는 없단 말이야.

  

“잘했습니다. 맛있게 먹었어요?”

  

“네.”

  

“그럼 됐죠. 미유키랑 무슨 얘기했어요?”

  

“넷...? 그,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흠칫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치나미.

여자들만의 비밀 같은 대화였나보다.

  

무슨 얘길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쓰리섬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닐 거다.

그랬다면 치나미의 눈빛부터가 달랐겠지.

  

“알겠습니다. 크리스마스에 뭐할 거예요? 늦잠?”

  

“늦잠이라니요? 올해 크리스마스가 주말이었던가요?”

  

그러고 보니 일본에선 크리스마스가 휴무가 아니었지.

신성모독이다. 아니, 너무 나갔구나.

  

“생각해보니까 평일이네요.”

  

“그러면 등교를 해야겠지요.”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는요?”

  

“으음... 글쎄요. 렌카와 놀러가지 않을까요?”

  

“계획이 없나보네요.”

  

“일단은 그래요. 아직 크리스마스까진 조금 남아있기도 하니까요.”

  

치나미가 가장 친한 렌카와 매일 붙어 다니는 것에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만큼은 개입을 해야 한다.

넌 나, 그리고 미유키랑 놀아야 돼.

  

턱을 치켜든 채로 날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앞머리를 살살 털어준 내가 물었다.

  

“제가 준 장갑은 왜 안 끼는 건가요?”

  

“앗, 현재 모모님 자수를 붙이고 있어서 그래요. 꼼꼼하게 붙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시간이 조금 걸리고 있네요.”

  

“그렇습니까?”

  

“다 붙이면 후배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릴 생각이에요.”

  

“기특하네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내가 삐죽 튀어나와있는 치나미의 윗머리를 살짝 내리눌렀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것치고는 다소 과장된 반응.

요상한 망상을 하는 모양이다.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혹시 치나미가 테니스부였으면 어땠을까.

짧은 테니스 치마를 입고 호럇! 하며 라켓을 휘두르는 모습... 상상하니 예뻐 보인다.

밤에도 테니스복을 입은 채로 앙앙거리는 그녀를 상상하니 욕구가 막 차오른다.

  

“스승님, 잠깐 이쪽으로 와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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