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 어디로요?”
의아해하는 치나미의 손목을 잡고 도복 사이로 들어간 나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믑!”
몸을 크게 달싹이며 꽉 막힌 탄성을 터뜨리는 그녀.
다짜고짜 들이댄 스킨십에 당혹스러워하던 그녀는, 곧 까치발을 들며 자신의 얼굴을 내 얼굴과 잘 맞추었다.
빨랫줄에 널린 옷 사이에서의 애정표현.
러브 코미디 후반부의 정석적인 애정 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남자주인공의 속내가 음흉하기 짝이 없고, 그저 입만 맞추는 게 아니라 혀까지 들이민다는 게 조금 문제긴 하다.
“헤웁...!”
여자주인공도 문제구나. 금방 달아올랐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내게 몸을 붙여오고 있다.
러브 코미디가 아니라 성인물이라고 하자.
그렇게 순식간에 후끈해진 분위기를 즐기던 우린,
덜컥.
건조실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오자 재빨리 서로의 입을 떼어냈다.
“치나미, 감독님이 부르시는데 여기 있지?”
방해꾼 렌카가 들어왔구나.
왜 안 오나 했다.
“늣... 네에...! 저 여기 있어요...!”
힘없이 손을 든 치나미가 도복 사이를 지나 렌카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렌카는, 치나미의 잔뜩 상기된 얼굴과 행동을 보고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 무, 뭐야? 너 뭐한 거야...?”
도복 소매로 자신의 입가를 닦아내는 치나미, 건조실 도복 사이사이로 얼핏 보이는 내 얼굴...
여기까지 봤는데 치나미와 내게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면 머리가 모자란 거지.
“으흠... 감독님이 부르신다구요...?”
“아, 응...”
“그렇다면 얼른 가봐야겠네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의젓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렌카의 등허리를 토닥인 치나미가 건조실에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렌카는,
“야...!”
이를 악 물고는 내게 다가와 꼿꼿하게 섰다.
날 지그시 노려보는 그녀와 눈싸움을 하고 있자니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든다.
왜 하렘이 낀 러브 코미디는 히로인들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도 감수하면서 한 명 한 명씩 따로 공략을 할까?
독자들의 히로인 선호도를 신경 쓰거나 달콤한 둘만의 이벤트를 넣으려는 것도 있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도 큰 축을 차지할 것이다.
한 히로인이 다른 히로인과 주인공의 달달한 장면을 본다?
상식적인 상황이라고 하면 전개를 이어나가기가 무척 힘들어지겠지.
어찌 넘어간다고는 해도 독자들이 임자 있는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히로인을 안타깝게 여길 테고.
그래서 파트를 나눠서 공략을 하거나, 지금처럼 교내에서 스토리가 이어질 경우 히로인들의 머리를 하향시키거나, 혹은 천연 속성을 집어넣거나, 하렘에 관대한 성향을 집어넣는 것이리라.
아니면 세계관 자체에 판타지적인 요소를 넣거나, 남자 주인공을 빼앗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히로인을 넣는 경우도 드물게 있다.
갑작스레 떠오른 고찰을 끝낸 내가 렌카를 턱짓했다.
“왜요?”
“네, 네가 치나미와 그... 좋은 관계인 건 아는데... 부실 안에서는 자제하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 일 없었는데?”
“시치미 떼지 마...! 분명히...”
“분명히 뭐?”
“.....”
직접 말하기엔 얼굴이 화끈거려서 못하겠지?
야한 쪽으로 관심이 있게 생긴 건 히로인들 중에서 히요리와 투탑을 달리는 주제에, 실상은 제일 부끄러워하네.
그게 네 매력 중 하나이긴 하지.
“그리고 무슨 일이 있으면 뭐 어떤가요? 남들이 보는 곳에서 한 것도 아니고, 부실 안엔 서로 애정표현을 자제하라는 규칙도 없잖아요.”
“풍기문란행위를 금지한다는 규칙이 있는데 없긴 왜 없어...!”
“에이... 풍기문란은 남녀 간의...”
“잠깐...! 그만...! 천박한 짓은 하지 마...!”
허리를 튕기는 몸짓을 보여주려고 하자, 렌카가 마구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날 쏘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풍기문란은 그런 것뿐만이 아니야...”
“그럼 뭐에요?”
“.... 아, 아무튼 자제해줬으면 해.”
싫은데. 계속 할 거다.
다음 학기 땐 너랑도 할 거고.
어깨를 으쓱인 나는 대충 렌카에게 수긍해주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근데 부장.”
“아니, 싫어. 거절할게.”
“예? 제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벌써 대답을 하는 거예요?”
“네 그 ‘근데 부장’이라는 말 뒤엔 꼭 이상한 주제가 튀어나오잖아.”
거기까지 머리에 각인된 거야? 기쁘잖아.
상으로 하트 모양 니플패치를 붙여주마.
“그랬나요?”
“그랬어. 어쨌든 일해.”
“일 다 했는데.”
“더 해. 찾아서 해.”
“찾아서 하라니... 악덕사장의 표본이시네요. 꼰대가 따로 없어요.”
“시끄러. 일해. 일하라고.”
“같이 해요 그럼.”
“같이 하면 입 다물 거야?”
“한 마디도 안 하고 일할게요.”
“좋아. 마른 도복 다 걷어.”
“그럽시다.”
흔쾌히 대답을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렌카가 무어라 꿍얼거리더니 나와 멀찍이 떨어져선 널린 도복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혼자 일을 시키려고 할 줄 알았는데 같이 해주긴 하네.
우리 렌카... 많이 착해졌다. 흐뭇한 미소가 피어나려고 해.
“뭘 재수 없게 웃고 있어? 일하라니까?”
앙칼진 건 여전하다. 사나운 암캐 같은 것.
**
월말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학생들의 크리스마스 언급 빈도가 많아졌다.
그리고 그건 테츠야도 마찬가지였다.
“미유키. 크리스마스 저녁에 뭐해?”
내가 엎드려있는 사이, 테츠야가 조용한 목소리로 미유키에게 사생활을 물었다.
“크리스마스에?”
“응. 시간 괜찮으면 가족들이랑 같이 저녁 먹을 거지?”
저 새끼 또 또 지랄하는 것 좀 보라.
히로인들에게 직접적인 관심을 주는 걸 두려워하는 폐기물 주제에 왜 크리스마스를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가족까지 들먹이면서, 미유키가 승낙하리라고 확신하는 듯한 말투로 내 속을 긁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가족식사는 테츠야와 미유키네의 연례행사긴 하다.
매년 크리스마스 저녁에 같이 밥을 먹고, 두 사람은 따로 빠져나와 주변을 산책하거나 영화를 보러 가고는 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르다.
테츠야는 크리스마스 때 혼자 있게 될 거다.
어쩌면 미유키 없이 미유키네 가족들과 식사를 하게 될지도 모르지.
곧장 일어나 놈에게 꺼지라고 말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미유키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 듣고 싶어서였다.
“음...”
잠깐 고민하는 듯한 감탄사를 터뜨린 미유키가 말했다.
“올해는 안 될 것 같아. 나 크리스마스에 선약 있거든.”
“선약? 누구랑?”
콕.
내 등 한부분에서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찌르는 촉감이 느껴졌다.
미유키가 행동으로 대답을 한 것이다.
선약은 나와 했다고.
“마츠다랑?”
“응.”
“아... 진짜? 가족식사까지 빼면서?”
“올해는 힘들 것 같아. 미안해.”
잘 타이르는 듯 하고는 있지만 그 속에 단호함이 묻어있는 말투다.
대놓고 나와의 사이를 드러낸 미유키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미치겠다.
오늘 집에 가지 말라고 해야지.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혹시라도 시간 나면 연락해줄래?”
테츠야의 말투가 팍 죽어버렸는데, 놈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고 싶다.
지금 일어날까? 아니다, 조금만 더 재봐야지.
그나저나 어떻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찌질함이 묻어나올 수 있을까.
저것도 능력이다. 저딴 새끼를 내가 컨트롤하면서 이입하고 있었다고?
수치스럽다.
“그럴게. 그리고 식사는 다음에도 할 수 있잖아. 매년 같이 하던 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게 아니라 연말을 기념하는 식사였으니까... 그치?”
어떻게든 테츠야를 달래주려는 미유키가 안쓰럽다.
테츠야를 향한 미유키의 정나미를 뚝 떨어뜨려야하는데, 저번에 놈이 말실수를 했을 때와 비슷한 기회가 또 없을까?
“물론이야.”
대답은 의연하게 하고 있었지만, 테츠야는 지금 속이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크리스마스 전후 날에 날짜를 잡아서 식사를 하면 어떨까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튀어나오기 직전까지 왔을 것 같다.
하지만 미유키가 날 끼게 할까봐 무서워서, 지금은 말을 아끼고 있을 테지.
저녁에 따로 개인톡을 보내면서 물어보거나 하려나?
그때 미유키가 날 언급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할 게 분명하다.
다소 과한 생각 같지만, 내가 아는 테츠야라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놈은 아마 소꿉친구와의 오붓한 자리에 내가 끼어들어서 원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훔친 사람이 싫은 건 당연하다.
물론 내가 미유키를 공략하는 사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지가 직접 자초한 일이긴 하지만, 테츠야는 자기 자신이 아주 한심하다는 걸 모를 테니 이해를 바라는 건 요행이다.
‘병신.’
속으로 테츠야를 매도하던 나는, 더 이상 놈의 집착이 보기 싫어져 상체를 스르륵 일으켰다.
그리고는 막 잠에서 깬 척 미유키를 쳐다보았다.
“일어났어?”
“어. 떠들려면 구석 가서 해라.”
“미안. 얼른 다시 자. 수업 시작하면 깨워줄게.”
온화한 투로 내 등을 토닥이는 미유키를 보면서, 테츠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일본에서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큰 기념일이라는 건 타 국가와 똑같다.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라는 날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테츠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쳐봐라.
대신 나와 미유키가 뭘 하는지 궁금해서 전화 같은 걸로 방해하려고 하지는 말고, 그냥 울부짖으면서 물봉딸이나 쳐라.
히로인에게 들이댈 용기조차 없는 넌 그럴 운명이란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날.
여느 때처럼 미유키를 내려준 나는 치나미의 맨션으로 향했다.
근처 공영주차장에 내려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 컴컴하다.
겨울인 걸 감안해도, 오늘 해가 지는 속도가 특히나 더 빠른 것 같다.
외투를 여며 쌀쌀한 바람으로부터 목을 보호한 나는, 인도를 걸으며 치나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스승님, 시간 돼요? 지금 스승님 집 근처인데.]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앗, 그러면 맨션 맞은편에 작은 공원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날까요?]
[예. 날씨가 추우니 따뜻하게 입고 내려오세요.]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치나미와의 대화는 어떤 방식이든 말랑말랑하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녀의 말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픽 하는 웃음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집어넣은 나는 치나미가 알려준 공원으로 갔다.
입구가 많이 낡아있다. 오래 된 장소인가?
꽤나 운치가 있어 보여서 마음에 든다.
틱.
입구에서 치나미를 기다리고 있는데, 머리 바로 위에 있는 가로등이 켜졌다.
몇 번 점등하다가 완전한 흰 빛을 내리쬐는 등이 분위기를 살려주고 있다.
치나미가 멀리서 날 보면 마음에 들어 하려나?
툭.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다시 꺼져버리는 가로등.
어이가 없는 실소를 터뜨린 나는 상념을 날려버리고 얌전히 치나미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둑한 곳에서 발등을 툭툭 건드리며 치나미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얍!”
내가 있는 가로등 밑으로 치나미가 휙 하며 점프를 하자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발소리를 못 들었지? 아마 차가 지나다니는 소리에 묻혀서인가보다.
내 미적지근한 반응이 의외였을까?
고개를 갸웃한 치나미가 물었다.
“으응? 놀라지 않으셨나요?”
내가 겁이 좀 많긴 하지만, 등장 대사부터 시작해서 행동까지 저러는데 누가 놀라겠냐고.
심지어는 복장까지 분홍색 후드다.
변신 히어로물의 정말 하찮은, 개그를 유도하는 엑스트라 빌런보다도 더 약해보여.
“음... 딱히 놀랍진 않네요.”
“흠. 다음번엔 더 노력해볼게요.”
여기서 노력한다고 해봐야 얼마나 발전할까 싶지만 뭐...
괜한 말로 치나미의 희망을 짓밟지는 말자.
“기대하고 있을게요. 잠깐 걸을까요?”
“네, 좋아요.”
나란히 공원으로 진입한 우리.
공원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운치가 좋긴 하지만 볼 게 나무와 풀 뿐이라서 그런가보다.
날씨가 춥기도 하고 말이다.
“스승님.”
“네?”
앞서나가다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리는 치나미.
청바지 위로 보이는 토실토실한 엉덩이가 매력적이다.
마치 꽃에 얼굴을 파묻고 둔부만 내보이는 꿀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