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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89화 (189/313)

  

치나미에게 이리로 오라며 손짓을 하자, 그녀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후드 소매에 자신의 손을 집어넣으며 우물쭈물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 치나미에게 방긋 웃어보인 내가 물었다.

  

“왜요?”

  

치나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중저음으로 낮게 깔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은 모양.

미유키든 렌카든 치나미든 이 저음 톤을 무척 좋아하는데, 축복이라도 받았나 싶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긴.

너 지금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소맷단을 입으로 가져가 잘근잘근 깨무는 것을 보니 야한 상상을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조금만 더 가까이 오실래요?”

  

그 말에 치나미가 한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티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자그마한 보폭으로 말이다.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나는 직접 치나미의 코앞까지 다가가, 추위로 인해 벌겋게 된 그녀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이후 그녀를 조심스레 끌어안으며 말했다.

  

“저는 욕심이 아주 많습니다.”

  

“.... 네... 그런 것 같네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시죠?”

  

“그야... 후배님이 직접 말씀하셨으니까요...?”

  

나는 엉뚱한, 그러나 자신다운 대답을 하는 치나미를 품 안에 집어넣고 외투를 닫았다.

  

“으먑...”

  

그와 동시에 기이한 탄성을 터뜨린 그녀가 몸을 꿈틀거렸다.

빠져나오려 노력하다가 안 되겠는지 얌전히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 건 덤.

나는 외투 깃 사이로 쏘옥 빠져나온 그녀의 머리 위에 턱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크리스마스에 저랑 미유키랑 놀래요?”

  

“.... 크리스마스에요...?”

  

“예.”

  

“하나자와 후배님이랑...?”

  

“예.”

  

“왜요...? 두 분이서 놀지 않구요...?”

  

“말씀드렸다시피, 전 욕심이 많아서요. 그날 약속 잡지 마세요.”

  

“.....”

  

“알았죠?”

  

“새,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되나요...?”

  

저번에 개인적인 연락을 나눈 이후 따로 꽤 친해진 느낌이던데...

미유키에게 한 번 물어볼 생각인 건가?

뭐가 됐든 둘이 더욱 가까워지면 나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네...”

  

미유키에겐 야동 같은 얼토당토않은 방법으로 넌지시 취향 이야기를 꺼냈고, 어찌 통하긴 했지만 치나미에게는 그런 걸 해선 안 된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그쪽 방향으로 유도해보는 것으로 가닥을 잡자.

  

이게 똥볼이 될지 유효슈팅이 될지는 모른다.

내가 여자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할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의지대로 밀어붙이는 게 낫다고 본다.

  

‘머리가 아프다.’

  

아무런 생각 없이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싶은데, 신경 쓸 게 너무 많다.

이런 복잡한 건 딱 질색이지만 뭐 어쩌랴.

러브 코미디물에서 흔히 나오는 분양 엔딩, 유기 엔딩 따윈 없이 어떻게든 하렘을 만들려는 게 내 목표인데... 여기서 더 이기적이고, 과감해져야지.

  

**

  

다음날, 체육시간.

추운 날에 굳이 공놀이를 하라며 우릴 운동장으로 내보낸 교사에게 속으로 툴툴거린 나는, 구석 스탠드로 가서 벌러덩 누웠다.

  

그리고는 배구를 하고 있는 미유키와 그녀의 친구들을 감상했다.

예쁜 애 옆에는 예쁜 애만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다.

  

빵녀는 음침하고 얼빵하지만 병약한 미소녀 느낌을 풍기고, 부반장은 안경만 벗으면 나름 상큼할 것 같고...

나머지도 평균 이상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체육복이 브루마가 아닌 건 아쉽지만 겨울에 그걸 입혀버리면 건강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 넘어가자.

그렇게 편한 자세로 배구를 하고 있던 여학생들을 구경하던 나는,

  

휘이익-!

  

농구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 쪽으로 날아오자 피식했다.

옛날 클리셰를 죄다 때려 넣은 도키아카에 이런 이벤트가 없으면 섭하지.

여학생들이 실수로 튕긴 농구공이 아니라, 남학생들의 것인 게 문제지만.

  

파앙-!

  

나는 대충 팔을 휘저어 공을 튕겨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근처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 남학생들을 바라보았다.

  

“뭐냐?”

  

그러자 서로의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무리 중에서, 테츠야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스탠드로 올라와 내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 패스하다가...”

  

패스를 얼마나 세게 했으면 농구대에서 1미터 정도 높은 스탠드까지 날아오냐?

설마 이 새끼... 일부러 던진 건 아니겠지?

하도 이상한 짓만 하는 놈이다보니 가타부타 이런 의심부터 든다.

  

만약 진짜로 일부러 이런 거라면, 테츠야는 스스로 조연... 아니, 엑스트라를 자처한 꼴이 된다.

주인공을 물 먹일 생각으로 눈 먼 공을 던지고, 주인공은 간단하게 그 공을 받거나 튕겨내는 모습...

딱 완벽한 주인공에게 질투심을 가진 엑스트라나 할 법한 행동이잖아.

  

스탠드 벽에 튕겨져 데구르르 굴러오는 공을 잡은 나는, 그것을 테츠야에게 휙 던져주었다.

  

“조심해라. 자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냐?”

  

“미안,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오냐.”

  

심드렁한 투로 대답을 하고 다시 스탠드에 눕자, 양손으로 공을 저글링하듯 튕기던 테츠야가 그것을 동급생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리고는 내 머리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려 했다.

  

“엉덩이 치워라. 냄새난다.”

  

대놓고 혐오감을 드러내니, 테츠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뻐끔거리던 놈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농구대로 향했다.

  

오늘은 사람 긁는 사족을 붙이지 않는구나.

저번에 미유키가 나와 크리스마스 약속을 잡았다고 한 이후,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나?

아니, 테츠야에게 그 정도의 상식이 있다고 기대하면 안 되지.

  

“마츠다 군, 일어나봐.”

  

눈을 감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던 내 귀에, 미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한쪽 팔을 위로 흐느적 내밀자, 미유키가 헛웃음을 치더니 낑낑거리며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후 배구를 하느라 이마에 맺혀있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고는, 허벅지를 오므린 채로 내 옆에 앉았다.

  

“테츠야 군이랑 무슨 얘기했어?”

  

“아무 얘기 안 했어.”

  

“뭐라고 말하고 있던데?”

  

“스토킹한 거냐?”

  

“아 무슨 스토킹이야...! 그냥 눈길이 가니까 본 거지...”

  

“왜 눈길이 갔는데?”

  

“추운 날 스탠드에 누워있으니까.”

  

“그게 뭐 어때서?”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잖아? 바닥도 엄청 차가울 텐데...”

  

“그렇긴 하지. 배구는 끝났냐?”

  

“응. 이겼어.”

  

“잘했다. 내기 같은 건 안 했고?”

  

그 말에 미유키가 힘없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들이 언급은 했는데, 내가 하지 말자고 했어.”

  

“왜?”

  

“물론 내기를 하면 더 재미있게, 열정적으로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다 격해질 수도 있잖아. 당장 모레가 크리스마스인데 누군가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

  

우리 미유키는 항상 생각이 깊다.

베풀 줄 아는 사람이야.

  

“근데 마츠다 군.”

  

이어지는 미유키의 목소리 톤은 약간 낮아져있었다.

진지한 얘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제대로 경청해줘야겠다.

  

“어.”

  

“딱 한 번이라고 했던 약속 기억하지?”

  

앞뒤 맥락이 빠져있긴 하지만,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쓰리섬에 관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 내가 대답했다.

  

“알아.”

  

“응... 그럼 됐어.”

  

내 허벅지를 툭툭 두드린 미유키가 시간을 보더니, 학생들에게 공을 정리하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미유키가 굳이 오늘 이러한 얘기를 한다는 건... 그녀 또한 각오를 했다는 뜻.

다시 다짐하는 거지만, 쓰리섬이 끝나면 한동안 잘해줘야겠다.

근데 내가 잘 해주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후배님.”

  

“예, 스승님.”

  

“제가 심사숙고해보았는데, 후배님, 그리고 하나자와 후배님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다는 결론이 도출되기에 이르렀어요.”

  

이 기계적인 말투는 뭐지? 색다르다.

  

“그래요?”

“네. 하지만 저는 렌카와도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홀로 외롭게 있는 렌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후배님과 하나자와 후배님만 괜찮으시다면 늦은 시간에 만나도 될까요...? 제가 두 분이 있는 곳으로 갈게요.”

  

늦은 시간이라... 왠지 묘하게 들린다.

  

“물론 괜찮습니다.”

  

“다행이에요. 그런데 만나서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아 간단하게 맥주를 한 잔 하려고 합니다.”

  

“낫... 맥주요?”

  

“예. 혹시 드셔본 적이 없나요?”

  

“가끔...? 자주 마시지는 않아요. 가끔가다 렌카가 술이 당길 때가 있거든요? 그때 간단하게 하는 정도에요.”

  

아예 마신 적이 없다고 하면 몰라도, 그 정도라면 괜찮을 것 같다.

계획대로 하자. 적당한 취기는 용기를 내는데 도움이 되겠지.

미유키나 치나미는 물론, 그리고 나도.

  

“딱히 마시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고요?”

  

“네. 괜찮아요.”

  

“그럼 됐네요. 그렇게 결정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치나미의 말투는 꽤나 경직되어있었다.

매번 동성 친구와 크리스마스를 보내다가 남자와 보낸다고 하니 긴장한 건가?

아니, 어쩌면 머릿속으로 야한 일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치나미는 변태니까.

  

긴장을 풀라는 뜻으로 치나미의 뒷머리를 사근사근 쓰다듬어준 나는, 프힣... 하는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총총걸음으로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후 산책을 할 겸 동산을 올라가다가, 벤치에 앉아있는 렌카를 발견했다.

  

또 혼자서 휴대폰을 보고 있다.

새로운 피규어라도 떴나? 아니면 만화를 보고 있는 건가?

아주 조심스럽게 렌카의 뒤로 접근한 나는 그녀가 뭘 하는지 확인해보았다.

  

[아키하바라 프라모델 매장에서 알바 구합니다.]

[시급 1000엔, 하시는 일은 계산, 정리, 프라모델 조립 도우미에요. 이쪽에 지식이 있으신 분을 우대합니다.]

  

[피규어에 관심 많으신 분!]

[피규어를 제 몸처럼 소중히 다루실 수 있으신 분은 저희 매장으로 오세요! 복리후생 업계 최고수준! 지원은 이쪽 링크로!]

  

[알바 구함]

[홀서빙, 남녀무관, 20세 이상, 시급 1200엔, 최소 3개월.]

  

알바 구인 공고를 보고 있었구나.

렌카답게 서브컬처계 알바를 우선적으로 찾고 있다.

장난기가 생긴 내가 렌카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대고는 물었다.

  

“알바하려고요?”

  

“흐아아악!!”

  

양팔을 위로 번쩍 들며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는 렌카.

귀신이라도 본 양 몸서리를 친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무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죄송합니다. 그렇게 심하게 놀랄 줄은 몰랐네요.”

  

“하아... 하아... 야! 왜 남의 휴대폰을 함부로 봐!?”

  

그게 중요한 거였어?

하긴, 너한테는 그럴 만도 하지.

  

“함부로 본 게 아니라 저절로 눈이 간 건데.”

  

“몰래 다가와서 봤으니까 함부로 본 거지!”

  

“그러네요. 근데 웬 알바에요? 홀서빙 하려고요?”

  

일부러 피규어 매장 알바를 언급하지 않고 홀서빙 공고부터 본 척 연기를 하자, 표정이 다소 누그러진 렌카가 대답했다.

  

“어.”

  

“왜요?”

  

“왜냐니... 학생들이라면 흔히들 하잖아. 방학 때 용돈벌이 알바.”

  

“그렇긴 하죠. 근데 알바를 하려면 삼촌네 가게에서 하는 게 더 낫지 않아요?”

  

“가끔 도와주러 가는 정도면 괜찮지만 매일 하기엔 너무 멀어.”

  

“숙식을 거기서 하면 되잖아요.”

  

“난 내 집, 내 방이 아니면 잠을 잘 못 자.”

  

“저번에 호텔에서는 잘만 자놓...”

  

“그만! 그만!”

렌카가 다급하게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호텔을 언급하니 창피한 기분이 든 모양.

여느 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이 있나 없나 확인해본 그녀는, 팔짱을 낀 채로 부실을 턱짓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일해.”

  

“저번부터 계속 그러시네. 일은 다 했는데.”

  

“다 했으면 연습해. 대회가 코앞인데 미적댈 시간 있어?”

  

“그럼 내려치기 봐줘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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