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난 상단세 잘 모르는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하지 말고요.”
“.....”
인상을 팍 찡그리는 그녀.
콧등에 주름이 살짝 생기는 모습이 귀엽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그녀는,
“좋아. 자세 잡아봐.”
연습을 하겠다는 날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결국 제안을 승낙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장은 부장이구나.
소외된 부원을 가만둘 수 없어 챙겨주는 참 리더... 감격스럽다.
반쯤은 억지로 챙겨주는 거긴 하지만 뭐 어때. 챙겨주기만 하면 된 거지.
**
“메리 크리스마스.”
미유키를 데리러 온 내게, 미도리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왔다.
여전히 풍만한 그녀의 선물주머니를 흘끗거리며 차에서 내린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기념일 잘 보내세요, 아주머니.”
“고마워. 오늘 늦게까지 놀 예정이니?”
그 말에 미유키가 미도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며시 찔렀다.
“아 엄마...! 왜 사람 면전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해...!”
“뭐 어때? 그냥 크리스마스니까 늦은 시간까지 노는 거냐고 물어보기만 하는 것뿐인데. 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가만 보면 미도리의 장난기도 카나만큼 심하다.
갑자기 미도리의 학창시절이 궁금해진다.
인기가 엄청 많았으려나?
와타루는 평범하게 인자한 인상이지만 그 속에 중후함이 섞여있는 걸 보면, 그 또한 어렸을 때 평균 이상으로 생겼었을 것 같다.
아니면 어딘가 특출난 면이 있거나.
확실한 건, 와타루가 테츠야 포지션의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미도리와 결혼하지도 못했겠지. 이건 당연하다.
방글방글한 미소를 지은 나는 어머니와 티격거리기 시작한 미유키를 만류하고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께서 빨리 보내라고 말씀하시면 빨리 보내겠습니다.”
“아냐. 느긋하게 놀다가 와.”
‘느긋’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착각일까?
“그럼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여유를 가져야 돼. 알았지?”
착각이 아니었구나.
유부녀가 이렇게 야하면 자꾸 나쁜 마음이 드는데... 참아야한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름 의미심장한 대화를 끝내고 미유키를 차에 태우고 아카데미로 향한 나는,
“어?”
차에서 내린 미유키가 고개를 치켜든 채 의아한 탄성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네?”
그 말마따나 하늘에선 두툼한 눈송이가 몇 개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대여섯 송이만 내리던 눈은, 곧 함박눈으로 변해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어?”
“와아...!”
주위에서 다른 학생, 교사들의 상기된 감탄사가 크게 들려올 정도로, 눈은 갑작스레, 그리고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기세를 잃지만 않는다면 부활동이 끝날 때쯤엔 많이 쌓여있을 것 같다.
“마츠다 군, 이거 봐.”
뻗은 손바닥 가운데로 떨어진 큼지막한 눈꽃을 내게 보여주는 미유키.
체온으로 인해 사르르 녹아내리는 눈을 빤히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예쁘게 생긴 눈이네.”
“응. 저녁에도 이렇게 내렸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일기예보 봤어?”
“아니.”
“근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러브 코미디물의 주인공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때의 기본 옵션이니까 확신할 수 있지.
“그냥 알아.”
그리 말한 나는 미유키의 밝은 갈색머리 위에 그녀의 보온용 털장갑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러자 미유키가 장갑 안으로 자신의 가녀린 손가락을 들이밀더니 물었다.
“오늘 되게 감성적이네?”
“그래 보이냐?”
“응. 들어가자.”
밝게 웃는 미유키의 입술을 덮치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면서, 나는 그녀와 함께 교정을 가로질러갔다.
그러다 저 멀리서부터 학생회장이 미유키를 부르자 인상을 찌푸렸다.
“미유키! 마침 잘됐다, 잠깐 이쪽으로 좀 와줄래?”
왜 오붓한 우리 둘 사이를 방해하려는 거지?
무릎을 꿇린 다음 저 동그란 안경에 허여멀건한 씨즙을 뿌려버리고 싶구나.
“아, 네! 갈게요! 마츠다 군, 먼저 들어가. 이거 혼자 먹지 말구.”
자신이 들고 있는 곰돌이 젤리를 내 손에 쥐어준 미유키의 말.
속으로 한숨을 내쉰 나는 그녀의 가방을 가리켰다.
“가방 줘 그럼.”
“알았어. 고마워.”
재빨리 가방을 벗고 내게 건넨 미유키가 후다닥 학생회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미유키를 지켜본 나는, 그녀의 가방을 앞으로 매고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기다가 교문으로 들어오는 치나미와 렌카를 보며 히죽 웃었다.
“엇!? 후배님! 메리 크리스마스에요!”
자신들 쪽으로 오고 있는 날 발견하고 손을 마구 흔드는 치나미.
텐션이 잔뜩 올라가있는데, 눈 때문인 것 같다.
그 옆에 렌카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긴 했지만, 속에 상기된 기색이 담겨져 있었다.
쿨한 척은 하고 있지만 그녀도 함박눈이 좋나보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치나미와 렌카의 곁으로 간 내가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부장도요.”
좋은 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 싫었던 걸까?
고개를 끄덕인 렌카가 나름 진정된 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도 잘 지내봐요.”
“아직 새해 아닌데?”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앞에 맨 가방은 뭐야?”
“이거? 미유키 거예요.”
“심부름 잘하네?”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스승님은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이네요?”
그 말에 치나미가 자신의 머리에 묻어있는 눈을 훌훌 털어내었다.
“갑자기 눈이 내리는데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부활동 시간까지 눈이 충분히 쌓이면 함께 눈사람을 만들어 봐요.”
“그래요. 부장도 껴서 같이 만들죠.”
“그럴까요? 친우님, 부활동이 끝나기 30분 전에 동산으로 올라오실래요? 다 만들고 같이 사진 찍어요. 어때요?”
순진한 눈망울을 한 치나미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건지, 렌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난 좋아. 그렇게 할게.”
그리고는 은근슬쩍 자신을 끼워버린 날 한 차례 쏘아보았다.
하나도 무섭지 않은 표정이다. 오히려 조교욕구가 마구 솟아오르기만 한다.
어깨를 으쓱이며 렌카의 시선을 넘겨버린 나는, 치나미와 몇 차례의 대화를 더 나누고 교실로 향했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날짜만으로 따지면 오래 걸렸지만, 체감 상으로는 굉장히 짧게 느껴진다.
오늘 하루는 미유키, 치나미가 즐거워하는 걸 목표로 잡자.
낮에도, 저녁에도, 그리고 밤에도.
“너 뭐해? 이글루라도 만들려고?”
눈을 각지게 만들고 있던 내 뒤에서, 렌카가 의아한 질문을 건넸다.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내가 대답했다.
“아뇨. 눈사람 머리 만들고 있잖아요.”
“넌 눈사람 머리가 네모나다고 생각해?”
“네모날 수도 있죠.”
“아닌데?”
“맞는데요. 그렇지 않나요 스승님?”
마침 이쪽으로 동그란 몸통을 굴리며 다가오는 치나미에게 수긍해달라는 듯한 말투로 얘길 하자, 그녀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눈사람도 각각의 개성이 있어야지요. 이참에 몸통도 네모네모하게 만들어봐야겠네요.”
그 말에 렌카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쳤다.
“몸통까지?”
“네. 아예 각진 눈사람으로 만들도록 해요. 두부처럼.”
“난 동그란 눈사람을 원해. 눈사람은 동그래야 해.”
뭐야 그 이상한 고집은?
그냥 내가 만든 눈사람 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트집을 잡는 거지?
이거 담아둔다.
틱틱대는 렌카의 등허리를 살살 토닥여 달래준 치나미가 말했다.
“그러면 이것부터 다 만들고 새 눈사람을 만들면 되지요. 감독님께서도 오늘 쉬엄쉬엄하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시간은 많잖아요. 그렇지요?”
“.... 그렇긴 한데... 눈사람이 네모면 보기가 너무 흉측하잖아...”
“얼굴을 잘 만들면 흉측하지 않을 거예요. 특별히 친우님께 얼굴 디자인을 전부 맡기겠어요.”
“하... 이걸 어떻게 살려... 눈사람이 불쌍해...”
일부러 날 맥이려는 것 같은데... 넘어가주마.
얼굴을 다 만든 나는 렌카에게 눈덩이를 만들어 던져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옷을 빵빵하게 입었다면 해보겠는데, 지금은 도복이 끝이니까 봐준다.
“후배님, 저 위에서 떨어진 나뭇가지를 조금 가지고 오셔주실래요? 일부러 꺾지는 마시구요.”
예의바른 치나미의 부탁에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동산으로 올라 땅에 쌓인 눈을 훌훌 털어내며 나뭇가지를 찾기 시작했다.
위쪽에서 보니 우리 이외에도 밖에 나와 있는 부원들이 더러 있다.
테츠야는 없었다. 아마 대회가 다가오니 안에서 연습에 매진하는 모양이었다.
방해꾼이 없으니 속이 시원하다. 평화로운 분위기야.
이 분위기를 밤, 더 나아가 새벽까지 쭉 이어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눈사람에 붙일 나뭇가지를 가지고 내려왔을 땐, 동그랬던 눈사람의 몸통은 직사각형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렌카는, 몸통 위에 내가 만든 머리를 올려놓은 채로 열심히 눈을 그리고 있었다.
입가를 씰룩거리면서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렌카 또한 이 눈사람 만들기를 즐기는 것 같다.
“다 만들고 나서 마츠다 후배님과 함께 같이 사진을 찍을까요?”
“사진? 굳이?”
“열심히 노력해서 만들었는데 눈으로만 볼 수는 없잖아요.”
“그런가? 알았어.”
“그런데 눈사람의 눈매가 날카롭네요. 입도 한쪽이 살짝 올라가있는 게 굉장히 음흉해보여요.”
“음흉한 애가 만든 머리니까 그에 걸맞게 그려주는 거야.”
“어허...! 친우님...!”
“농담이야.”
새하얀 눈밭 가운데에서 치나미와 함께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에서 소녀소녀한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갑자기 렌카를 빨리 공략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그녀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아무리 공휴일이 아니라지만 특별한 날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거리엔 각 매장에서 설치해두었던 다양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알록달록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미유키와 밥을 먹고 나온 나는, 그녀와 팔짱을 낀 채로 거리를 거닐며 그것들을 구경했다.
“너네 집에도 트리 있냐?”
“우리? 없어.”
“안 꾸몄어?”
“응. 원래는 가족들이랑 같이 놀이터에 가는데...”
“놀이터는 왜?”
“동네 사람들이 거기에 큰 크리스마스 트리를 가져다놓고 장식하거든.”
“오늘은 나랑 만나니까 못가겠네.”
“그렇지.”
“지금도 하고 있나?”
“하지. 왜? 가보려구?”
굳이 거길 왜 가냐.
보기도, 생각하기도 싫은 핵폐기물이 있을 텐데.
“아니.”
“단호하네? 재미있는데...”
내년에 나, 미유키, 치나미, 렌카, 그리고 히요리까지... 이렇게 다섯이서만 하면 되지.
찬란한 미래를 그린 나는 미유키와의 팔짱을 풀고,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러 내 쪽으로 당겨왔다.
“먼저 괜찮은 술집 찾아서 들어가 있자.”
“나나세 선배는 오려면 멀었어?”
“어. 아직 좀 남았어.”
“그래? 그럼 꼬치도 파는 곳으로 가자.”
“야키토리 먹고 싶냐?”
“응.”
“그럴 것 같더라.”
“왜 그럴 것 같았는데?”
“아까 웨이팅할 때 휴대폰으로 꼬치집 찾고 있었잖아.”
“그걸 봤어?”
“봤지. 어깨너머로.”
미유키가 둘러맨 베이지색 목도리를 그녀의 입술 아래쪽까지 바짝 당긴 나는 가게 안이 어둑한, 꼬치류도 파는 술집을 찾아 들어갔다.
크리스마스라 대기를 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4인용 구석 자리가 남아있었다.
그 자리를 낼름 차지한 우린 메뉴판을 보며 야키토리를 비롯한 술안주 몇 가지를 주문했다.
이후 주류를 고르려고 하는데, 미유키가 방글방글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나 하이볼 마시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