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다 입고 봉투를 챙긴 치나미가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오자,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선두에 선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두 사람.
무어라고 속닥거리는데, 내 욕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체크아웃을 한 우린 말없이 차에 탔다.
그렇게 치나미의 집으로 이동하면서, 나는 룸미러를 흘끗거려보았다.
검은 봉투를 품에 꼭 끌어안은 치나미가 눈을 가만두지 못하고 운전석과 조수석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금 찾아온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켜야겠다고 판단한 내가 치나미에게 말했다.
“옷은 잘 맞아요?”
그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고맙습니다... 내일 세탁해서 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저나 미유키가 입지도 못할 텐데, 그냥 스승님이 입으세요.”
“그러면 제가 돈을 드려야...”
“괜찮아요.”
“그래도...”
“정말 괜찮으니 부담 갖지 마세요.”
“.... 그, 그러면 감사히 입겠습니다... 보답으로 다음 주에 최고로 맛있는 복숭아를 가지고 올게요... 하나자와 후배님과 셋이서 먹으면 좋겠네요...”
둘이서가 아닌 셋이서라...
오늘 일이 퍽 나쁘지 않았다고 봐도 될까 싶다.
“그래요. 다음 주에 꼭 같이 먹어요.”
“네에...”
호텔의 위치가 치나미의 집과 가까웠기에, 우린 금방 그녀의 맨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두 분 모두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에서 내려 허리를 구십 도에 가까울 정도로 숙이며 작별인사를 하는 치나미.
나는 나나 미유키의 대답도 듣지 않고 도망치듯 맨션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는 미유키를 향해 운을 떼려는데,
“오늘...”
“다, 당분간은 이 얘기 꺼내지 마...”
그녀가 다급하게 내 말을 끊었다.
이 일을 언급하려니 쥐구멍에라도 숨어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한 모양이었다.
내일이 주말이긴 하지만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지?
그러니 오늘은 우리 집에 가면 안 되겠다.
“알았어.”
이어서 도착한 미유키의 집.
불이 죄다 꺼진 그곳을 살핀 미유키가 날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나도 간다...? 도착하면 연락해...”
그에 대답하지 않은 나는 자동차 문을 잠갔다.
그러자 문고리를 잡고 있던 미유키의 고개가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갔다.
“.... 무, 뭐해...?”
“아쉬워서.”
“뭐가 아쉬운 건데...?”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기는.
눈을 동그랗게 뜬 미유키에게 히죽 웃어보인 나는 이미 폴딩된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침을 꼴깍 삼키는 미유키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마, 마츠다 군...! 여기 우리 집 앞이야...!”
“처음 하는 것도 아니잖아. 새벽이기도 하고. 정 불안하면 빨리 끝낼게.”
“.....”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미유키.
거부하는 양 말하고는 있었지만, 어둑한 차량 내부에서 보이는 그녀의 눈빛엔 은근한 기대감이 서려있었다.
미유키나 치나미나 모두 이번 일을 그러려니 하며 넘기는 분위기인데...
일단은 나름 성공적인 날이라고 해도 되려나?
아직 할 일은 남긴 했다.
오늘 미유키가 절정을 두세 번 맞이했다고는 해도, 분명히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남아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갈 사랑이 치나미에게 나뉘어졌으니 그럴 수밖에.
그걸 지금 채워주자. 아주 정성을 다해서.
그리 생각한 나는 미유키를 그대로 내 몸 위에 엎어뜨렸다.
“아 진짜아...!”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는 미유키.
저러면서도 다리로 내 허리를 휘감는 걸 보니, 치나미가 옆에 있어서 참아왔던 것들을 모조리 터뜨릴 생각인가보다.
그렇게 나와 미유키가 서로의 몸을 물고 빨며 옷가지를 벗어던지려 할 때,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똑똑.
밖에서부터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렸던 것이다.
“허억...!”
그에 까무러칠 정도로 놀란 미유키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것 같은 모습.
깜짝 놀란 건 그녀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 늦은 새벽에 대체 누가 차 문을 두드린다는 말인가?
뭔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까맣게 틴팅된 창문 밖으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카나잖아?’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있는 카나가 밖에서 안쪽을 살피려 하고 있었다.
새벽운동을 하러 나온 건가?
게으를 줄 알았는데 유전자는 어디 안 가는구나.
헌데 늦어도 너무 늦은 시간에 운동을 하다니... 어이가 없다.
“뭐지? 맞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저리 말한 카나가 차를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 차인 걸 알아차렸나보다. 새벽에 자신의 집 앞에 주차되어있으니 의아하겠지.
법 때문에 틴팅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앞좌석과는 달리, 뒷좌석은 새까맸다.
앞유리를 자세히 보면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 수는 있겠지만 본네트에 누워서 엿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도 조수석 등받이에 우리의 몸이 가려져있어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뭐야...? 편의점 갔나?”
결국 우리가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카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조깅을 시작했다.
조수석 헤드레스트 사이의 빈 공간으로 카나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한 내가 미유키의 뺨을 어루만졌다.
“갔어. 카나 누나야.”
“언니라구...?”
“어. 운동하러 나왔나봐. 원래 이 시간에 자주 해?”
“예전엔 새벽에 자주 나가긴 했는데... 요즘은 잘... 웬일이지...?”
앞좌석에서 했다면 카나가 사랑을 나누는 미유키와 날 봤을 테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이벤트는 굉장히 아까웠다.
왠지 자매덮밥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날카롭게 설 것 같았는데... 시동을 끄지 말 걸 그랬나보다.
다음부터는 조수석에서 해볼까?
카나뿐만이 아니라 미도리가 봐도 괜찮을 듯싶다.
앙앙거리고 있는 딸을 보며 달아오르는 유부녀...
입고 있는 몸에 착 달라붙는 원피스 아랫부분이 살며시 젖어 들어가고...
그날따라 성욕이 확 끓어올라 남편과 잠자리를 가지려고 했지만 그의 비실비실한 물건을 보니 영 시원찮을 것 같고, 딸의 남자친구의 거근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면... 꼴린다.
미유키의 가슴에 손을 대어보니 무척 빠르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제대로 놀랐다는 증거.
반쯤 벗겨진 그녀의 상의를 잘 여며준 내가 물었다.
“어떡할래? 조금 진정하고 그냥 갈래?”
“.....”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
이대로 헤어지기엔 아쉬운 듯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변태는 변태구나.
미유키가 원하는 바를 알아차린 나는 말없이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추었다.
뒤이어 조용한 차 안을 메우기 시작한 야릇한 소리.
그 소리를 들으며, 나와 미유키는 적극적으로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
우우웅-!
귓가에서 울려퍼지는 진동음.
잠에서 깨어난 나는 손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마츠다 군, 일어났어?]
미유키의 문자가 와있다.
시간은 점심이었다. 짧게 자지도, 오래 자지도 않았구나.
한숨을 푸욱 내쉬며 졸음을 날려버린 내가 답장을 보냈다.
[방금. 너는?]
[나는 세 시간 전에.]
[별로 못 잤네?]
[응. 졸려.]
[우리 집에 와서 한숨 자.]
[그러려고 했는데, 집에 있을래.]
아직 머릿속이 잘 정리된 건 아닌가보다.
더군다나 어제 짧게 끝낸다고 해놓고 무리를 했으니까... 오늘은 미유키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게 놔둬야겠다.
[알았어. 어제 그 사건은 카나 누나가 언급 안 해?]
[그거? 잠깐 산책 다녀왔다고 했어.]
[그랬더니 뭐래?]
[몰라도 돼.]
내게 솔직한 미유키가 이렇게 얼버무린다는 건, 카나가 개구쟁이 같은 장난을 쳤다는 뜻이다.
딱 보니 산책을 가기 전엔 뭘 했느냐, 산책을 하다가 무슨 일이 없었느냐 하는 말을 하면서 미유키를 곤란하게 했구만.
알만하다.
[♥]
싸늘하게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았는지, 곧바로 하트 이모티콘을 이어 보내는 미유키.
깜찍한 처사에 실소를 지은 나는 그녀와 얼마간 대화를 이어나가다가 밖으로 나왔다.
정원과 마당에 쌓인 새하얀 눈을 보니 기분이 좋지만, 동시에 짜증도 났다.
저걸 언제 치워야할지... 정원 관리사라도 두어야하나 싶다.
여전히 추운 날씨 속에서 간단한 산책을 한 나는 치나미에게 전화를 해보았다.
-여... 흐흐흠...! 여보세요...?
신호음이 얼마 지나기도 전에 들려오는 조신한 목소리.
바깥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밖인 것 같았다.
“잘 잤어요?”
-네에...
“지금 어디에요? 나왔어요?”
-네... 렌카와 같이 밥을 먹으러 나왔어요.
진이 죄다 빠져있을 줄 알았는데 나왔다고?
우리 치나미는 체력이 대단하구나.
-호,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드실래요?
-절대 안 돼. 오늘 나랑만 놀기로 했잖아.
이어지는 치나미의 말이 끝나자마자, 휴대폰 너머에서 렌카가 초를 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자신의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자신과만 놀기로 했다는 말이 기가 찬다.
방학이 시작되면 렌카의 조교시간이니까, 그때 잘 훈육시켜주자.
그리 생각한 내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더 자려고 해요.”
-앗, 네... 알겠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예. 재미있게 놀아요.”
-네엥.
전화를 끊은 나는 혼자 뭘 할까 생각해보았다.
할 게 없다. 미유키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테고, 치나미와 렌카는 단둘이 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테츠야를 만나는 건 아주 미친 짓이고... 빵녀를 보러 가볼까 싶다.
아니면 부반장이나, 오랜만에 양호 선생님의 맘마 디스펜서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양호선생이 사는 곳은 모르지만 아카데미 홈페이지를 찾아보면 전화번호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창고로 향한 나는 히요리가 빨리 입학하길 바라면서 넉가래를 집어들었다.
그냥 눈이나 치워놓고 렌카가 좋아하는 애니와 조교물 만화를 몇 개 봐둬야겠다.
이후엔 검도대회를 대비해서 연습을 해놔야지.
**
일요일에 온 미유키와 집 안에서 빈둥거리며 평화로운 주말을 보낸 나는, 다음날 일찍 그녀와 함께 아카데미로 향했다.
쓰리섬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아서 그런가, 미유키는 예전의 발랄한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는 건 아닌 듯 보였기에, 그러려니 한 나는 미유키와 평소처럼 대화를 하며 교정을 가로질러갔다.
그렇게 교실로 들어간 미유키는 미리 도착한 테츠야에게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러다 놈의 안색이 약간 굳어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런 투로 물었다.
“테츠야 군,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 별 거 아니야. 어제 밤새 게임하느라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잠이 오질 않았나보지?
온갖 망상을 하면서 엉엉 울진 않았을까 모르겠다.
“뭐야... 또? 내가 늦게까지 게임하지 말랬잖아.”
“미안. 멈출 수가 없었어.”
“무슨 게임했는데?”
“그거. 저번에 같이 했던 거.”
“아... 그 생존하는 거?”
“응.”
“누구랑?”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는 교실을 빠져나와 2학년 복도로 갔다.
치나미의 상태를 한 번 체크해보기 위해서였다.
곧 3학년이 될 선배들 중에서 예쁜 여자가 있나 찾아보며 치나미와 렌카가 있는 반으로 가던 나는,
“마츠다?”
막 교실에서 나온 렌카와 마주쳤다.
그녀에게 한손을 들어보인 내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부장.”
“.... 여긴 왜 왔어?”
“오면 안 되나요?”
“어. 안 돼.”
날 대하는 태도가 평소와 같은 걸 보면, 치나미가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던 일을 말하지 않았나보다.
하긴, 누구에게 말하기 힘든 종류의 대사건이었긴 했지.
“서운하네요.”
“서운은 무슨... 빨리 가버려.”
“제가 왜 부장 말을 들어야하죠? 부장을 보러 온 것도 아닌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