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95화 (195/313)

  

“듣고 보니 할 말 없죠?”

  

“시끄럽고, 치나미는 교무실 갔으니까 나중에 찾아오든지 해. 그리고 내일까지 검도대회 때 쓸 장비 체크하고 가져와.”

  

“대회 참가자들 거 모아서 심사 보내게요?”

  

“맞아. 일단 나랑 치나미, 그리고 감독이 먼저 규격을 체크해볼 거야.”

  

“알겠습니다. 하나 부탁이 있어요.”

  

“뭔데.”

  

“제 장비는 스승님 거랑 부장 거 사이에 넣어줘요.”

  

“.... 뭐? 왜?”

  

“그러는 편이 기분 좋으니까.”

  

“무슨 말이야?”

  

고개를 갸웃하던 렌카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내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건지 눈치챈 것이다.

  

“이... 이 변태 새끼...!”

  

주먹을 꽉 쥐며 부들부들거리는 모습이 귀엽다.

장난기가 가득 서려있는 미소를 지은 내가 말했다.

  

“부장이 자꾸 이러니까 더 농담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런 이상한 농담밖에는 못해?”

  

“제가 원래 이런 놈이라서요. 근데 어떻게 제 의도를 잘 알아차리셨네요? 부장도 저랑 비슷한가봅니다.”

  

“시, 시끄러...!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 마...!”

  

버럭 화를 내려다가 주변 눈치를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는 렌카.

낄낄거린 내가 한손을 휘저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내일 가져올게요.”

  

내가 한 말은 물론 농담이긴 했지만, 절반 정도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내 장비가 폐기물 테츠야의 옆에 있다면 그만큼 기분이 더러운 일은 없잖은가.

  

“.... 그래. 연습은 잘 하고 있는 거야?”

  

“예.”

  

“그럼 다행이고. 이제 가버려.”

  

“싫은데.”

  

“내가 갈게 그럼.”

  

“그것도 싫어요.”

  

“뭐라는 거야...”

  

“나랑 매점 갈래요? 사탕 사줄게.”

  

“어린아이 취급하지 마. 짜증나려고 해.”

  

“짜증은 아까부터 나있던 거 아니었나?”

“시끄러워.”

  

너도 솔직히 나랑 얘기하는 게 재밌지?

그래서 꺼지라 했음에도 내 말에 따박따박 대답을 하는 거잖아.

  

예전에는 방학이 심심하다고 느꼈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빨리 렌카와 같이 일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검도대회를 코앞에 두어서인지, 오늘따라 부실 안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하지만 보관실이나 동산, 건조실 같은... 내가 매니저 일을 하는 장소의 경우는 예외였다.

  

“히이익!”

  

날 보고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감탄사를 터뜨리며 도망가는 치나미 때문에 긴장이 될 래야 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널려있는 도복 사이로 자신의 몸을 감추는 치나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 내가 물었다.

  

“왜 도망가요? 점심에 같이 복숭아도 먹었으면서.”

  

“.... 그, 그때는 하나자와 후배님도 같이 계셨으니까요...”

  

“단둘이 있는 건 불편하다 이건가요?”

  

“어, 어허...!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네... 아니에요.”

  

“불편한 것 같은데?”

  

“아니래두요...!”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기다란 속눈썹을 치켜뜨는 치나미.

더 이상 몰아붙였다간 훈계를 빙자하며 투덜거릴 것 같다.

포근한 미소를 지은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화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오늘 잠깐 봐주실 거죠?”

  

“보, 보라니요? 무엇을요...?”

  

“검도요.”

  

“아하... 그건 당연히 봐드려야지요...”

  

뭘 생각한 거야?

설마 미유키와 내가 몸을 섞는 장면을 상상한 건가?

치나미라면 충분히 그럴 것 같다.

  

“다리는 괜찮아요?”

  

“네? 다리요?”

  

“아까 점심에 많이 떨던데. 저번에 무리한 거 아니었어요?”

  

넌지시 그때 그 사건 이야기를 꺼내자, 치나미가 흐끕!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달싹였다.

그녀를 얼른 끌어안고 복부에 손을 대어 시계방향으로 쓰다듬은 내가 말을 이었다.

  

“아니면 다행이고요.”

  

“.....”

  

나는 수줍은 듯 몸을 꼬기 시작한 그녀의 정수리에, 여느 때처럼 턱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언제 한 번 다시 미유키랑 같이 놀아요.”

  

“네에엣...?”

  

“싫어요?”

  

“아, 아니... 싫다기보다는... 제가 마음의 준비가...”

  

그저 놀자고만 말했을 뿐인데 마음의 준비라니.

물론 의도적으로 쓰리섬을 연상하도록 말하긴 했지만, 그걸 정확히 캐치하는 치나미가 무섭다.

  

방금 잠깐 봐 달라 했을 때 기겁했던 모습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시도 때도 없이 야한 상상을 하는 치나미가 눈을 제대로 뜨면, 미유키보다 성욕이 몇 배는 더 강할 듯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척 쑥스러워하고 있는 그녀를 위에서부터 내려다본 내가 말했다.

  

“이 얘기는 지금 그만하고, 검도 봐줄래요?”

  

“앗, 네... 봐드려야지요. 암요... 밖이 추우니 안에서 할까요...?”

  

“여기서요?”

  

“늣...!? 이곳은 위험하니 밖에서 하도록 해요...!”

  

“뭐가 위험한데요?”

  

“그런 게 있어요...! 어서 죽도를 챙기러 가도록 해요...!”

  

자꾸 요상한 망상을 하는데, 여기서 한 번 하고 싶어진다.

그러한 충동을 참아낸 나는 얌전히 치나미를 놓아주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대회에 참가하는 3학년 선배가 날 불렀다.

  

“마츠다, 감독이 오래.”

  

“지금요?”

  

“어. 남자 단체전에 참가할 사람들 불러오라는데?”

  

치나미와 오손도손 검도연습을 해야 하는 시간인데 하필 이럴 때 부르다니.

와이프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깨어지려고 한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나는 감독실에 들어가 고로에게 입례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부원들.

개중엔 당연히 테츠야도 있었다.

  

오늘 대련을 할 때 다소 질척하게 굴던데... 크리스마스 때의 심란한 감정이 아직 풀리지 않아서 그랬던 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테츠야의 대련 스타일 자체가 늪 같아서 가늠이 안 된다.

  

“무슨 일이래?”

  

땀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테츠야의 조용한 물음.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몰라. 연습은 잘 되냐?”

  

“열심히 하려는 중이야. 너는 어때?”

  

“나도 비슷하지.”

  

“같이 힘내보자.”

  

오늘은 신경을 긁는 말을 하지 않는구나.

요즘 주제파악을 했는지 예전에 비해 얌전하던데, 대회를 앞둬서 괜히 충돌하기는 싫은 건가?

다행인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다.

  

테츠야와 시답잖은 대화를 몇 번 더 나누는 사이, 프린터로 뽑은 종이를 들고 우리 앞에 선 고로가 말했다.

  

“조용.”

  

그와 동시에 쥐새끼 한 마리도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해지는 감독실.

확실히 고로에게는 포스가 있다.

근데 저 얼굴에 없으면 말이 안 되긴 한다.

  

“선수명단을 최종제출하는 날이라서 불렀다. 마츠다, 미우라, 모리, 이케다, 야마자키 순에 서브로 요시다, 후지이... 맞지?”

  

고로의 물음에, 감독실에 모여 있던 대회 참가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예.””

  

“더 이상의 변동사항은 없어야한다. 혹시라도 순번에 관해 이야기할 게 있다면 지금 말하도록.”

  

““없습니다.””

  

“그럼 이대로 제출한다. 나가들 보고, 개인적인 질문이 있다면 지금 해라.”

  

그 말에 테츠야와 2학년 선배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발걸음을 돌렸다.

열정이 있는 눈빛이다.

팀이 이긴다면 테츠야가 지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려는 모습을 보아하니 좋은 성적을 얻을 것 같다.

  

**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얼마 뒤가 대회였기에, 그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평일 날 펼쳐지는 대회라 합법적인 땡땡이를 칠 수 있었지만, 그래 봐야 겨우 오후수업 1교시 정도만 빼먹는 수준이라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오늘은 매니저 일을 자신이 한다는 고로의 말을 듣고 치나미와 곧장 버스에 올라탄 나는, 그녀와 갈라져서 앉았다.

원래는 같이 앉으려 했으나, 여자부 참가자들끼리 전술에 관한 일로 토론을 한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는 남자부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츠다, 빨리 와.”

  

뒷좌석에서 손을 흔드는 남자부 부원들을 본 나는 속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냄새나는 남정네들과 앉아야한다니... 수치스럽다.

  

일부러 아무도 없는 빈자리에 앉은 나는 대장 포지션의 3학년 선배가 주는 팁을 잘 경청했다.

그러다가 렌카가 올라타선 인원수를 체크하자,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치는 타이밍에 맞춰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윽...!”

  

그것을 보고는 미간을 구기는 렌카.

못 볼 걸 봤다는 듯 날 훑어본 그녀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다시 인원을 세기 시작했다.

역시 반응이 재미있다. 대머리 삼촌들의 가게에서 나와 일일알바를 하는 날이 기대되는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인원파악을 전부 끝낸 렌카가 미우라가 앉아있는 좌석에 섰다.

그리고는 놈을 격려했다.

  

“미우라, 오늘 힘내.”

  

“감사합니다, 부장!”

  

“지역대회인 만큼 하루에 많은 경기가 펼쳐지는 거 잘 알고 있지? 힘 배분을 잘해야 돼.”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믿을게.”

  

시끄러워서 귀 떨어지겠네. 여자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듣는 게 그렇게나 좋나?

속으로 테츠야를 욕하려던 나는,

  

“마츠다, 너도 힘내고.”

  

날 바라본 렌카의 말에 혐오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좋긴 좋구나.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주마.

  

“예.”

  

“너는 감사 안 해?”

  

“감사.”

  

“.... 내가 말을 말아야지.”

  

작게 투덜거린 렌카가 앞으로 가자, 마침 소모품을 다 실은 고로가 버스로 들어오더니 말했다.

  

“행운을 빌지는 않겠다. 실력으로 이기는 거다.”

  

실력으로 이겨라?

다소 오글거리긴 하지만, 청춘의 불같은 감성을 자극해주는 한 마디다.

도키아카가 열혈 스포츠물이었다면 고로의 비중이 아주 컸겠지?

  

여자부가 앉아있는 좌석으로 몸을 돌린 나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뜬 채로 회의를 하고 있는 치나미에게 힘내라는 뜻으로 한손을 들고 주먹을 쥐어보였다.

그러자 날 발견한 치나미가 배시시 웃더니 양손을 바짝 끌어당기며 파이팅 포즈를 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출발하는 버스.

간단하게 회의를 끝내고 홀로 두 자리를 차지한 나는 창가 쪽에 붙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꽤나 포근하다. 봄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지만 이 정도면 좋다고 할 수 있는 날씨였다.

이럴 때 미유키나 치나미와 피크닉을 가야하는 건데... 아쉽게 됐다.

  

빵녀, 부반장과 응원을 온다고 했으니까 대회가 끝나면 네 명이서 놀아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창문을 열고 분주한 번화가를 훑어보던 나는,

  

“잘 가! 히요리!”

  

어느 교차로에 버스가 멈추면서, 횡단보도에 초록불이 들어옴과 동시에 들려온... 남녀가 섞여있는 고등학생 무리의 큼지막한 목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뭐?’

  

히요리라고?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설마 싶었던 나는 학생 무리들이 쳐다보고 있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바이바이!”

  

횡단보도 중간에서 뒤를 돌아보며 상큼한 포즈로 친구들에게 손인사를 건네는... 주변이 환해질 정도로 밝게 웃는 히요리를.

  

‘지, 진짜잖아...?’

밝은 금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인상, 그리고 발랄한 행동까지.

확실히 내가 아는 아사히나 히요리가 맞았다.

두근!

  

심장이 쿵쾅거린다.

뜬금없이 보게 되어 당황스러운 마음보다는, 지금까지 2D로만 알고 있던 히요리를 직접 보게 돼서 설레는 마음이 더 컸다.

  

친구들과 헤어진 히요리는 금세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실 그녀가 사라진 게 아니라,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면서 버스가 거리를 빠르게 지나쳐갔다고 해야 옳았다.

  

순간적으로 내려달라며 소리칠 뻔한 나는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내려서 히요리와 만난다 해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상한 눈으로 날 보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근데 안 춥나? 뺨이 빨개져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따뜻한 날씨라지만 옷차림이 너무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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