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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98화 (198/313)

  

“설령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과정에 후회가 남지 않는 경기를 했다면 만족한다. 모든 걸 쏟아 부어라.”

  

보통 이러면 준우승하는 게 클리셰던데 불안하게 하네.

마지막 파이팅을 끝낸 나는 손바닥으로 면금을 몇 차례 때리고는 선봉전을 준비하기 위해 경기장 외곽에 섰다.

그러자,

  

“마츠다 군, 힘내!”

  

멀리서부터 미유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관중석을 보니 얼굴이 빨개진 미유키가 보였다.

주목을 받으면서 소리를 지르는 게 창피했던 건가? 귀여워가지고...

  

치나미와 렌카도 미유키의 옆에 있구나. 경기가 끝나자마자 온 모양이다.

어디부터 봤으려나? 아마 8강이나 4강전을 관람했을 것 같은데... 나중에 대화해보면 알겠지.

  

상념을 날려버린 나는 심판의 수신호에 따라 천천히 중앙 경계선으로 걸어가, 상대를 마주보며 준거했다.

이후 일어나자마자 상단을 잡았다.

  

“.....”

  

면금 사이로 보이는 상대방의 눈빛은 굳건했다.

체격조건은 나와 비슷하다. 결승까지 왔으니 실력은 말할 것도 없이 좋을 터.

경기가 어렵게 흘러갈 듯한 느낌이다.

  

강자의 냄새를 솔솔 풍기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나는 첫 발을 내딛었다.

  

쿠웅-!

  

**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는 대회장 안.

결승전을 치렀던 우리의 얼굴색이 죽어있는 것과는 달리, 상대팀의 표정은 아주 밝았다.

우승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우린 종합점수 3:2로 졌다.

그것도 이미 부장전부터 결과가 나와버린, 다소 허탈한 패배를 맞았다.

체면을 세운 건 똑같이 2:1로 승리한 나와 야마자키가 끝.

언더독인 예보니 아카데미의 반란은 준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경기가 끝났을 때, 고로가 준우승도 잘한 거라며 너희들이 자랑스럽다 했지만 허탈한 기분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역사에 쓰이지도 못하는 2등을 누가 기억해주겠는가?

준우승을 수십 번 했다면 또 모르겠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다.

  

-다음은 전체 MVP입니다. 전체 MVP는 신인상과 함께 시상식을 진행합니다. 예보니 아카데미 1학년 마츠다 켄, 단상 위로 올라와주십시오.

  

그래도 난 입상했으니까 됐지.

서브 자원을 포함한 180명 가까이 되는 선수들 사이에서 MVP면 좋은 결과다.

미유키, 치나미, 렌카에게도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을 테니 괜찮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위로한 나는 단상으로 올라가, 심사위원의 간단한 덕담을 듣고 상장과 부상을 받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관중석을 올려다보니, 미유키와 치나미가 마구 박수를 치고 있었다.

  

빵녀는 입에 빵을 문 채로 부반장에게 안겨있는데, 쟤는 무슨 신 스틸러인가?

볼 때마다 눈길이 간다.

  

단상 아래 부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내려온 나는 부상을 살펴보았다.

흰색 종이에 싸인 네모난 박스다.

크기가 나름 큼지막하다. 무게는 엄청 가벼운데 뭘까?

  

설레는 마음을 다스리며 상자를 연 나는 미간을 팍 구겼다.

  

‘뭐야?’

  

박스 안에 얇은 직사각형의 종이 두 장이 덩그러니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싶어 살펴보니, 지역구와 협약을 맺은 백화점에서 쓸 수 있는 2만 엔짜리 상품권이었다.

  

백화점 상품권은 보통 고급스런 돈 봉투에 넣어서 주지 않나?

이걸 박스에 넣어서 준다고?

텅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어이가 없다.

  

그래도 공짜 돈이니까 잘 써먹어야지.

이걸로 미유키랑 치나미에게 줄 선물이나 사야겠다.

  

그렇게 지루한 시상식을 끝낸 나와 부원들은 똥 씹은 얼굴을 억지로 펴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 밖에서 부원들을 통솔하고 있는 렌카를 만났다.

  

“스승님은요?”

  

“짐 옮기고 있어.”

  

“빨리 도와주러 가봐야겠네요. 여자부는 우승했어요?”

  

“응.”

  

“스승님 전적은 어떻게 되나요?”

  

“전승.”

  

역시 우리 치나미다.

뽈뽈거리면서 잘도 뛰어다녔겠네.

  

“1점도 안 내주고?”

  

“맞아.”

  

“부장은요?”

  

“나도 마찬가지야.”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착각인가요?”

  

“이게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안과라도 가보는 게 좋겠네.”

  

“걱정 고맙습니다. 오늘 수고했어요.”

  

“.... 너도 수고했고, 잘했어.”

  

마지못한 척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있다.

내가 진짜 잘하긴 잘했나보다. 렌카가 저럴 정도면.

  

“감사합니다.”

  

“근데 결승전 때 1점을 내어준 건 조금 실망스러웠어. 뻔한 공격이었잖아.”

  

칭찬만 하면 무안하니까 또 틱틱대는 거 봐라.

츤데레 같은 것.

  

“아니, 좋게 가다가 갑자기 비판을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다음 대회 땐 더 잘해보라는 뜻에서 말하는 거야.”

  

이번 대회가 재미있기는 했으나, 다음 대회에 참가할 의사는 그다지 없었다.

렌카가 보상으로 뭘 해주면 긍정적으로 고민해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뻔하긴 무슨... 눈앞에서 보면 알아차리기 힘든 공격이었다고요.”

  

“뻔했어.”

  

“아닌데.”

  

“네가 조금만 더 넓게 봤으면 알 수 있었어.”

  

“시야가 좁았다?”

  

“그런 거지.”

  

“어쨌든 저 잘했죠?”

  

“그렇다고 말했잖아.”

  

“그럼 부장.”

  

“절대 안 해. 싫어.”

  

렌카가 질색을 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뜬 내가 물었다.

  

“아직 내용을 말하지도 않았는데요?”

  

“소원 들어달라고 할 거였잖아.”

  

“감사합니다. 조만간 말할게요.”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거야?”

  

어이없어하는 렌카에게 히죽 웃어보인 나는, 큼지막한 박스를 든 치나미가 이리로 걸어오고 있자 그녀를 향해 후다닥 달려갔다.

  

“왜 혼자 옮기고 있어요? 같이 하면 되지.”

  

“빨리빨리 일하고 돌아가서 쉬는 게 낫지요. 아, 그리고 후배님.”

  

“예.”

  

“이 스승은 제자가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네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여전히 노인네 같은 말을 하는 치나미.

피식한 나는 그녀가 든 박스를 빼앗아 버스 짐칸에 옮겨놓았다.

  

저 멀리 테츠야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유키가 보인다.

그러던 와중에서도 내 쪽을 흘끔흘끔 바라보고 있는데, 테츠야는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 예뻐 죽겠다.

  

그나저나 검도대회는 이걸로 마무리인가?

나름 만족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

우승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서 이런 거겠지.

너무 담아두지 말고, 이젠 기말고사와 수학여행에 집중하자.

부원들과 함께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누며 일을 끝낸 나는, 테츠야 특유의 폐기물 같은 기운에 갇혀있는 미유키를 구원해주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다.

“응, 응. 되게 잘하더라. 멋졌어.”

  

테츠야가 지껄이고 있는 무용담에 수긍해주는 미유키.

미온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대답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정말로 테츠야를 칭찬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신경이 근처로 다가오는 내게 쏠려있을 뿐.

  

테츠야는 눈치 없는 병신답게 그런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고,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유키.”

  

“응?”

  

“요새 화장해?”

  

“화장? 하지.”

  

“예전엔 잘 안 했잖아.”

  

“밖에 나갈 땐 그래도 자주 하지 않았어?”

  

“그랬나? 아닌 것 같은데...”

  

음산한 테츠야답게 슬슬 스토커기질이 나오려 하는구나.

두 사람에게 가까이 접근한 내가 테츠야에게 말했다.

  

“야, 모리 선배가 너 부르더라. 가봐.”

  

“아 진짜? 알았어. 오늘 수고했어.”

  

“너도 수고했다.”

  

그렇게 테츠야를 보낸 나는 미유키를 데리고 어느 아카데미가 대질한 버스 뒤편으로 갔다.

  

“다 봤냐?”

  

“경기? 다 봤지. 근데 마츠다 군, 반칙당했었어?”

  

“뭔 반칙?”

  

“테츠야 군이 그랬었거든. 마츠다 군이 반칙을 당해서 휘청거렸었다구. 교대할 때도 반칙을 잘 쓰는 사람들이니까 조심하라고 조언해줬다던데?”

  

테츠야가 그랬다고? 혹시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내가 지한테 해준 조언 같은 건 쏙 빼먹을 줄 알았는데, 이걸 말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 느끼는 바가 많았나보지? 아니면 내가 잘 대해주니까 기분이 좀 업 된 건가?

놈의 머릿속에 한 번 들어가보고 싶어진다.

  

“그런 해프닝이 있긴 했네.”

  

“화나지 않아?”

  

“경기에서 복수해줬으면 된 거 아닌가?”

  

미우라는 그걸 못해서 화딱지가 난 거고, 너한테 툴툴거렸을 테지.

땀으로 뭉쳐있는 내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살살 풀어준 미유키가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멋있었어.”

  

“그런 것 같더라.”

  

“그런 것 같더라는 뭐야? 오늘 검도부끼리 회식한대?”

  

“글쎄. 잘 모르겠는데 하지 않을까? 일단 복귀해서 장비 정리해야 돼.”

  

“오래 걸리겠네? 그럼 나 바로 애들이랑 놀러 간다?”

  

“뭐할 건데.”

  

“밥 먹고 돌아다니려구.”

  

“늦게까지 놀게?”

  

“모르겠어. 상황 보고 결정할래.”

  

“그럼 애들이랑 헤어질 때 전화해. 데리러 갈게.”

  

고개를 주억거린 미유키가 돌연 내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자신의 허리를 쭈욱 빼며 복부에 머리를 묻기까지 하는 그녀.

그런 그녀의 자그마한 머리를 손가락 하나로 꾸욱 꾹 누른 내가 말했다.

  

“땀 옮긴다. 놔라.”

  

“냄새 좋아...”

  

인적이 드문 곳에 있긴 하지만 바깥에서 애정표현을 자제하는 미유키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내가 검도를 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긴 했나보다.

갑자기 다음 대회에 참가하고 싶어진다.

  

땀이 묻어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미유키를 잘 달랜 나는, 그녀와 헤어지고 부원들에게 향했다.

이후 그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소보로 빵을 사서 일행들에게 걸어가는 마사코를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야, 빵녀!”

  

“으응...?”

  

“웬일이냐? 오늘은 기침 안 하네?”

  

“콜록!”

  

물어보자마자 기침을 하는 빵녀.

타이밍이 참 공교롭다. 일부러 날 맥이려는 건가?

표정을 보면 진짜로 사레가 들린 것처럼 보이긴 한다.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리는 빵녀에게 생수를 내밀자, 그녀가 연신 기침을 하며 그것을 받았다.

  

“고, 고마... 콜록...! 워...”

  

“너는 기관지가 안 좋냐?”

  

“그, 콜록...! 그렇지는 않... 케헥! 켁!”

  

쟤는 사람을 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구나.

저러는 게 괜히 내 탓인 것 같아서 무안하다.

머리를 긁적인 나는 저 멀리 있는 부반장을 불러 빵녀를 데려가게끔 했다.

  

**

  

“이건 어디다 놓을까요?”

  

“저기요.”

  

“이건?”

  

“저어기요.”

  

“그럼 이건?”

  

“그건 저어어어기요.”

  

“저어어어기가 어딘데요?”

  

“구석 선반에서 두 번째 줄이요.”

  

“여기?”

  

“네. 거기요. 프힣...”

  

오늘 사용했던 장비를 청소하고 정리하며 킥킥거리는 나와 치나미.

여자부 우승, 남자부 준우승, 여기에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전승을 한 것에 기분이 한껏 좋아졌는지, 오늘의 치나미는 텐션이 상당했다.

  

“참, 손목은 아프지 않으신가요?”

  

“손목?”

  

“아까 허리치기를 할 때 손목이 확 돌아간 것 같았거든요. 지금은 괜찮아보여도 분명히 무리가 왔을 거예요. 잠시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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