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199화 (199/313)

  

보관실 구석에 있는 검은 봉지를 뒤적거린 치나미가 무언가를 꺼냈다.

모모님이 그려져 있는 네모난데다 얇은 물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거기 써있는 글자를 읽어본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모모님 파스네요...?”

  

“넷...! 제가 애용하는 거예요. 자, 손을 내밀어보세요.”

  

모모님은 없는 게 없네. 기가 찬다.

모모님의 성수라는 이름의 복숭아 맛 음료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야.

  

순순히 팔을 내밀자, 치나미가 꼼꼼하게 내 손목에 파스를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것보다 두 배는 더 큰 내 팔뚝을 보더니 감탄을 했다.

  

“팔이 참 굵으시네요.”

  

“굵어요?”

  

“네, 우람해요.”

  

치나미가 말해서 그런가? 대사가 왠지 야릇하게 들린다.

순간적으로 욕구가 확 솟구친 나는 치나미의 엉덩이에 손을 뻗으려다가,

  

덜컥.

  

문이 열리면서 렌카가 고개를 빼꼼 내밀자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도와줄 거 있어?”

  

나와 붙어있는 치나미를 보더니 미간을 구기고는 저런 질문을 해오는 렌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가로저은 치나미가 대답했다.

  

“딱히 없어요. 저희 둘이서 다 할 수 있답니다.”

  

“그래...? 그래도 손이 많으면 일이 더 빨리 끝나니까 나도 거들게.”

  

통보하듯 말한 렌카가 우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스타카토 걸음으로 보관실 가운데로 들어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치나미와 내가 또 음란한 일을 할까봐 우려스러운가보지?

저 넓은 오지랖은 언제쯤 줄어들려나 모르겠다.

  

“뭘 그렇게 도끼눈을 뜨고 쳐다봐? 도와주겠다는데 고마워해야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날 향한 렌카의 꼰대 같은 타박.

어깨를 으쓱인 내가 되물었다.

  

“누가 뭐래요?”

  

“불만이 많은 표정이잖아.”

  

“아닌데요.”

  

“안 닦은 장비나 줘.”

  

“직접 가져가세요.”

  

“너한테 가까이 있는데 건네주면 좀 덧나?”

  

“호구 좀 줄래? 라고 예의 바르게 말해보세요.”

  

“그냥 내가 가져갈게.”

  

콧방귀를 낀 렌카가 상체를 쭈욱 뻗어 내 옆에 놓인 호구를 가져가려고 헀다.

그 틈을 탄 나는 아직 청소하지 않은 호면 하나를 집어 렌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인상을 팍 쓰더니 물었다.

  

“뭐해?”

  

“달래서 드렸는데.”

  

“왜 이제 와서 줘?”

  

“제가 행동이 굼떠서요.”

  

“대답은 빨리 했잖아.”

  

“말이 굼뜬 건 아니니까요.”

  

“너 오늘 회식 참가하지 마.”

  

“되게 유치하네?”

  

“네가 먼저 유치한 짓을 하잖아.”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혀를 찬 치나미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허...! 이렇게 좋은 날 왜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는 건가요? 두 분 모두 얌전히 호구를 닦도록 하세요.”

  

“으르렁거리는 게 아니라, 서로 친하니까 농담을 건네는 거죠.”

  

“앗, 그런 건가요?”

  

“그럼요.”

  

태연스레 상황을 넘기는 내게 말려들었는지, 렌카가 욱하며 내 말을 부정했다.

  

“친하긴 뭐가 친하다는 거야? 웃기지도 않은 소리하지 마.”

  

그런 렌카를 무시한 내가 치나미에게 재차 말했다.

  

“스승님도 아시다시피, 부장은 속으론 기쁘면서 겉으로는 틱틱대는 면이 있잖아요.”

  

“음음... 확실히 친우님께선 그런 면이 있긴 하지요.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게 좋겠어요.”

  

“제가요?”

  

“네. 렌카 친우님께서는 저흴 생각해서 도와주러 온 것이니까요.”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부장.”

  

자신에겐 따박따박 대들면서 치나미의 말은 잘 따르는 내게 약이 올랐을까?

렌카가 자신의 가슴을 쿵쿵 때렸다.

  

저렇게까지 좋아라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한다.

역시 렌카는 타격감이 좋아.

  

**

  

중견과 부장으로 나선 모리와 이케다는 나와 야마자키에게 상당히 미안해했다.

내가 기세 좋게 점수를 따낸 걸 우르르 무너뜨려버리고 일찌감치 패배해버렸으니 말이다.

  

팀으로 이기고 팀으로 진다가 기본 전제로 깔려있는 단체전이긴 하지만, 사람인 이상 죄스런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눈치 없는 테츠야조차도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아진 걸 보아하니 단체전이란 게 참 딜레마가 있구나 싶다.

  

그래도 준우승이라는 예상외의 수확을 얻었기에, 회식 분위기는 금세 좋아졌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많이 먹어.”

  

테츠야의 옆에 앉아 그를 챙겨주는 렌카.

그에 테츠야가 허리를 쫙 펴며 큰 소리를 냈다.

  

“네! 감사합니다, 부장!”

  

군기가 바짝 잡힌 목소리에, 고깃집 안에 있던 손님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나쁜 시선은 아니었다.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동아리부의 회식이라 생각하고 저들끼리 피식거리기만 했다.

  

그나저나 내 옆에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도 모자랄 판에 테츠야 같은 놈에게 신경을 써준다 이거지?

조교수위를 조금 높여야겠다. 바니걸 복장을 입히고 침대에 손발을 묶어놓은 뒤, 엉덩이에 회초리질을 해야겠어.

렌카 조교일지 2편, 금방 기록을 시작해주마.

  

“저의 자랑스러운 후배님, 많이많이 드세요.”

  

옆에서 고기를 한 점 집어 올려주는 치나미.

참한 그녀에게 웃음으로 화답한 나는 고기를 입 안에 집어넣었다.

고기가 사르르 녹는다. 치나미가 구워서 그런가? 아주 맛있어.

  

“이제 기말고사 시즌이네요. 준비는 잘 하고 계시는 건가요?”

  

이어지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내가 대답했다.

  

“그럭저럭요. 스승님은 어때요?”

  

“저도 그럭저럭 하고 있답니다.”

  

기말고사에 대한 주제가 나오자 렌카의 귀가 쫑긋하는 게 보인다.

신경이 쓰이는 건가? 하긴 내년에 3학년이 되는데 슬슬 성적도 관리해야 마땅하긴 하다.

중간고사 때 분명 나보다 등수가 낮았었지?

이번에도 그러면 이걸로 놀려줘야겠다.

아니, 등수로 내기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도 괜찮아보인다.

전날에 한 번 말해봐야지.

그리 생각한 나는 부원들과 함께 간단한 뒤풀이를 즐기는 것으로 이번 대회를 완전히 마무리했다.

“10등 안쪽이어야 돼.”

  

“수학 때문에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할 수 있어. 벌써부터 포기하지 마.”

  

중간고사 때 괜히 14등이란 등수를 얻었나?

미유키의 기대감이 너무 커졌다.

쉬는 시간에 나와 테츠야를 묶어놓고 공부를 가르쳐주던 미유키가, 노트에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는 테츠야에게 말했다.

  

“테츠야 군도 10등 안쪽으로 노려보자.”

  

“나...? 알았어. 열심히 해볼게.”

  

자신감이 없는 얼굴로 대답을 하는 테츠야의 시선이 은근슬쩍 내게로 향했다.

의식하고 있구나. 대회 이후로 내 신경을 긁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저런 식으로 라이벌을 대하는 것 같은 눈빛이 조금 심해졌다.

  

“응. 잡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다들 수학책 펴.”

  

놈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야 위협 따윈 전혀 되지 않았기에, 속으로 코웃음을 친 나는 얌전히 미유키의 말대로 책을 폈다.

이후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교실 안에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지박령처럼 교실에 붙어있던 나는, 점심시간에 급식을 먹고 매점으로 가면서 잠깐 숨을 돌렸다.

아무리 집중을 한다고는 했지만, 취향에도 안 맞는 공부를 하느라 머리털이 죄다 빠질 것 같은 느낌이다.

  

열심히 샤프를 굴리느라 조금 아려오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꺾으며 길을 걷던 나는, 저 앞에서부터 기다란 남색 포니테일 머리를 찰랑거리며 어딘가로 가고 있는 렌카를 발견했다.

몰래,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뒤까지 다가간 내가 목소리를 바짝 낮추고는 말했다.

  

“저기요.”

  

“네?”

  

존대를 하며 몸을 돌린 렌카.

자신을 부른 사람이 나였음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죽을래?”

  

“아, 부장이었네요. 실례했습니다.”

  

“몰랐던 표정이 전혀 아니잖아. 목소리도 일부러 바꾸고... 장난해?”

  

“미안해요. 어디 가는 길이었어요?”

  

“.... 매점.”

  

“저도 가는 중이었는데, 같이 갈까요?”

  

“싫어.”

  

새침하게 거절을 한 렌카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걷자, 렌카가 질색을 하더니 옆으로 빠졌다.

  

“붙지 마. 떨어져서 걸어.”

  

아까는 같이 가기 싫다더니, 떨어져서 걷기만 하면 되나보네.

  

“이렇게요?”

  

“더 떨어져.”

  

“여기서 더 떨어지면 아예 남인데? 그럼 너무 정이 없잖아요.”

  

“없어도 되잖아.”

  

“아뇨. 있어야 좋은 거죠. 기말고사 대비는 잘 돼가고 있어요?”

  

태연스레 화제를 돌리는 내가 얄미웠을까?

눈썹을 구긴 렌카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어떻게든 잘 해나가고 있어. 치나미도 도와주고 있고.”

  

“스승님으로 모신 거예요?”

  

“글쎄... 그렇게 되나?”

  

“그럼 저랑 동문이네요? 앞으로 사형이라고 불러요.”

  

“죽어도 안 부를 거니까 기대하지 마.”

  

“아쉽네요. 근데 저랑 내기할래요?”

  

“무슨 내기?”

  

“등수 내기. 이번 기말고사에서 등수가 더 높은 사람이...”

  

“안 해.”

  

설명을 듣기도 전에 단칼에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예상이 갔나보다.

  

“알았어요. 그럼 내기하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안 한다고 했어. 그렇게 알아.”

  

“저한테 질까봐 무섭나보네요.”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난리야...! 내가 널 왜 무서워해? 쓸데없는데 정신을 소모하기 싫으니까 그러는 거지...!”

  

“자신은 있다?”

  

“.... 있지 당연히.”

  

“대답에 약간 텀이 있는데... 사실은 자신 없는 거 아니에요?”

  

“뭐래...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니까 황당해서 잠깐 머뭇거린 거지.”

  

“그럼 합시다. 그렇게나 자신 있으면 부장한테 손해는 전혀 없잖아요.”

  

“그런 식으로 엮으려고 하지 마. 안 할 거니까.”

  

곧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시험공부를 별로 못했나보지? 알만하다.

  

“방학 때는 뭐할 거예요?”

  

“알바할 거야.”

  

“그때 그거? 구했어요?”

  

“아직.”

  

“방학시즌이라 빨리 안 구하면 괜찮은 알바는 다 차버릴 텐데?”

  

“기말고사 이후에 구해도 늦지는 않아. 너 그거 안 까먹었지? 삼촌네 가게 도와주는 거.”

  

“소원? 기억하고 있죠.”

  

“다행이네.”

  

“얘기는 다 해놨어요?”

  

“했어.”

  

“그랬더니 뭐래요?”

  

“뭘 그랬더니야. 그냥 잘됐다고 하지.”

  

딱 보니 삼촌들이 엄청 좋아했구나.

무시무시한 인상을 지닌 데다 덩치까지 큰 두 사람이 물개박수를 치며 껄껄거리는 그림... 뭔가 안 어울린다.

  

매점에 도착한 나는 렌카와 함께 뒷줄에 섰다.

이후 매진된 메뉴와 판매 중인 메뉴판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뭐 먹을 거예요?”

  

“복숭아 젤리랑 메론 우유.”

  

“복숭아 젤리는 스승님 건가요?”

  

“맞아.”

  

“메론 우유 말고 딴 거 먹으면 안 돼요?”

  

“왜?”

  

“그냥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제 좀 가.”

  

“나 아직 안 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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