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데서 줄 서.”
“유치하게 굴지 좀 마요. 부장이 애에요?”
“너부터 유치하게 굴지 마.”
음음... 이렇게 티격태격하면서 미운 정을 쌓아가는 모습... 나쁘지 않다.
렌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요즘 나와 자주 말을 섞는 걸 상기해보면 그럴 것도 같다.
**
“커닝하다 걸리면 바로 퇴실이다.”
근엄한 목소리에 바짝 긴장하는 학생들.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교실을 만족스레 쳐다본 감독관이 말을 이었다.
“시험지 배포해라.”
그러자 앞자리에서 시험지를 받은 학생들이 그것을 뒤로 넘기기 시작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내가 한 장의 시험지를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감독관이 교탁을 탁탁 치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쓸데없이 권위주의적인 그의 왼손 약지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갑자기 와이프 얼굴이 궁금해지는 이유가 뭘까?
“마츠다 군, 힘내.”
두 칸 정도 떨어져있는 미유키의 자그마한 격려.
그녀에게 씨익 웃어보인 나는, 안내방송에서 시험을 시작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오자 얇은 재질로 된 국어 시험지를 펼쳤다.
미유키가 알려주었던 독해법을 활용하는 문제가 첫 번째로 나와 있다.
그 다음 문제도 범위 안에서 출제된 것이었다.
초반부터 느낌이 좋다고 생각한 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시험을 보았다.
막히는 부분은 딱히 없었다.
영어 다음으로 치르는 수학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머리를 조금만 더 굴려보면 알 수 있었던 거라서, 나는 순탄하게 문제를 풀이하면서 답안지에 답을 옮겨 적었다.
그렇게 머리를 불태우며 오전시험을 나름 성공적으로 끝마친 나는, 지끈거려오는 관자놀이를 꾸욱 꾹 누르면서 가채점을 하러 오는 미유키와 테츠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나중에 하면 안 되냐? 나 머리 아프다.”
“간단하게만 해보자. 수학만.”
“어차피 답안지를 수정하지도 못하는데 가채점을 해서 뭐해? 결과만 기다리면 되지.”
“심리적인 안정을 얻기 위해서 하는 거지.”
“그러다 못 봤으면 불안감만 더 커질 텐데?”
“아니지. 만약 그렇게 되면 다음 시험은 더 잘 봐야겠다고 승부욕을 불태울 수 있잖아.”
공부에 관해선 열정적인 미유키다운 답변이다.
아니지, 다른 부분에서도 열정이 넘치긴 한다.
“하... 알았어.”
“목표로 잡았던 수학 점수가 둘 다 80점이었지?”
“맞아.”
“그럼 시작한다? 일단...”
속사포처럼 입을 놀리기 시작하는 미유키.
문제부터 답까지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데, 시험지 자체를 모조리 외운 건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우리 곁엔 어느새 공부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미유키가 말해주는 정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답은 절대 틀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점수가 높으면 점심시간에 미유키랑 옥상에 가야지.
그리 다짐한 나는 시끌벅적해진 교실 안에서, 미유키의 청아한 목소리를 들으며 가채점을 했다.
문제와 답을 끄적인 노트는 일부러 보여주지 않았다.
첫 다섯 문제를 모조리 맞춰서, 왠지 좋은 점수를 받을 것 같아 미유키를 놀라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 마지막 답은 13. 여기까지야.”
미유키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후련함과 아쉬움이 섞여있는 탄성이 들려왔다.
모인 학생들 때문에 나와 테츠야에게만 집중할 수 없었던 미유키는, 그런 그들을 잘 타일러 돌려보내고는 내게 더욱 바짝 붙어 앉았다.
“둘 다 어떻게 됐어? 테츠야 군부터 말해봐.”
그에 내 책상에 자신의 더러운 노트를 놓아두고 있던 테츠야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80점 같은데...?”
“진짜?”
“응. 진짜. 헷갈리는 답이 한두 개 있긴 했는데 그걸 제외해도 80점이야.”
“엄청 잘했네...? 믿고 있었어...!”
자신의 일처럼 좋아해주는 미유키.
그녀의 칭찬에 입이 함지박 만해진 테츠야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열심히 하긴 했네. 증오스런 놈이지만 이번엔 잘했다고 해주마.
테츠야에게 살짝 엄지를 들어준 나는, 놈을 몇 번이나 치하하며 박수까지 쳐준 미유키의 눈이 내게로 향하자 표정을 관리했다.
“마츠다 군은?”
“몰라.”
얼굴색은 흙빛에 목소리마저도 가라앉은 날 보고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았다고 생각했을까?
미유키가 슬쩍 내 다리에 한손을 올리더니, 힘내라는 듯 톡톡 두드렸다.
“직접 봐라. 난 화장실 간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미유키에게 답을 적은 노트를 내밀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로 나왔다.
그리고는 미유키에게 내 점수가 만족스러우면 옥상으로 올라오라는 메시지를 하나 남겨놓았다.
쉬운 문제를 몇 개 틀리긴 했다.
하지만 배점이 높은 문제는 가장 어려운 한 문제를 제외하면 모조리 맞추었다.
그 가채점 결과는 86점이었다.
솔직히 미유키가 80점이 목표라 하긴 했지만, 수학에 테츠야보다도 약한 모습을 보인 내게 진짜로 그 점수를 기대한 건 아니었을 터였다.
하지만 난 보란 듯이 80점을 넘겼다.
아마 미유키는 지금쯤 대다수의 문제를 맞춘 내 노트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겠지.
테츠야는 또 내게 졌다는 생각에 열등감이 마구마구 차오를 테고.
기분이 상당히 좋다.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도대회 때부터 지금까지 내 앞길에 청신호가 켜져 있으니까.
앞길은 탄탄대로, 날씨는 맑음.
주인공 버프를 잔뜩 등에 업은 나는 혼자 실실 쪼개며 어슬렁어슬렁 옥상으로 향했다.
이번 학기에 큰 사건이 일어났었던 옥상은 이제 접근 금지가 아니었다.
푯말이 있지도 않았고, 문 또한 잠겨있지 않았다.
당당하게 옥상으로 들어간 나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마냥 겨울치고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미유키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미유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에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인 내가 물었다.
“왔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내가 고득점을 한 것이 자랑스러운 모양.
자신의 제복 치마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내게 다가온 그녀가 자신의 큼지막한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왜 옥상으로 오래?”
“상 받으려고.”
“상?”
“목표점수를 넘겼으니까 보상이 있어야지. 그래야 열정도 더 생기는 법이라고.”
“아니... 남들을 위해서 시험을 본 건 아니잖아. 목표를 정해주긴 했지만 그건 마츠다 군 스스로 만족을 할 수 있는...”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문 잠가.”
미유키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직감한 듯 반 발자국 뒷걸음질을 친 그녀가 말했다.
“아, 안 돼... 지금은...”
“왜.”
“오후시험 남았잖아...!”
“근데?”
“근데라니... 일단 시험이 끝날 때까지는...”
“집중해야한다고?”
“.... 그렇지...”
여운이 엄청 오래 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어느새 문에 등을 대어버린 미유키에게 성큼 다가갔다.
이후 미유키의 허리춤에 자리한 옥상 문을 잠그며,
철컥-!
그녀의 한쪽 다리를 살짝 들어올리고, 제복 치마를 위로 걷어냈다.
“앗...!”
그러자 움찔한 미유키가 본능적으로 내 목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들린 다리의 실내화는 그녀가 잔뜩 긴장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아래로 쭈욱 뻗쳐있었다.
과도하게 힘을 주고 있는 그녀의 뽀얀 다리를 살살 어루만져주면서 몸을 밀착시킨 나는,
“꼬, 꼭 이래야 돼...? 오후에 하면 안 돼...?”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한 미유키의 제안에 히죽 웃었다.
“안 돼.”
“지금 점심시간인데...? 우리 밥 먹어야...”
“빨리 끝낼게.”
“마, 마츠다 군은 맨날 그런 소릴 하면서 빨리 끝낸 적이... 흣!”
무어라고 빠르게 꿍얼거리던 미유키가 돌연 자신의 숨을 훅 삼켰다.
볼록하게 솟아오른 제복 바지가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맞닿았기 때문.
순식간에 벌개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 씹은 그녀가 웅얼거렸다.
“추운데...”
“더워지잖아.”
“.... 그, 그러면 진짜 짧게 끝내... 약속이야...”
“알았다니까.”
“그, 그리고 안에는 하지 마... 밖에다가 해...”
애초에 내가 안에 쌀 거라고 상정을 한 채로 말하는 그녀가 꼴린다.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미유키의 새하얀 목에 입술을 대면서 가슴에 손을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그녀의 몸을 탐해나갔다.
**
“미유키, 샤워했어?”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기 직전 교실로 돌아온 미유키를 향한 테츠야의 물음에, 상기된 얼굴이 남아있던 미유키가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대답했다.
“응. 문자 남겼는데 못 봤어?”
“보긴 봤는데... 샤워는 갑자기 왜?”
“아... 오늘 조금 졸리길래 잠도 깰 겸... 혹시 급식실 앞에서 기다렸어?”
“아냐. 문자 보고 친구랑 먹었어.”
“잘했네... 다음 시험도 힘내보자.”
“그래...”
수긍하는 테츠야의 표정은 그다지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내게 수학시험마저 져버려 기분이 다운된 것이다.
그러게 더 열심히 노력했어야지.
소꿉친구의 자리마저도 점점 희미해져 가는데, 죽기 살기로 하지 않은 네 잘못이다.
속으로 놈을 비웃은 나는, 내 눈치를 흘끗 보며 자신의 자리에 조신하게 앉는 미유키에게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미유키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작거리는 건 덤.
아직도 옥상에서의 여운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보며 피식하던 나는, 감독관이 들어오자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왜 이렇게 시험이 싫을까.
물론 시험 또한 청춘물의 클리셰 중 하나고, 수학시험 이후 나머지 시험 성적도 꽤 괜찮게 얻을 자신이 생기긴 했지만 참... 짜증난다.
“집중해. 바보야...”
이런 날 향한 미유키의 타박.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그녀를 돌아본 내가 조용히 물었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잘 거냐?”
“.... 몰라. 생각해보고 결정할래.”
아카데미 내에서 큰일을 치루고 나면, 미유키는 잠깐 동안 새침한 태도를 보인다.
매번 그랬다. 규정을 어기게 되어 제 스스로에게 화는 나는데, 그렇다고 싫은 건 또 아니라서 약간 찔리는...
그 혼합된 반응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거다.
귀여운 짓을 하는 그녀를 보며 낄낄거리던 나는, 감독관이 교탁을 두어 번 두드리자 책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유키의 말대로 집중하자. 마지막 시험까지 잘 치러야 수학여행 때 당당하게 말하지.
시험 잘 봤으니까 너랑 한 방에서 자겠다고.
**
마지막 시험까지 모두 끝나자, 학생들의 어두웠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해방감을 느낀 나 또한 그들과 비슷한 얼굴로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는 기다란 날숨을 내뱉는 테츠야에게 말했다.
“잘 봤냐?”
“나? 그럭저럭...”
수학 가채점을 하기 전처럼 면상에 자신감이 서려있다.
잘 본 건가? 아니면 또 착각을 하는 건가?
후자일 것 같긴 하지만 점심시간에 똥볼을 한 번 찼으니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닌 듯하다.
“너는 어때?”
이어지는 놈의 말에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나도 그럭저럭 본 것 같은데.”
“그래? 잘 봤으면 좋겠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기는.
실소를 터뜨리는 것으로 놈과의 대화를 끝낸 나는, 감독관과 대화를 나눈 미유키가 잠깐 주목해달라는 말을 하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모레 홋카이도로 수학여행 가는 거 알지? 옷 여벌이랑 세면도구는 따로 구비해야 되고, 날씨가 엄청 춥다고 하니까 방한용품 잘 챙겨. 내일 다시 공지할게.”
““네에...!””
이구동성으로 들려오는 대답에 흡족해한 미유키가 모두들 수고했다고 말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이후 상체를 내 쪽으로 빼며 물었다.
“오늘 부활동 안 하지?”
“어.”
“그럼 테츠야 군이랑 둘이서 있어. 나 학생회실에 들러야 돼.”
“학생회실에서 뭐하는데?”
“평소랑 똑같지 뭐. 교내에서 생긴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고, 다음 학기와 관련된 회의랑...”
“교내에서 생긴 문제? 오늘 점심처럼?”
그 말에 미유키가 화들짝 놀라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왁자지껄한 교실의 분위기를 보고 안도한 그녀가 내 허벅지를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리더니 눈을 부릅떴다.
“조용히 해...!”
“조용히 말한 건데.”
“그냥 말을 하지 마...!”
“미안, 미안. 회의 끝나면 연락해라. 책가방은 놓고 가고.”
“.... 응.”
가방에 책을 무더기로 집어넣은 미유키가 그것을 내 책상 위에 잘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쓸린 틈을 타, 자신의 가녀린 손으로 내 뒷목을 사르르 쓰다듬어주더니 교실에서 나갔다.
테츠야가 미유키의 이런 스킨십을 봤었어야하는 건데...
친구랑 대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구나. 아쉽다.
그래도 수학여행 때 미유키와 대놓고 붙어 다니는 날 보여줄 예정이니까 그걸로 위안을 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