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에서 일어나 미유키의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두른 나는 친구와 게임 이야기를 하는 테츠야를 툭 건드렸다.
“야. 먼저 간다.”
“어디? 오늘 미유키가 카페 가자고 했잖아. 가채점한다고...”
“미유키 가방 차에 놔두고 부실에 잠깐 들르려고.”
“부실? 오늘 부활동 없는데?”
“내일은 부활동 그대로 하잖아. 대비해서 수건 몇 장 개어놓게.”
“성실하네. 도와줄까?”
“됐다. 얼마나 걸린다고... 간다.”
“응, 수고해.”
네가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니까 히로인을 나한테 전부 빼앗기는 거란다.
히로인 공략을 위해서는 아무도 없는 장소라도 탐색이 필수 아닌가?
그러다 히로인을 발견하고 호감도를 위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발품을 팔지 않는다는 건 주인공 실격이지.
안심이 된다, 안심이 돼.
**
감독마저도 없어 조용한 부실에서, 나는 간단하게 매니저 일을 했다.
호구 상태를 확인해본 뒤 건조실에 널린 수건을 걷어서 개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렌카가 들어왔다.
“뭐야, 마츠다잖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치나미와 렌카, 둘 중에 한 명은 올 줄 알았다.
이래서 내가 부실에 오는 거지.
치나미가 왔다면 어둑한 부실 안에서 단둘이 그렇고 그런 일을 하려 했는데... 렌카가 온 게 조금은 아쉽다.
그리 생각한 내가 시큰둥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요.”
“이젠 인사마저도 줄이네.”
“스승님은 어디 있어요?”
“휴게실에서 자고 있어. 머리를 너무 많이 써서 쉬어야겠대.”
“집으로 돌아가서 자도 되지 않나요?”
“오늘 나랑 놀기로 해서 잠깐 눈만 붙이는 거야.”
자신과 논다는 부분을 강조하는 렌카.
나더러 오늘 치나미와 놀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듯 보이는데 착각일까?
“시험은 잘 봤어요?”
“그냥저냥. 너보단 잘 봤을 것 같아.”
“도발하는 거예요? 후회할 텐데?”
“.... 나는 농담도 못해?”
자신감이 순식간에 팍 죽어버린 그녀가 귀엽다.
“나랑 농담하는 건 싫어했잖아요.”
“아니 뭐... 해볼 수도 있지...”
“사실은 농담이 아니라 성적 이야기가 나오니까 갑자기 꼬리를 마는 거 아니에요?”
“너 원래 그렇게 망상을 잘하니?”
“저도 농담 한 번 해봤습니다. 2학년들은 수학여행 어디로 간대요?”
“오키나와.”
겨울에 오키나와라... 한적해서 관광하기엔 좋겠네.
치나미한테 사진 보내달라고 해야지.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렌카에게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흠칫한 그녀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 뭐야 그 제스처는?”
“수건 개는 거 도와주세요.”
“싫어.”
“도와줘요.”
“싫다니까? 아, 맞다. 너한테 보여줄 거 있어.”
그리 말한 렌카가 감독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손바닥 두 개를 합친 크기의 얇은 회색 종이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가 개어놓은 수건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에요?”
“봐봐.”
그건 누군가가 잘 오려놓은 신문이었다.
그것도 내 사진이 찍혀있는.
뭔가 싶어 신문을 자세히 보니, [검도계에 파장을 일으킬 초신성 등장!]이라는, 다소 오그라드는 제목과 함께 내가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수상할 때 찍힌 사진이 떡하니 나와 있었다.
“나네?”
“어. 너야. 감독이 지역지 신문에서 오리신 건데, 부실 게시판에 붙여놓으랬어.”
그래서 렌카가 부실에 온 거구나.
1면도 아니고 그냥 지역지에 지나가듯 쓰인 기사긴 하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기사가 날 정도라면 대회 관계자들도 날 유의 깊게 봤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한 내가 말했다.
“좋네요. 찢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붙여주세요.”
“.... 말하는 거 봐. 진짜 밉상이네.”
투덜거린 렌카가 부실 가운데에 있는 게시판으로 가더니, 내가 나온 기사를 압핀으로 꽂기 시작했다.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원 중 한 명이 신문에 난 게 자랑스럽나보다.
그 귀여운 행동에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린 나는 방학 때 쌓일 렌카와의 여러 추억거리를 생각하면서, 얌전히 수건을 갰다.
나와 테츠야의 가채점 결과를 비교해본 미유키가 말했다.
“둘 다 잘했네?”
누가 이겼는지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릴 쳐다보는 표정이 일관되게 좋은 것으로 보아 성적은 엇비슷한 것 같았다.
공식적인 시험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정도면 치고 박고 할 정도는 되나 싶다.
만약 점수 차가 많이 나지 않는다면 이번 승부는 내 패배라고 볼 수 있었다.
왜? 나는 테츠야보다 미유키에게 더 많은 과외를 받았으니까.
갑자기 자존심이 팍 상하려고 하는데,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는 더 열심히 준비해야할 듯하다.
“기대이상이야. 이 정도면 상위권은 확정이라고 봐.”
연신 이어지는 미유키의 칭찬에,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인 테츠야가 말했다.
“다 미유키 네 덕분이지 뭐...”
스윗한 척하기는. 구역질이 난다.
뒷머리에 손깍지를 낀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끝났으면 가자.”
그러자 자신의 눈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인 미유키가 물었다.
“벌써?”
“갑자기 확 피곤해지네. 빨리 너네 데려다주고 집에 가서 자고 싶어.”
“아 진짜? 그럼 일어날까?”
그리 말한 미유키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 먹은 케이크 그릇과 어질러진 종이를 정리한 우린 밖으로 나와 차에 탔다.
간만에 테츠야를 태워서 그런지 차 안의 냄새가 좋지 않다.
내부세차를 한지 얼마 안 됐는데 또 하게 생겼네.
안전운전을 하는 척 테츠야의 집 앞까지 최대한으로 빨리 간 나는 차를 세우자마자 뒷좌석을 흘깃거렸다.
“다 왔다. 내려라.”
“고맙다. 연락할게, 미유키.”
저 개새끼는 시도 때도 없이 여자를 밝힌다.
아니지, 테츠야는 그냥 평범하게 미유키를 대하고 있는데, 내가 색안경을 낀 채로 놈을 보고 있어서 마냥 기분이 나쁜 건가?
라는 생각을 해보았으나, 금세 털어냈다.
내가 테츠야를 탐탁찮게 보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테츠야를 향한 내 마음 같은 시원찮은 것을 신경 쓸 시간에 미유키와 한 마디라도 대화를 더 나누는 게 값졌다.
놈이 내리자마자 차를 출발시킨 나는 천천히 서행을 하면서, 빨대로 남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미유키를 눈짓했다.
“야.”
“응?”
“10위권에 얼추 다가가긴 했냐?”
“누가? 마츠다 군이?”
“어.”
성적을 신경 쓰는 모습이 기특했을까?
눈매를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며 웃은 미유키가 대답했다.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지금까지의 평균 점수로 봤을 때, 10위권은 아슬아슬할 것 같아.”
“나오긴 나올 것 같다는 소리네?”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엄청 잘한 거야. 솔직히 10위권을 노려보라고 하긴 했지만 진짜로 가까워져서 놀랐어.”
“잘했으면 상 줘야지.”
“아 또 무슨 상이야...!”
“보상이 있어야 나도 더 열심히 하지.”
“하... 일단 들어보기라도 해보자. 무슨 상이 받고 싶은데?”
“수학여행 갔을 때 같은 방 쓰자.”
“무, 뭐...?”
입을 살짝 벌리는 미유키.
다짜고짜 저런 말을 하니 당황스럽나보다.
운전을 하고 있는 날 멍하니 주시하던 그녀가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될 것 같은데...”
“왜.”
“아니이... 2인 1실이 원칙이고... 남녀 방은 따로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구하면 되지.”
“.... 진심이야?”
“단둘이 여행 간 기분도 내고 좋잖아. 숙소가 어디인지 미리 알려주면 그쪽으로 내가 구해놓을게.”
미유키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꼬기 시작했다.
무언가 생각을 하는 듯한 모습.
혹하긴 하지만 규정에 위배될까 다소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는 듯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그녀를 한 차례 곁눈질한 내가 약간 낮아진 투로 말했다.
“밤에 잠깐만 같이 있자.”
“.... 아니 뭐... 음... 나는 들키지만 않으면 딱히 상관없는데... 룸메이트가 될 사람이 의심을 해버리면...”
“그래서 싫어?”
“누, 누가 싫대...?”
“그럼 됐네?”
“.....”
“집에 돌아가서 숙소 이름 보내놔. 예약할 테니까.”
그 말에 미유키가 자신의 다리 사이로 양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말은 곤란한 듯 했어도, 미유키 또한 나와 여행 기분을 내고 싶은 마음이 큰가보다.
밤에 분위기가 살도록 데운 사케를 준비해놔야지.
**
다음날, 부활동 시간.
호구 보관실 안에서 치나미와 함께 수학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어깨를 추욱 늘어뜨린 그녀의 귀여운 투정에 피식했다.
“오키나와가 아니라 오카야마를 갔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오카야마요?”
“네. 복숭아의 본고장이니까요.”
“.... 그렇군요. 많이 아쉬워요?”
“그건 아니에요. 즐겁게 놀아야 마땅하겠지요.”
“다행입니다. 방은 부장이랑 쓰겠죠?”
“물론이에요.”
“틈틈이 사진 보내줘요.”
치나미의 얼굴이 복숭아 색으로 물들었다.
뭔가 야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혹시 알몸 사진 같은 걸 상상했나?
치나미의 변태력이 나날이 늘어가는 느낌이다.
“알겠어요... 참, 게시판에 붙은 신문기사 보셨나요?”
“어제 봤습니다. 부장이 보여주더라고요.”
“앗, 그렇군요. 저는 후배님이 너무너무너무...”
“자랑스럽다고요?”
“네.”
“감사합니다. 다 스승님의 하해와도 같은 은혜 덕분이죠.”
“무후후... 사탕발린 말을 아주 잘 하시... 흐먓!?”
말을 하다 말고 특유의 탄성을 터뜨리는 치나미.
갑작스레 치나미의 잘록한 허리를 만지작거린 나는, 그녀의 토실토실한 볼살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자 엉덩이 쪽으로 손을 내렸다.
“믓...!”
오랜만에 만져보는 치나미의 살결은 여전히 말랑말랑하고, 탱글탱글했다.
계속 만져도 질리지가 않을 것 같은 기분.
치나미의 엉덩이 밑부분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던 내가 물었다.
“여기서 잠깐 마사지해줄까요?”
“.....”
그러자 자신의 분홍색 눈동자를 데굴 굴려 보관실을 둘러본 치나미의 고개가 아주 작게 끄덕여졌다.
그 무언의 대답에 히죽거린 나는 치나미를 데리고 보관실 구석으로 갔다.
이후 그녀를 내 앞에 앉힌 뒤 다리를 중점적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헥...!”
도복 바지 위로 손길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떠는 그녀.
몸을 달싹이며 무릎을 굽혔다가 피는데, 그녀 또한 내 손길에서 좋은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치나미의 어깨 위에 턱을 괸 나는, 그녀의 부드럽기 그지없는 볼살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며 야릇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당을 얻어둬야 수학여행도 힘이 나는 법이지.
오늘 충분히 충전시켜놓고 가야겠다.
**
매번 차를 타다가 대중교통을 타니 답답하다.
발 디딜 틈이 없는 전철 안인데다, 더군다나 내 앞에 포동포동한 직장인이 있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거의 낑겨있다시피 한 채로 미동도 없이 서있던 나는, 전철이 아카데미가 있는 역에 서자 어렵사리 내렸다.
이후 어슬렁어슬렁 걸어 아카데미 정문으로 가, 바글바글한 1학년 학생들을 지나 어느 빨간 버스 앞에서 1-A반의 깃발을 들고 있는 미유키를 찾았다.
“왔어? 짐칸 쪽에 기사님이랑 가이드 분 계시거든? 가방 드리고 버스에 타있어.”
날 먼저 발견한 미유키의 말.
삶에 의욕이 하나도 없는 사람마냥 한손을 허공에 휘저은 내가 농담을 건넸다.
“깃발 내가 들까? 넌 키가 작아서 애들이 못 찾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