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왜 몰라 씨발아.
그리고 스키를 엄청 잘 타는 게 아니라 보통 이상으로 타는 건데 오버하기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동그랗게 뜬 내가 말했다.
“스키를 잘 탄다고?”
“응. 미유키는 매 겨울마다 가족들이랑 같이 꾸준히 스키장을 가거든.”
“그건 몰랐네. 넌 잘 타냐?”
“나는 잘 타는 건 아니고, 어떻게 타는지는 알아. 미유키네 가족들이랑 가끔 간 적이 있어서.”
자신이 미유키네와 무척 친하다는 걸 어필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
물론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질문에 대답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속에 구렁이를 키우고 있는 테츠야를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겠지.
“너는 어때? 잘 타?”
이어지는 테츠야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은 내가 대답했다.
“한 번도 타본 적 없어.”
“그래? 이번 기회에 강사한테 배우면 되겠다. 엄청 재미있으니까 마음에 들 거야.”
난 미유키한테 배울 건데... 쓸데없이 챙겨주는 척하기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있는 놈의 등을 툭 치는 것으로 대화를 끝낸 나는, 미유키가 다들 이쪽으로 모이라는 말을 하자 얌전히 걸음을 옮겼다.
“미유키, 애들이랑 전망대 구경 갈래? 근처에 멋진 곳 있다는데.”
담임과 함께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잠시 목을 축이고 있던 미유키에게, 테츠야가 다가가 저런 말을 꺼냈다.
로비 소파에 거의 누워있다시피 앉아있던 나는 귀를 쫑긋하며 두 사람의 대화를 들어보았다.
“미안. 할 일이 좀 있어서.”
“할 일?”
“응. 선생님이랑 스키장에 전화해서 대여할 장비 같은 것들이 잘 있는지 확인해봐야 돼. 밖에 안 나간 애들이 궁금한 게 있어서 찾을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자리를 지켜야할 것 같아.”
“아... 그렇구나. 아쉽다.”
“나도 엄청 아쉬워. 나중에 시간 있으면 가자.”
“알았어. 뭐 도와줄 건 없을까?”
“괜찮아. 모처럼 여행 온 거니까 많이 즐겨야지.”
“너는 못 즐겨서 마음이 조금 아프네.”
“나도 내일부터는 신나게 즐길 거야.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그럴게. 사진이라도 보내줄까?”
“응, 좋지.”
“그럼 갈게?”
“응. 조심히 놀다 와.”
음침하게 손을 흔든 테츠야가 자신의 친구 두 명과 함께 료칸을 떠났다.
그래도 친구를 만들긴 했네. 궁상맞게 혼자 나갈 줄 알았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모르겠다.
“마츠다 군, 지금부터 뭐할 거야?”
어느새 다가와 내 맞은편에 앉은 미유키의 물음.
기다랗게 하품을 한 내가 대답했다.
“너랑 있으려고.”
“나 여기 가만히 있을 건데?”
“나도 가만히 있지 뭐.”
미유키의 입가가 쭈욱 찢어졌다.
자신과 함께 있겠다니 기쁜 모양.
그녀가 좋아라하는 모습을 보니, 테츠야 때문에 팍 상했던 기분이 다시 좋아지려고 한다.
테츠야는 멀리하고 날 가까이하는 모습이 기특하기까지 하다.
놈을 잘 대해주는 게 조금 거슬리긴 한다만 15년이 넘도록 알아온 소꿉친구니까... 저런 반응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겠지.
조만간 딱 선을 긋게 만들 거지만.
내 바로 옆으로 자리를 옮긴 미유키가 물었다.
“마츠다 군은 스키장 가면 뭐 탈 거야?”
“너 타는 거.”
“그럼 보드 탈래?”
“잘 타냐?”
“그냥 타기만 하는 정도야.”
스키보다는 아니지만 보드도 잘 타면서 겸손한 척하기는.
우리 미유키는 못하는 게 뭘까? 궁금해진다.
“그럼 나 가르쳐줘. 한 번도 안 타봤어.”
“진짜? 단 한 번도? 친구들이랑 스키장 안 가봤어?”
“어.”
“그래...? 그럼 내가 잘 알려줄게.”
갑자기 미유키의 눈빛이 열의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난 진지하게 가르침을 받고 싶지 않고, 그냥 미유키와 꽁냥꽁냥 데이트를 하고 싶은 건데...
저러니까 진짜로 수업만 해줄 것 같잖아.
“아, 그리고 열쇠 줘.”
주변에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내게 손을 내미는 미유키.
품에서 예약한 방의 열쇠를 꺼낸 나는, 그것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미유키가 재빨리 주머니에 열쇠를 집어넣었다.
“몇 시에 가면 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아홉 시나 열 시쯤이면 적당하지 않을까? 누가 먼저 가든 메시지 남겨놓는 걸로 하자.”
“응...”
“기대 되냐?”
“뭐래...”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낀 미유키가 엄지와 검지를 벌리더니 내 턱에 대었다.
그리고는 내 얼굴을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그 뜬금없는 행동에 피식한 내가 물었다.
“뭐하냐?”
“그냥.”
예전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손을 잡기만 해도 기겁을 하던 그녀인데, 이제는 제가 먼저 대놓고 애정표현을 하고 있다.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다.
“조금 이따가 스키장에 전화 걸 건데 도와줄 거지?”
“어떻게 하면 되는데.”
“웨어랑 액세서리 다 준비 됐냐고 물어보고, 보드랑 스키 개수 파악해야 돼.”
“네가 전화로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냐?”
“옆에서 받아 적어.”
“알았다.”
“글씨 예쁘게 쓰려고 노력해보구.”
“개판으로 써도 알아보잖아.”
“그래도.”
“알았다. 잔소리는...”
“이걸 왜 잔소리라고 생각해? 너무 삐뚤어진 거 아니야?”
“나 원래 그런 놈인데.”
“아닌데?”
“맞는데.”
“아닌데.”
아아... 이렇게 시시콜콜한 대화만 나누고 있어도 사랑이 충만해진다.
지금 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간다 해도 아주 만족스러운 여행이라고 확언할 수 있을 정도로 즐겁다.
**
첫날은 딱히 할 게 없었다.
짧은 자유시간이 끝나고 저녁을 먹은 뒤 여독을 푸는 게 끝이었다.
나중에 방에서 마실 사케를 따로 사놓고 따뜻한 방 안에서 밤이 될 때까지 빈둥거리던 나는, 인원파악을 한다는 방송이 들려오자 노곤한 몸을 일으켰다.
이후 미닫이로 된 문을 열고 퉁퉁이와 함께 문 앞에 섰다.
남자 숙소에 있는 학생들 전부는 유카타를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신나게 온천을 즐기고 료칸에 온 기분을 내려는 모양.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이 오더니 복도 끝에서부터 인원을 세기 시작했다.
미유키와 부반장이 함께 올 걸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남자숙소다보니 빠진 듯했다.
똥겜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도키아카주제에 이럴 땐 꼭 개연성을 챙기는 게 어이가 없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인원파악을 끝낸 담임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좋아. 나는 복도 바로 오른쪽 방에 있으니까 무슨 일 생기면 찾아오고, 다들 푹 쉬어라. 괜히 술 마신답시고 나가서 사고 치면 벌점으로 안 끝나니까 그렇게 알고.”
마실 거면 방에서 마시라는 소리였다.
경고를 한 담임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복도가 시끌벅적해지더니 학생들이 방에서 사온 술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몇 개의 방에 우르르 들어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마츠다, 너도 같이 마실래? 타쿠미가 너랑 같이 자기 방에서 놀자는데.”
큼지막한 검은 비닐봉투를 든 퉁퉁이의 말.
타쿠미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나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됐어.”
“그러면 여기 있으려고?”
“아니. 산책이나 좀 하게.”
“.... 이 날씨에? 그렇게 입고?”
“얼어 죽을 일 있냐? 당연히 껴입어야지. 내일 시간 되면 같이 마시자.”
“그래? 알았어.”
퉁퉁이 이 새끼도 내가 많이 편해졌나보다.
예전엔 부르면 쭈구리처럼 어버버 하며 대답했는데 지금은 당당한 걸 보니까.
나는 외투 하나만 걸치고 밖으로 나가는 척 복도의 코너를 돌아, 우리 반 학생들이 묵고 있는 숙소에서 벗어나 따로 예약을 해놓은 방으로 들어갔다.
미유키가 먼저 오지 않았기에, 나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겨놓고 로비에 전화를 걸어 데우면 단 맛이 살아나는 사케와, 그것을 담는데 필요한 도쿠리, 그리고 버너를 가져다달라고 했다.
그렇게 직원에게 물건을 받고 사케를 중탕해서 데우고 있을 무렵,
드르륵.
미닫이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미유키가 들어왔다.
“나 왔어... 뭐해?”
근처에 누가 있기라도 한 양 목소리를 낮춘 그녀의 뺨은 약간 붉어져있었다.
술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것으로 보아 친구들과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온 듯했다.
얇은 유카타의 솔기선 아래로 보이는 미유키의 새하얗고 얇은 발목을 한 차례 곁눈질한 내가 대답했다.
“사케 데우고 있었지. 미호인가 뭔가 하는 애한테는 뭐라고 하고 왔냐?”
“그냥... 산책 좀 하다가 영화 한 편 보고 온다구...”
핑계가 비슷하네. 날 닮아가는 건가?
아니, 내가 미유키를 닮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 술 마셨어?”
“응. 맥주 한 캔 반.”
“왜.”
“하도 마시라고 하길래 어쩔 수 없이 그랬어.”
그리 말한 미유키가 총총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맞은편에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기포가 올라오고 있는 냄비 가운데의 도쿠리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마셔본 적 있어?”
“아주 가끔.”
“난 사케는 처음 마셔보는데...”
“아저씨한테 받아본 적 없어?”
“맥주는 몰라도 사케는 없지...”
“그래? 마음에 들 거야.”
사케가 적당히 데워졌으리라고 확신한 나는 조심스럽게 도쿠리를 꺼냈다.
이후 도쿠리가 적당히 따스해진 걸 확인한 뒤, 미유키의 잔에 사케를 조금 따라주었다.
“마셔봐.”
“벌써 마셔? 안주도 없이?”
“그냥 조금 홀짝이기만 해봐. 맛이 어떤지만 보게.”
“왜 내가 맛봐? 마츠다 군이 마셔 봐도 되잖아.”
“틱틱대지 말고 마셔봐.”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민 미유키가 잔을 느릿하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기울이며 술맛을 보더니,
“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맛을 다시고는 사케를 한 모금 더 홀짝였다.
“이거 왜 달아?”
“맛있지?”
“응. 엄청 단데...?”
입가에 미소까지 띤 것으로 보아 사케가 마음에 든 듯했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이래서 사람은 준비를 해야 돼.
어느새 사케를 쭈욱 들이켠 미유키가 딱 봐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인상을 쓰더니 빈 잔을 내밀었다.
“더 줘.”
“천천히 마셔야지 뭐하냐?”
“맛있는데 어떡해. 빨리 줘. 마츠다 군도 잔 채워.”
크리스마스 날에 하이볼을 마셨던 때처럼 달리려고 하는 건가?
천천히 분위기를 잡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같이 눕거나 노천탕에 들어가려 했는데, 이러면 조금 곤란해진다.
“안주 시킬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봐. 더 데우게.”
“여기서 더 데우면 더 달아져?”
“그렇지는 않을 걸?”
“그럼 지금 마실래.”
“떼쓰지 마. 천천히 마셔야 덜 취해.”
그 말에 아쉬운 듯 기다란 콧바람을 내쉰 미유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에 힘을 빡 주고 있는 미유키를 바라보며 실소를 지은 나는, 그녀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그러자 미유키가 자신의 엉덩이를 들썩이더니 방석을 질질 끌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 올 때부터 살짝 흐트러져보였던 것도 그렇고, 지금 행동도 그렇고...
미유키가 맥주를 한 캔 반이 아니라, 다섯 캔 정도 마신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신선한 모습이다. 개구쟁이 같아서 좋네.
그리 생각한 나는 가까이 다가온 미유키를 끌어안고, 천천히, 느릿하게... 마치 흔들의자에 앉은 것처럼 몸을 앞뒤로 밀고 당기기 시작했다.
스윽.
그에 자신의 양 다리를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편안하게 자세를 잡는 그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몸을 완전히 맡겨버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인 내가 말했다.
“솔직히 말해라. 맥주 얼마나 마셨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