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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09화 (226/313)

바쁜 터라 호칭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내 의도를 눈치챘던 걸까?

렌카는 아까와는 다르게,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냉동고에 얼려놓은 맥주잔을 꺼냈다.

“켄! 스시용 접시 좀 부탁한다!”

“예! 가요! 근데 아카미 네 접시는 아직이야?”

“어엉? 아카미는 방금 주문받았잖냐!”

“받자마자 만들라고! 손 놀리지 말고! 주문 계속 늦어지고 있잖아!”

“미안! 손님들한테 맥주랑 음료 중에 뭐 드실지 여쭤보고 서비스 드려라!”

그 말에 가게 안에서 자그마한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식당 자체가 크지 않으니 이런 서비스 정도는 손해 축에도 못 끼지.

삼촌들의 센스가 시간이 지날수록 높아지고 있는 게 보인다.

이대로만 가면 괜찮을 것 같다.

그리 생각한 나는 렌카를 도와 손님들에게 음료를 무상으로 제공해준 뒤, 고무장갑을 끼고 다시 설거지에 뛰어들었다.

**

저녁 피크타임까지 지나자 가게 안이 한산해졌다.

그 틈을 탄 나는 삼촌들과 렌카에게 가게 분위기를 가라앉히자고 했다.

충분한 관광을 즐긴 가족, 연인 단위의 관광객들에게 오늘을 마무리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주는 게 낫고, 슬슬 관광객 대신 지역주민들이 많이 올 타이밍이라는 이유를 대자, 삼촌들은 순순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점심에 비해 무척이나 조용해진 가게 안.

나는 렌카와 함께 한층 편안해진 상태에서 주문을 받았다.

“오늘 정말 고생했어.”

탈의실 앞의 간의 의자에 앉아있던 렌카의 진심이 담겨있는 치하.

삼촌들에게 허락을 받고 음료수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들이켠 나는, 렌카에게도 캔을 하나 내밀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거의 끝나가잖아. 재료도 거의 다 소진돼서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됐네?”

“그러게 말입니다. 옆에 앉아도 돼요?”

“아니.”

나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거절을 하는 렌카의 옆에 냅다 앉았다.

이런 내 행동을 예상했는지 픽 하고 웃고 마는 그녀.

눈빛이 조금은 순해진 것처럼 보이는데 착각일까?

깨끗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 내가 말했다.

“가게 문 닫으면 바로 돌아갈 거예요?”

“글쎄... 오늘 돌아가는 건 확실한데 언제 갈지는 모르겠어. 넌 언제 갈 건데?”

“저는 부장이 돌아갈 시간에 가려고요. 어차피 같이 돌아가야 하잖아요.”

“나 혼자 가도 돼.”

“또 이러네? 그렇게 나랑 같이 차타는 게 껄끄러워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내내 고생했으니까 너 원할 때 눈치 보지 말고 돌아가라는 뜻이었어. 사람 말은 끝까지 좀 듣지?”

“그랬던 거였어요? 미리 말을 하지...”

“.... 밉상이야 진짜.”

투덜거리는 렌카의 몸에선 블루베리 향이 강하게 풍겼다.

왜 예쁜 사람은 냄새도 좋을까.

갑자기 렌카의 땀으로 젖은 몸에 얼굴을 부비고 싶어진다.

“근데 너 목소리 쉬었어. 알아?”

이어지는 렌카의 말마따나 내 목에서는 희미한 쇳소리가 섞여서 나오고 있었다.

애초에 목청이 큰 편도 아닌데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소리를 질러대서 목에 조금 무리가 갔나보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내가 대답했다.

“그러네요.”

“목캔디라도 사줄까?”

“됐습니다. 아프진 않아요.”

“그럼 따뜻한 물이라도 줄게.”

“알아서 챙겨먹을 테니까 쉬기나 해요. 다리 주물러줄까요?”

“미, 미쳤냐? 죽을래?”

“왜 화를 내고 그래요. 순수한 호의로 묻는 건데.”

“절대 아냐. 표정이 너무 음흉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살짝 열려있는 뒷문틈 사이로 찬바람이 갑작스럽게 파고들어왔다.

그로 인해 렌카의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본 나는, 문을 꽉 닫은 뒤 그녀의 목에 두꺼운 수건을 둘러주었다.

그러자 렌카가 눈에 쌍심지를 켜며 날 노려보았다.

“.... 뭐하냐...?”

그런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인 내가 말했다.

“춥지 말라고.”

“.... 어이가 없네.”

내가 배려를 했던 거라고 판단했는지, 무어라 웅얼거리던 렌카는 함부로 자신의 몸에 수건을 두른 내게 더 이상 뭐라 하지 않고 얌전히 음료수를 마셨다.

오늘 같이 일을 하면서 우리 사이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느껴진다.

렌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날 대하는 태도를 보니 그런 것 같다.

“이건 오늘 일당이야.”

렌카와 내게 흰 봉투를 건네는 큰삼촌.

두 손으로 그것을 받은 내가 말했다.

“이번엔 안 받겠다고는 못하겠네요.”

“안 받겠다고 했으면 강제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을 거다.”

무섭게 말하지 마. 진짜 쫄았잖아.

“미안한 말이지만 또 와서 도와줄래?”

이어지는 작은삼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리는 것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전했다.

다만 혼자 오지는 않을 거다.

무조건 렌카와, 될 수 있으면 여기서 하루 묵을 수 있을 때 와야지.

“나 먼저 샤워한다?”

그 사이 렌카가 저리 말하고는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잠갔다.

샤워하는 렌카의 알몸을 우연히 엿보게 되는 그런 이벤트는 없을까?

내가 직접 만들어버리고 싶어진다.

나는 삼촌들과 여러 사적인 대화를 하다가, 샤워를 마친 렌카가 젖은 자신의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나오자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안에 있는 샤워실에서부터 풍겨오는 보라보라한 향을 맡으며 봉투 안을 살펴보았다.

일당치고는 상당히 많은 금액이 들어있다.

딱 보니 기름 값과 저번에 받지 않았던 알바비까지 계산해서 넣은 듯했다.

삼촌들이 얼굴은 저래도 참 양심적이긴 해.

좁은 샤워실 안은 렌카가 사용했던 것치고는 무척 깨끗했다.

물기를 닦아낸 바닥은 아주 약간만 촉촉했고, 거울도 닦은 흔적이 있었다.

‘꼼꼼하기는.’

내가 변태 같은 생각을 할까봐 미연에 차단을 하려고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배려겠지?

좋게좋게 생각하자.

후끈한 온수로 깔끔하게 샤워를 마친 나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맸다.

탈의실에서 나오니 삼촌들이 렌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껄껄거리는 두 사람, 그리고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렌카.

상황을 보아하니 삼촌들이 그녀를 놀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왔구나. 이거 너희들 주려고 싸놓은 거니까 갖고 가라.”

가게에서 가장 비싼 스시 세트를 포장해서 내놓은 큰삼촌.

여기서 빼는 건 예의가 아니지. 미유키랑 같이 먹어야겠다.

봉지를 집어든 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그래. 지금 돌아가려고?”

“그래야죠. 잘 지내세요.”

“오냐. 너도 잘 지내라. 오늘 정말 고마웠다.”

“시간 날 때 전단지를 좀 돌리는 게 좋겠어요. 중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전부 방학 시즌이잖아요? 삼촌들은 인상이 무서우니까 사람들한테 줄 땐 알바를 한 명 쓰는 게 좋겠네요.”

“이놈이... 알았다.”

나는 장사를 해본 적도 없고, 서빙은 저번과 오늘 여기서 도와준 게 끝이다.

쉽게 말해 애송이라는 뜻.

반면 삼촌들은 장사를 오래 해온 사람들이다.

보니까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좋고, 경영에 대한 철학 또한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보면 오지랖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애송이의 조언을 저렇게 순순히 수용하고 수행한다는 건 보통 마음가짐으로는 쉽지 않다.

마인드가 깨어있으니, 이들은 가게를 잘 운영해나갈 것이다.

근데 저번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었나?

렌카가 삼촌들과 대화를 나눌 시간을 더 줘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에게 먼저 차에 가있겠다고 말했다.

이후 삼촌들과 인사를 하고 차로 돌아가, 뒷좌석에 포장된 스시를 잘 놓아두고 미리 시동을 걸어 히터를 틀어놓았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렌카가 조수석에 탔다.

무표정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

뒷좌석에 있는 내 몫의 스시 옆에 자신의 것을 내려놓은 그녀가 내게 병 하나를 내밀었다.

“마셔.”

“뭔데요?”

“갈근탕. 감기 걸렸을 때 먹는 건데, 인후통에도 좋대.”

섬세하기는. 키스하고 싶어지게 하네.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갈근탕 병을 받아든 나는 뚜껑을 따고 그것을 원샷했다.

“단데 쓰네요.”

“약인데 단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야, 그리고 인사해.”

“무슨 인사?”

“호의를 베풀었잖아. 뭐라고 해야 되겠어?”

내가 자주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렌카.

피식한 나는 차를 출발시키면서 그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그래. 나도 고마워.”

“뭐가요?”

“삼촌들 도와줘서.”

“소원이었는데요 뭘.”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인 나는,

“켄! 잘 가라! 심심하면 놀러 오고!”

삼촌들이 가게 앞에서 날 배웅하고 있자, 그들에게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룸미러를 통해 렌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소원은 이제 다 끝났네요.”

“.... 맞아. 끝났어.”

“섭섭하지 않아요?”

“아니, 시원하기만 해.”

“그럼 시원섭섭하다고 합의 볼까요?”

“섭섭한 감정은 전혀 없는데 내가 왜?”

“하나도 없어요? 진짜? 조금도?”

“없어. 해방감만 느껴져. 아주 후련해. 아주 길고 긴 시간이었어. 네 소원은 끔찍 그 자체였지.”

“말을 너무 서운하게 하네요.”

“사람을 불러다가 가만히 서있게 하고, 철창에 가둬놓고, 메이드 복 코스프레까지 시켰는데 그럼 안 끔찍해?”

“편의는 많이 봐줬잖아요.”

그 말에 렌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하나만큼은 진짜 쥐꼬리만큼 고맙긴 하네.”

“그렇게 싫었어요? 난 부장이 그런 소원을 들어줘서 진짜 좋았는데. 우리 그거 더 할래요?”

“안 해...!”

“한 번만 더 해요.”

“안 한다고.”

“딱 한 번만. 진짜 마지막.”

“싫어.”

“왜? 하자.”

“.... 반말하지 마. 죽을래?”

이래서 렌카와 장난 식으로 언쟁을 벌이는 걸 못 끊겠다.

살살만 긁어줘도 고양이마냥 예민하게 구니까 마구마구 괴롭히고 싶어진다.

“한다고 알고 있을게요. 원래 그렇게 합의 봤었잖아요. 대회 때 잘해서.”

“또 그런 식으로 억지 부리네? 합의한 적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무시하면 될 말도 따박따박 받아치는 게 재미있다.

“얌전히 갈까요 그럼?”

“제발 그래줬으면 좋겠어.”

“알겠어요. 한숨 자요.”

“.... 그래. 심심하면 깨우든지 해.”

툭 던지듯 말한 렌카가 날 등지며 몸을 돌렸다.

저 심심하면 깨우라는 말이 왜 이렇게 귀엽게 들릴까.

화는 나지만 장거리를 운전해야하는 날 배려하려는 마음이 느껴져서 웃기다.

**

“부장.”

“.....”

“부장.”

몇 번을 불러보아도 일어나지 않는 렌카.

입까지 살짝 벌어져있다. 안 그런 척하고 있었어도 몸이 굉장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너무 무방비하게 잠든 거 아니야?

저 선홍색 입술 사이로 혀를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참아낸 나는 그녀의 팔을 콕콕 찔렀다.

“부장. 다 왔어요.”

“으음...”

그제야 끙끙거리며 눈을 뜬 렌카가 날 쳐다보더니,

“아...”

진이 빠진 탄성을 터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착했어...?”

“예. 도착했습니다.”

“그래...? 차비 줄게. 기름 값.”

“됐어요. 차비 대신 코스프레로 하죠.”

“그래도 상관없... 아, 아니지... 미쳤어...?”

그대로 수긍하려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부스스한 자신의 눈을 부릅뜨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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