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10화 (227/313)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나는, 뒷좌석에 놓인 렌카의 가방과 스시 세트를 집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깝네요. 물 줄까요?”

“.... 아니. 괜찮아.”

“기름 값은 됐으니까 들어가서 쉬어요. 많이 피곤해보여.”

“그러면 나중에 주든지 할게. 태워줘서 고마워.”

“됐다니까요.”

“준다니까... 어쨌든 갈게.”

힘없이 문을 연 렌카가 조심히 들어가라 말하고는 자신의 기다란 다리를 움직였다.

앞만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던 렌카, 그녀의 고개가 집 정문 앞에서 살짝 돌아가는 게 보인다.

내 차를 바라보고 있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왜 아직도 가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

아니면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을까?

내일 코미케에서 마주친 다음 물어볼까 싶다.

렌카가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감과 동시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뗀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커다란 창문 안쪽에 주황색 무드등이 아주아주 희미하게 켜져 있다.

미유키가 와있는 것 같다.

주차를 마치고 빠른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간 나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밀었다.

그러자 요 위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누워있는 미유키가 피곤한 신음을 토해내더니 상체를 일으켰다.

조용히 들어간다고 했는데 인기척이 난 모양이었다.

“왔어...?”

눈을 부비적거리며 날 맞이하는 미유키의 앞에 앉은 나는, 초밥을 다다미 바닥에 내려놓고 그녀의 눈 밑을 살살 눌러주었다.

“왔어. 초밥 먹고 다시 자.”

“초밥...? 일하고 온 데서 받아온 거야?”

“어. 참치 초밥이야. 고생했다고 주더라.”

“아 진짜? 맛있겠다... 일은 안 힘들었어?”

“그럭저럭 버틸만했어.”

“목소리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은데...”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고는 내 얼굴을 이리저리 확인해보는 그녀.

마치 일을 열심히 하고 온 남편을 걱정하는 듯한 상황이라 기껍다.

한동안 그 손길을 받아들이던 나는, 미유키가 기지개를 쭉 펴는 타이밍에 맞춰 그녀의 티셔츠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는 깜짝 놀란 그녀의 뽀얀 복부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일어난 김에 짧게 한 번만 해야지.

**

‘뭐가 이렇게 많아...’

다음날 저녁, 오타쿠 최대의 행사 중 하나라는 코믹 마켓이 열리는 장소.

그곳에 도착한 나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다.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이렇게 넓은 곳에서 렌카를 어찌 찾아야하는지 막막하지만,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부스를 알고 있다.

그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보면 훤칠한 렌카를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입장권이 없었기에 건물 외곽만 돌아다니면서, 나는 최대한의 집중력을 발휘해 주변을 살폈다.

부스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중에서, 맨 마지막에 선 사람이 피켓을 들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뒷사람이 오면 넘겨주고, 그 뒷사람은 당연한 듯 그것을 받는데 저건 일종의 문화인가? 굉장히 신기하다.

내게는 천만 다행스럽게도, 코미케에 있는 사람들은 대다수가 남자였다.

때문에 여자를 찾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렌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한참, 그리고 또 한참.

담벼락 같은 곳에 올라 계속해서 눈을 굴리다 보니 슬슬 머리가 아파진다.

렌카는 벌써 돌아가버린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을 하며 뻣뻣해지는 목을 풀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꺾던 나는,

‘어...?’

저 멀리서부터 검은색 후드 패딩을 뒤집어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채로 어딘가 걸어가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사람을 발견했다.

얼굴이 거의 가려져있지만 시원시원한 걸음걸이와 기다란 다리길이는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없지.

저 사람이 렌카임을 확신한 나는 인파 속에 섞여 그녀의 곁으로 움직였다.

등에 맨 가방이 빵빵한 건 물론, 쇼핑백을 한아름 안고 있다.

심지어 눈매가 쭉 솟아오른 채로 어깨를 달싹이고 있는데, 기뻐하고 있는 듯 보인다.

좋아하는 작가의 사인이라도 받은 건가? 마스크를 쓴 상태지만 입꼬리가 올라가있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숨덕질도 참 열심히 하네.

그리 생각한 나는 어떻게 렌카를 불러야 자연스러울까 깊은 고민을 해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저... 혹시 소년 먼데이 기업 부스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아! 저 방금 거기서 나왔어요. 세터데이 기업 부스는 저쪽... B 건물 안으로 들어가셔서, E-2 코너로 가시면 바로 보여요.”

“B건물... 아, 보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즐덕하세요!”

모르는 사람에게 길 안내를 해주는 렌카.

목소리 톤이 렌카치고는 살짝 높아져있는데, 텐션이 굉장히 높아 보인다.

그녀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보아하니 굿즈 구매는 다 한 것 같은데...

혹시라도 다른 부스에 간다면 입장권이 없는 난 따라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그 전에 붙잡자.

거리를 두고 렌카의 뒤를 따라가던 나는, 그녀가 어떤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는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건물 앞을 지나치자 지금이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부르면 분명히 놀랄 텐데, 저 시끄러운 사운드가 렌카의 비명소리를 감춰주겠지.

그리 생각한 나는 보폭을 넓혀 빠르게 렌카의 뒤로 다가갔다.

이후 의문이 잔뜩 서려있는 투로 그녀를 불렀다.

“부장?”

“.....”

듣지 못한 것 같다.

목소리를 조금 더 크게 해보자.

“부장!”

더욱 가까이 접근한 내가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렌카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그녀의 고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공포영화에서 귀신을 맞닥뜨린 주인공마냥 삐걱삐걱 돌아갔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

정말, 진심으로 당황한 건지,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있는 건지.

멍하니 서선 짧은 시간동안 나만 주시하던 그녀는,

“흐아아아아악!?”

예고도 없이 엄청난 소리를 내질렀다.

음음... 지금까지 본 렌카의 모습 중에서 가장 격하다.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면 더욱 볼만했겠어.

얼마나 놀랐는지 팔을 크게 휘젓기까지 해서, 렌카가 들고 있던 쇼핑백 중 하나가 허공을 날 정도였다.

재빨리 그것을 받아낸 나는, 눈이 동그래진 채로 완전히 멈춰버린 그녀의 눈앞에 한손을 대고 살살 흔들었다.

“괜찮아요?”

그러자 온몸을 달싹이며 화들짝 놀란 렌카의 눈 초점이 돌아왔다.

“흐어...?”

하지만 여전히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듯, 요상한 감탄사를 터뜨리며 흐느적거리고 있다.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모습. 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려고 한다.

“아...!”

방금 보인 자신의 추태를 인지했는지, 고개를 마구 털어낸 렌카의 눈이 확 가라앉았다.

“너 뭐야...?”

“뭐긴요. 전데요?”

“네가...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코미케 즐기려고 왔죠. 일단 이것부터 받으세요.”

렌카가 떨어뜨릴 뻔했던 쇼핑백을 내밀자,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포도색 눈동자.

그녀의 머리가 눈처럼 빠르게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착각일까?

“그... 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것 같다.

조금 골릴 겸 도와주자.

“쇼핑백에 든 건 굿즈에요?”

“아, 응... 굿즈...”

“여기 굿즈 사러 왔어요?”

“마, 맞아... 조카가... 음... 지방에 살아서... 나한테 사달라고 부탁해서...”

우리 렌카는 댈 핑계가 조카밖에 없니?

보통 숨덕질을 하면 지인에게 들켰을 때 그럴싸한 알리바이 정도는 하나쯤 생각해놓지 않나?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쳐서 당황함에 반사적으로 조카를 언급한 건가 싶다.

어쨌든 렌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떨리는 모습이 웃겨서 미칠 것 같다.

터질 뻔한 대소를 간신히 억누른 내가 쓰읍... 하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조카한테 줄 선물을 사는 사람치고는 얼굴이 조금 오타쿠 같던데? 요상한 웃음까지 흘리고... 입에서 침까지 나오는 줄 알았잖아요.”

“무, 뭐라는 거야... 혼자 착각을 하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조카 핑계를 대는 느낌인데...”

“조, 조조조카를 많이 챙기니까 그런 거지...!”

“아니 뭐 그럴 수는 있긴 한데... 엄청 당황해하시네요?”

“네가 쓰, 쓸데없는 오해를 하니까...! 나는 이런 거에 취미 없어...!”

“얼굴 빨개졌어요. 이것도 제가 쓸데없는 오해를 해서에요?”

“그렇지...!”

이쯤이면 순순히 실토할 때도 되지 않았나?

나는 한쪽 발이 뒤로 빠진, 당장에라도 도망갈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렌카를 살펴보았다.

고양이 앞의 생쥐 같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앙칼진 기세는 있었다. 약간 물러서기 싫어하는 것 같은 느낌.

당당하게 우겨서 상황을 넘기려는 모양이었다.

렌카의 마스크 안쪽 표정이 보고 싶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의 눈을 빤히 주시하며 검지로 아래턱을 살살 긁었다.

“흠.”

“무, 뭐야 그 치나미 같은 감탄사는?”

“부장.”

“뭐...! 왜!”

“알바 전에 할 일이 있다는 게 이거였어요? 조카 선물 사려고?”

“그래...! 맞아...!”

“그럼 솔직하게 선물을 사겠다고 하면 되지, 왜 제가 물어봤을 땐 그냥 일이 있다면서 얼버무렸어요? 제가 부장이 조카를 아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건... 그... 너한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다 싶어서... 그, 그렇잖아...! 우리 사이가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닌데... 맞지?”

렌카의 탈압박 능력은 아주 낮구나.

하긴, 저러니까 나한테 막 휘둘리는 거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내가 말을 이었다.

“여긴 입장권도 오래 전에 예약해야 간신히 얻을 수 있다던데...”

“.... 맞아. 히, 힘들게 구했어.”

“부장, 솔직히 이런 서브컬쳐 좋아하죠?”

“아니라고 했는데 너는 사람 말을...”

“좋아하죠?”

“아니라니까...? 쓸데없는 얘기할 거면 가...! 가버려...!”

“이런 걸 숨덕이라고 하죠? 아니면 일코였나?”

“난 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숨덕? 일코? 이상한 단어를 쓰고 있어...”

“아까 보니까 어떤 사람한테 즐덕하라던데... 즐덕이 즐거운 덕질의 줄임말 아니었나요? 그런 단어를 알면 이것도 충분히...”

“.... 망상이 심하네? 그리고 혹시 귀가 많이 안 좋니?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는 걸?”

“어조가 되게 균일하네요. 말투도 달라졌고... 국어책 읽어요?”

“.....”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꾹 다무는 렌카.

계속 놀려주고 싶지만 지금 그녀의 호흡은 과호흡이라도 온 사람처럼 거칠어져있었다.

마스크에 공기가 가득 찼다가 빠지는 게 보일 정도.

극도로 예민한 상태라는 증거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렌카는 집으로 돌아가면 이불을 마구 걷어찰 것이다.

시치미를 떼고는 있지만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들켰다고 생각하겠지.

그러니 지금은 그만 놀리자. 너무 많이 몰아붙였다.

“잘 알겠습니다.”

“무, 뭘...? 뭘 알아?”

“그냥 알았다고요. 자, 여기 물.”

“물...?”

“필요할 것 같아서요.”

한손에 들고 있던 자그마한 생수를 내밀자, 우물쭈물하던 렌카가 그것을 빼앗듯 낚아채더니 마스크를 벗고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작은 생수병을 동낸 그녀가 청량한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넌... 너는 여기 왜 왔는데?”

“관심이 있는 애니메이션이 있어서 기업부스에 가보려고 했는데, 당일 티켓이 없어서 못 들어갔어요. 현장구매는 안 되고 무조건 예약이라네요.”

“.... 헛걸음했네? 그러니까 잘 좀 알아보지... 나도 조카가 미리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냥 왔을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쪽 용건은 다 끝났어요?”

“용건...? 조카가 사달라는 건 다 샀으니까... 끝났다고 할 수 있겠지.”

자꾸 조카를 언급해서 자신은 이쪽에 관심이 없다는 걸 어필하려는 게 귀엽다.

마지막 발악 같은 느낌.

갑자기 렌카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하고픈 마음이 인다.

돌아간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 싶어.

“그래요? 그럼 돌아가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태워줄게요.”

“인연은 무슨... 하... 짜증나... 쟤랑은 왜 맨날...”

아주아주 자그마하게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들린다.

낭패, 곤란함이 깃들어있는 목소리.

다른 사람들이 저런 목소리를 내면 걱정부터 앞서는데, 렌카가 말하니 왜 이렇게 좋을까.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냐... 나 혼자 갈게.”

“그걸 다 들고 가게요?”

“가방에 집어넣으면 되는데...”

“왜 날 피하는 느낌이지?”

“.... 야...! 야! 가! 네 차타고 가면 되잖아...! 마침 잘됐네...!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거든...!”

오늘따라 렌카가 왜 이렇게 예뻐 보이지?

누가 우릴 본다면 시답잖은 이유로 다투는 커플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나는 자포자기한 채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그녀를 향해 씨익 웃어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갈까요? 가방 줘요. 들어줄게요.”

“싫어...”

“그럼 따라와요.”

“.... 그래.”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