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늘어진 어깨, 바닥만을 쳐다보고 있는 눈.
죄인처럼 내 뒤를 묵묵히 따르는 렌카를 보며 피식한 나는, 그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
내가 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다던 렌카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을 정리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복잡할 것이다. 오랜 시간 비밀로 해놓았던 덕질을 걸려서.
그러니까 더 철저하게 자신을 감췄어야지, 그렇게 허술하게 숨덕질을 하면 어떡하니?
내가 아니어도 조만간 다른 사람들이 네 진실을 눈치챘겠다.
“다 왔네요. 도착했습니다.”
렌카의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차를 세운 내 말에, 얼굴을 부르르 떤 그녀가 창밖으로 눈을 돌렸다.
자신의 포근한 보금자리가 눈앞에 보여 안도했을까?
표정이 다소 평온해진 렌카가 가방과 쇼핑백을 챙겼다.
“갈게...”
“인사.”
“무슨 인사? 아... 고마워... 눈물 나게 고맙네. 진짜 진심으로 고마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
그라데이션으로 언성이 높아지는 그녀.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웃음이 터져나올까봐서였다.
잠깐 심신을 진정시킨 나는 다시 렌카를 바라보았다.
“알바는 구했어요?”
“구했어.”
“어떤 거?”
“홀서빙. 규동 가게야.”
“거기 자리 하나 없대요?”
“자리?”
“나도 알바하려고 하는데, 같이 할 사람 있으면 좋잖아요.”
“네가 알바를 한다고?”
왜? 돈이 궁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내가 알바를 한다는 게 이상해?
다 네가 좋아서 그래. 내가 너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 안 그러냐?
원래라면 우연히, 마치 운명처럼 만난 척 렌카의 가게에서 알바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우연’이라는 걸 핑계로 렌카를 너무 많이 마주쳤던 터라, 계속 했다간 스토킹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당당하게, 렌카의 동의를 구하고 알바를 하자.
오늘 사건 때문에 반쯤은 강제성이 있긴 하지만.
“예. 방학동안 해볼 생각입니다.”
“그럼 뭐... 다른 곳 찾아보든지.”
“부장이랑 같이 하고 싶어요. 재미있을 것 같아.”
“알바를 재미로 해...? 돈 벌려고 하는 거지.”
“혼자 하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재미있다는 뜻이었어요. 안 그래요?”
“나는 너랑 알바를 하게 되면 지옥 같을 거라고 생각해.”
“심하네요. 삼촌네 가게에서도 그랬어요?”
“그땐 아니지. 내가 소원을 빈 거였으니까.”
“그런가? 어쨌든 거기 사장님한테 알바생 더 구하냐고 물어봐줘요.”
“싫어.”
“그래요? 흠.”
예의 그 감탄사를 터뜨리자, 렌카가 흠칫하더니 눈을 부릅떴다.
“뭐야...? 방금 그거 뭔데?”
“뭐가요?”
“방금 흠... 했잖아...!”
“예. 그게 왜요?”
“아,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한 겁니다. 근데 안 내려요?”
“.....”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렌카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면 자신만 손해라고 생각했는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이후 가방과 쇼핑백을 신줏단지 대하듯 조심조심 들고는, 어깨너머로 날 곁눈질했다.
“조, 조심히 들어가든가 해...”
이런 와중에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네. 츤데레 기질이 다분하긴 하지만 기특하다.
얼굴이 벌개진 렌카에게 손을 흔든 나는, 힘없이 발을 놀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감상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
“아아악!”
퍼억-! 퍽!
두터운 이불을 덮어쓴 채로 발을 위로 마구 차는 렌카.
한동안 아우성을 지르며 이불킥을 하던 그녀는, 완전히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들켰어...’
마츠다가 코미케에서 보여준 반응을 상기해보면 이건 무조건이었다.
치나미도 모르는 자신의 비밀이 그에게 발각되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츠다에게.
당시 굿즈를 사서 좋아라하던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중저음을 되새겨본 렌카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등골이 어찌나 오싹하던지... 순간 기절할 뻔했다.
목소리가 좋지나 말든가... 짜증나게.
“하아... 미치겠네 진짜아...!”
답답한 듯 침대를 손바닥으로 팡팡 때린 렌카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베개에 얼굴을 꽉 묻은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어떡할까.
그냥 당당하게 굴까?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안 된다. 그랬다간 마츠다가 물 만난 고기마냥 신이 나선 자신을 더욱 놀리려 할 것이었다.
그럼 어쩔까. 아예 인정을 해버릴까?
마츠다라면 뺀질거리긴 할 테지만, 누구에게 이런 걸 말하고 다닐 사람은 아니다.
아니, 너무 희망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채로 계획을 짜는 거다.
헌데 지금 계획을 짤 필요가 있을까?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는데?
왜 하필 조카 핑계를 대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
‘망했어...’
다시 정자세로 누운 렌카는 이번에 새로 사서 진열대에 넣어둔 굿즈를 살펴보았다.
진열대 최상단에 놓여있는 귀여운 캐릭터 피규어...
저것을 보니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듯하다.
그나저나 지금쯤 마츠다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을까?
개구쟁이 같은 녀석이라 자신을 놀릴 것 같은데...
그러한 생각을 하던 렌카는,
우웅-!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자 화면을 확인해보았다.
[잘 쉬고 있어요?]
예상대로, 마츠다의 메시지가 와있다.
문자에서부터 렌카 자신을 놀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것 같다.
건수를 잡았다 이건가? 역시 나쁜 놈이다.
온갖 부정적인 망상을 한 렌카는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이내 화면을 두드렸다.
여기서 무시를 해버렸다간 마츠다가 자신을 괴롭히는 수위가 높아질 것 같아서였다.
[ㅇ]
[장난해요? 제대로 대답해요.]
렌카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한 번 개겨봤는데 의외로 재미가 있다. 마츠다가 성이 난 게 약간 보이는 느낌?
가끔 이런 식으로 답장을 보내봐야겠다.
[어.]
[내일부터 알바한다고 했죠? 사장님한테 물어봐줘요.]
[싫다고 했잖아.]
[같이 해요.]
[대체 왜 나랑 같이 하고 싶어 하는 건데?]
[말했잖아요. 아는 사람이랑 하면 재미있으니까.]
왜 숨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까?
마츠다가 지금 무엇보다 궁금해할 사항은 알바가 아니라 렌카 자신의 덕질일 텐데...
혹시 자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써먹으려고 아껴두는 건가 싶다.
[너랑 하면 스트레스만 받을 거야.]
[서로 도와줄 수도 있고 좋은 거 아니에요? 삼촌네 가게에서 했을 때처럼 하면 사장님이 좋아할 텐데?]
[내가 알바할 곳은 삼촌네 가게랑 스타일 자체가 달라. 정숙한 분위기야.]
[그런 분위기로 가자는 게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잘 맞는다는 거예요.]
[전혀 아니야. 착각하지 마.]
[근데 왜 하필 홀서빙이에요? 카페로 하면 안 돼요?]
[적응 문제지. 나는 삼촌네 가게에서 일을 꽤 했었잖아. 가끔씩이긴 하지만.]
[카페도 금방 적응하잖아요. 카페로 하죠. 음식점은 힘들어요.]
또 또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 좀 보라.
밉상이다 아주.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일할 곳 옆에 카페가 하나 있지 않았나? 심지어 구인 중이기도 했다.
확실히 홀서빙보다는 냄새도 덜 나고 몸도 덜 힘들 것 같긴 한데... 이미 내일부터 나오겠다고 해버린 데다 이쪽이 돈을 더 많이 주니 바꿀 생각은 없었다.
[너나 해. 난 홀서빙이 좋아.]
[아니면 피규어 매장도 괜찮아요.]
움찔.
‘피규어’라는 단어를 읽은 렌카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마츠다가 자신을 놀리려고 시동을 걸고 있구나.
욕을 한바가지 먹여주고 싶지만 반응을 해선 안 된다.
[뭐래.]
사실 피규어 매장은 자신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덕업일치를 이룰 수 있는 곳. 관심이 가지 않으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죄다 장기근무자를 원해서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
[어쨌든 물어봐주는 겁니다?]
마츠다와 함께 일을 하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와 있다 보면 시간이 빠르게 가니까.
사장 또한 잘생긴데다 수완까지 뛰어난 마츠다를 좋아할 테고 말이다.
문제는 자신의 덕질을 걸렸다는 부분이다.
마츠다와 함께 있으면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기분이 들 게 뻔하다.
하지만 저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사방팔방으로 튀는 마츠다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불안하다.
그냥 옆에 두고 감시 겸 통제를 하는 게 나을 듯하긴 한데...
피하느냐, 정면으로 부딪치느냐. 고민이 깊어지는 저녁이다.
[생각해볼게.]
[그래요. 이제 잘 거예요?]
[어.]
[잘 자요.]
스윗하게 인사를 하고 난리야.
속으로 투덜거린 렌카는 답장을 하지 않고 애니쉐어 어플을 터치했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커뮤질이 최고다.
이번에 본 애니 리뷰를 남기고, 신작에 관한 정보를 얻어봐야겠다.
[알림 : 68개]
하루 접속을 빼먹었을 뿐인데 알림이 무수히 많이 와있다.
자신이 써왔던 수백 건이 넘는 리뷰 글에 달린 최신 댓글이었다.
대부분이 칭찬이다. 심지어는 최근에 쓴 BDSM 물도 취향은 아니었지만 흥미롭게 봤다는 댓글도 있었다.
MK라는 악성 유저에게 추천을 받아서 봤던 장르.
스토리가 모나지 않아서 자신 또한 나름 재미있게 봤었지.
그러고 보니 이 MK라는 유저가 이상한 고집을 피웠었다.
마치 마츠다처럼 말이다. 그래서 속편하게 차단을 했었다.
‘MK...’
BDSM, 조교물을 좋아하는 유저다.
공교롭게도, 마츠다와 성향이 비슷한데다가 닉네임 이니셜까지 같다.
저번에 아키하바라에서 마츠다를 만났을 때, 그는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이라는 조교물 동인지를 산 적이 있다.
그때 MK와 마츠다가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웃어넘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생각이 의심으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려고 한다.
입장권이 없어 코미케에 참가는 못했지만 직접 찾아올 정도로 이쪽에 관심이 많은데다, 조교물을 좋아하는 취향. 그리고 MK라는 이니셜까지...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일까?
‘진짠가...?’
갑자기 MK와 마츠다가 연관성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확인해보지?
**
다음날 오전.
요 며칠간의 피로를 늦잠으로 풀고 있던 나는, 렌카에게서 전화가 오자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여보세요...”
-야.
“어.”
-.... 뭐라고?
“왜요?”
-자고 있었어?
“예.”
-지금 점심이 다 됐는데?
“늦잠 잤다고 뭐라 하려는 건가요?”
-.... 그건 아니었어.
예전이었다면 반박을 했을 텐데 꼬리를 말다니... 기가 죽었구나.
나는 바락바락 대드는 렌카가 보고 싶으니까, 당분간은 살살 놀려야지.
“사장님한테 물어봤어요?”
-물어봤어. 사장님이 한 번 보고 싶대. 오늘 오후까지 올 수 있냐는데.
출근하자마자 사장에게 언질을 준 모양이다.
기특하다. 상으로 턱을 긁어줘야겠다.
상체를 일으키고 기지개를 편 내가 물었다.
“몇 시요?”
-3시까지. 이력서 간단하게 적어서 가지고 와.
“알겠습니다. 위치 찍어줘요.”
-이따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