왁스를 발라 머리에 힘을 주고 있는 내게, 미유키가 다가와 투정을 부렸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 보이는 것이 싫은가보다.
왁스로 인해 찐덕해진 손을 미유키의 얼굴 앞으로 내밀자, 그녀가 질색을 하며 반걸음 물러났다.
그런 그녀를 보며 픽 하는 웃음을 터뜨린 내가 손을 씻으며 물었다.
“오늘 저녁 전에 끝나는데 같이 영화라도 볼래?”
“응.”
언제 투정을 부렸냐는 듯 밝아진 얼굴로 냅다 대답하는 모습이 예쁘다.
“그럼 집에 있어라. 끝나고 데리러갈 테니까.”
“알았어. 지금 나가려구?”
“어. 너도 외투 입어.”
“나는 왜?”
“가는 김에 집까지 데려다주고 가게.”
“그러면 늦는 거 아니야?”
“안 늦어.”
“그럼 입혀줘.”
미유키가 종종 이렇게 애교를 부릴 때면, 마치 신혼생활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해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미유키에게 두툼한 패딩을 입혀준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붙들고 차로 갔다.
이후 그녀를 집에 내려다주고 곧장 카페로 향했고, 직원 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그나저나 카페 이름이 왜 ‘카페 24’일까.
24시간 운영하는 곳도 아닌데... 작명센스하고는.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주차장 구석에는 어느 샌가 사장이 나와 있었다.
그에게 다가간 내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안녕하세요, 출근했습니다.”
“어서 와라.”
인사를 받아준 사장이 내 차를 곁눈질했다.
적당히 비싼 차인 걸 알아보는 듯한데... 부모님이 사준 것으로 생각하려나?
아니면 카푸어라고 생각하려나?
뭐가 됐든 알 바는 아니지.
“이건 출근 카드. 네 정보는 등록해놨으니까 저기서 찍어. 찍는 걸 잊어버렸을 경우 나한테 언제 출근했는지 말하면 되는데, 웬만하면 꼭 찍어야 돼.”
차에서 관심을 끈 사장이 내게 플라스틱 IC 카드를 내밀었다.
많은 가게가 종이로 된 타임 카드를 사용하는데, 여긴 나름 최신식이구나.
“알겠습니다.”
“찍고 옷 갈아입은 뒤에 일 시작하면 된다.”
사장이 가리키는 기계에 카드를 찍은 나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하늘색에 파란 줄무늬가 빽빽하게 져있는 와이셔츠와 갈색 앞치마가 걸려있다.
내가 앞으로 입게 될 유니폼이었다.
기이한 조합이지만 이상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옷을 갈아입고 카운터로 나왔다.
이후 사장과 함께 어제 배웠던 것들을 간단하게 복습했다.
약간 버벅거리긴 했지만 막히는 부분 없이 음료를 제조하고 포스기를 사용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사장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잘하네. 이노오는 1시간 뒤에 출근이지? 그때까지 혼자 할 수 있겠어?”
“자신은 있는데 첫 주문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들어가자.”
그렇게 사장과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온 나는, 켜져 있는 노트북으로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았다.
그리고는 시험 삼아 제조했던 음료를 마시면서 사장과 대화를 나누다가, 첫 손님이 오자 웃는 낯으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날 보고는 멈칫하더니 카운터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여자 손님.
안쪽 상단에 있는 메뉴표를 보면서 날 흘끔흘끔 살피는데, 얼굴이 그녀의 취향을 저격한 것 같다.
“주문하시겠습니까?”
“그... 모카 라떼 한 잔 주세요...”
“모카 라떼 주문 받았습니다. 따뜻하게 드릴까요?”
“네...”
“당도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그냥 평범하게요...”
“드시고 가세요?”
“아니요, 테이크아웃이요...”
계산대에서 상체를 살짝 앞으로 내밀고, 웃는 낯으로 이것저것 묻는 나를 쳐다보던 손님의 얼굴이 살며시 달아올랐다.
러브 코미디물에서 흔히 나오는 엑스트라의 반응... 아주 짜릿하다.
역시 잘생긴 건 최고야.
“확인했습니다. 450엔 입니다. 저희 카페 쿠폰 있으세요?”
“아니요...? 오늘 처음 왔는데... 쿠폰도 있나요?”
“있습니다. 한 장 드릴게요.”
손님에게 명함 크기의 쿠폰용 종이 한 장을 내민 내가 말을 이었다.
“음료 메뉴를 주문하실 경우 메뉴 당 한 개씩 도장을 찍어드리고요, 열 개 모으시면 레귤러 사이즈 음료를 한 잔 무료로 드려요.”
“아무거나요?”
“예. 아무거나 드립니다. 종류 상관없이.”
“그렇구나...”
“계산 도와드릴게요.”
“아, 네...! 카드로...”
조심스레 카드를 내미는 손님.
그것을 받아든 나는 밝게 웃으며 결제를 마쳤다.
“주문 감사합니다.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네...!”
모카 라떼. 상대적으로 쉬운 메뉴 중 하나다.
일단 에스프레소 먼저 추출하고, 그 사이 우유를 전용 용기에 담아 스티밍한다.
그 뒤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종이컵에 담아 초코시럽을 두 번 짜고, 잘 저어준 다음 스티밍한 우유를 천천히 집어넣어 에스프레소와 섞는다.
마지막으로 우유 주입을 한 번 끊고 재차 넣으면서 흰 거품이 올라오도록 한다.
기포가 조금 올라와있긴 하지만 라떼 아트를 할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면 훌륭하지.
라떼를 완성한 나는 컵에 종이 홀더까지 끼운 후에, 옆에서 가만히 날 지켜보던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쿠폰에 도장 추가로 찍어줘도 돼요?”
“왜?”
“첫 손님이니까 다음에도 오게끔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려고요. 지금 손님도 저분 한 명뿐이라 형평성 문제도 없을 것 같고...”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예.”
허락을 받은 나는 빈자리에 앉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손님을 불렀다.
“모카 라떼 나왔습니다.”
첫 주문이니까 특별히 정성껏 만들었다.
직장인인 것 같은데, 일을 하다가 내 얼굴이 아른거리면 다시 찾아와서 다리를 벌리도록 하렴.
감시카메라가 있긴 한데, 창고엔 없으니까 그 안에서 하면 될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아, 그리고 도장 찍어드릴게요.”
“도장이요? 이미 하나 찍혀있는데...”
“첫 방문이라고 하셨잖아요? 다음에 또 오시라고...”
나는 가게 안에 다른 손님이 없음에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특별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당연하게 추가로 찍어주는 양 말해선 안 된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아 진짜요...?”
냅다 쿠폰을 내미는 손님.
그녀에게 카페 이름이 적힌 보라색 동그란 도장을 찍어준 나는 손님을 보내고 사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색은 무척이나 밝았다.
과정과 결과가 좋아서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됐다.”
특히 손님의 수줍어하는 반응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상기된 투로 저런 말을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뭐가요?”
“엉? 아냐. 너 혼자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옆 가게로 가보마. 모르는 게 있거나 문제 생기면 바로 연락해. 옆 가게에 있을 테니까 내선번호로 1번 누르면 돼. 갑자기 확 바빠질 때도 연락하고, 진동벨 사용법은 알지?”
“예.”
“알았다. 이건 이노오 IC카드니까 오면 출근 찍으라고 해.”
“예, 들어가세요.”
“그래.”
한손을 휘적거리며 규동 가게로 가는 사장.
약간 자본주의에 잠식되어있는 듯하지만 나를 편하게 대해주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렇고, 내가 하는 일을 묵묵히 지켜봐주는 것도 그렇고...
보기 드문 호감형 인물이다. 와이프 네토라레는 생각도 하지 말자.
어쨌든 사장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건 성공적이었다.
당분간은 열정적으로 일해서 사장이 날 완전히 신임하게끔 만들어야겠다.
그가 날 믿고 가게 안의 카메라를 덜 보도록 말이다.
**
다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뒷문.
포스기에 있는 메뉴 위치를 외우고 있던 나는 눈 밑을 꾹꾹 누르면서 들어온 렌카를 반겼다.
“안녕요.”
“.... 안녕. 사장님은?”
“규동 가게에 갔어요. 이거 갖고 저 기계에다 찍고,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오세요.”
“알았어.”
순순히 IC카드를 기계에 찍은 렌카가 탈의실에 들어갔고, 3분 정도 뒤에 나왔다.
사이즈가 딱 맞는 와이셔츠를 입은 그녀의 팔이 도드라져 보인다.
왜 팔만 봐도 꼴리지? 병원을 가봐야하나?
그나저나 나와 똑같은 복장을 입은 그녀를 보니 커플룩 같아서 기분이 묘하다.
렌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약간 주춤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은근히 소녀소녀하다고 생각한 내가 말했다.
“뭐해요? 안 오고.”
“아, 그래... 손님 얼마나 왔었어?”
“열 명 정도요.”
“적은 건가?”
“그렇지 않을까요?”
“문제는 없었고?”
“디카페인 없는 라떼를 달라는 손님 한 명을 제외하면 없었네요.”
“디카페인 없는 라떼...? 디카페인 라떼를 잘못 말한 거 아니야?”
“맞아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잘 돌려 말해서 자연스럽게 넘어갔죠.”
“다행이네. 근데 너... 왜 표정이 안 좋아?”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렌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좁힌 내가 반문했다.
“표정이 왜요? 전 괜찮은데?”
“아니, 안 좋아. 오늘이나 어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나보네?”
애니쉐어에서 나누었던 쪽지에 대해 떠볼 속셈이로구나.
속이 훤히 보인다, 보여.
“아니, 왜 남의 표정을 강제로 심란하게 만들고 그래요? 괜찮다니까?”
“그래...?”
아직까진 긴가민가할 거다.
떡밥을 더 던져보렴.
“왜 아쉬워하는데? 저한테 안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누가 아쉬워했다고 그래? 망상증이 심하네. 저번부터...”
“저번?”
“그저께...”
그저께라면 코미케 때를 말함이었다.
렌카가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오는구나.
이러면 안 놀릴 수가 없어지잖아.
“그저께?”
“.....”
피식한 나는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카에게 성큼 다가갔다.
“부장.”
“오, 왜...”
그러자 렌카가 급격하게 다소곳해졌다.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 모습이 깜찍해서 미치겠고 생각한 내가 말했다.
“이제 슬슬 인정하는 게 어때요?”
“무, 뭘...?”
“애니, 만화... 이런 서브컬쳐 좋아하잖아요.”
“아닌데...? 조카가...”
“맨날 조카 핑계를 대는 거 지겹지도 않아요?”
“핑계 아닌데...?”
“그럼 전화해봐요. 조카 목소리 한 번 들어보게.”
그 말에 렌카가 흠칫하더니 인상을 썼다.
“내, 내가 왜 너한테 신용을 얻자고 조카한테까지 전화를 해야 돼...?”
“나 같으면 순순히 인정하고 속편하게 있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로 절 대할 건데요?”
“안 불편한데...? 난 떳떳해...”
“떳떳한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작잖아요.”
렌카가 자신의 얼굴에 손부채질을 해댔다.
후끈거리나보다. 잔뜩 흥분해서.
잠깐 그러고 있던 그녀가 애꿎은 컵 뚜껑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그런 취미를 갖고 있는 게 맞다고 쳐.”
“아니, 부장 본인한테 관련된 일인데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거지, 만약이란 가정은 왜 세우는 거예요?”
“아 일단 들어봐...! 만약 그러면 어떡할 건데?”
“뭘 어떡해요? 둘만의 비밀이 생기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