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끝이야...?”
“왜요? 소문이라도 낼까봐 겁나요? 정 불안하면 코스프레 한 번만 해주세요. 그럼 평생 비밀로 간직할 수도 있어요.”
“내,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 미친놈아...!”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이거 그냥 가설 아니었어요?”
“.... 가설이라도 사람의 민감한 부분을 이용하려는 의도 자체가 불순하니까 험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지... 어쨌든 나 일해야 돼.”
“할 거 없는데. 내가 다 해놔서.”
“할 게 없긴 왜 없어...! 포스기 메뉴도 외워둬야 하고, 재료 위치도 다 파악해놔야지... 빨대 어디 있는지 알아? 방금 보니까 조금 모자라던데.”
“창고.”
“알았어. 다녀올게.”
날 피해 카운터에서 나가려는 렌카.
마침 입구 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나는, 발을 옆으로 옮겨 몸으로 출구를 막았다.
“.... 뭐하는 거지?”
인상을 마구 찌푸리며 날 노려보는데, 저 표정마저도 귀엽다.
“그냥 한 번 해봤어요.”
“짜증나는 얼굴 좀 치워줄래?”
“짜증나요?”
“엄청 짜증...”
“흠.”
“나지 않아...! 안 짜증나...! 됐냐?”
이젠 그냥 본능적으로 반응하는구나.
이러다가 피해망상으로 발전하겠어.
이를 드러내며 웃은 나는 씩씩대는 렌카가 지나갈 수 있게끔 몸을 옆으로 돌렸다.
“다녀와요.”
“.... 내가 미쳤지...”
“뭐가 미쳤는데요?”
“넌 몰라도 돼.”
짧게 콧방귀를 내뿜은 렌카가 도망치듯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알바 첫날부터 이러는데 내가 안 설렐 수가 있을까?
렌카와의 풋풋하고 톡톡 튀는 카페 데이트... 본격적으로 즐겨주마.
규동 가게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온 렌카가 날 불렀다.
“마츠다. 사장님이 오래. 밥 먹어.”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그라인더에 원두를 채워넣고 남은 것을 잘 밀봉해놓았다.
“뭐 먹었어요?”
“규동.”
“그니까 무슨 규동.”
“그냥 규동.”
“흠.”
“차슈동 먹었어...”
예의 그 감탄사를 터뜨리자 다급하게 규동 종류를 말하는 그녀.
벌써부터 이런 식으로 조교가 되어가고 있는 모습이 웃기다.
이건 가끔씩 써먹어야겠다. 너무 남발해버리면 면역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맛있었어요?”
“.... 어.”
“다행이네요. 잠깐만... 뭐 묻었어요.”
“뭐가? 어디?”
“제가 뗄 게요.”
그리 말한 나는 렌카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녀의 옆머리로 손을 뻗어 슬쩍 만졌다.
그러자 그녀가 크게 당혹스러워하더니 언성을 높였다.
“야... 야! 뭐하는 거야...!”
목소리가 꽤 크다.
손님이 없어서 망정이지, 있었으면 컴플레인 감이었다.
연갈색 빛이 감도는 반투명하고 자그마한 껍질 같은 것을 렌카의 머리에서 떼어낸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것을 살펴보았다.
“양파 껍데기 같은데.”
“.... 양파 껍데기?”
“예. 칠칠맞게 묻히고 다니지 마세요.”
솔직히 눈앞에서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봐줬다.
“주, 주방에서 나오면서 붙었나보네... 머리가 기니까 일일이 신경을 쓸 수가 없지... 그리고 누가 막 마음대로 남의 몸에 손을 대래?”
날 나무라는 렌카는 아래로 길게 늘어진 자신의 옆머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신경이 쓰이나보다. 어디까지나 무의식적으로.
휴지통에 껍질을 버린 내가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해요.”
“됐고... 다음부터는 그냥 말로 해.”
“알겠습니다. 저 밥 먹으러 갔다 옵니다?”
“다녀와.”
“바빠지면 내선으로 연락해요. 빨리 올게.”
“빨리 안 와도 돼.”
“밥 천천히 먹으라고 배려해주는 거예요?”
“아닌데. 네 얼굴이 보기 싫어서 그런 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기는.
히죽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규동 가게로 넘어가,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과 여러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었다.
이후 카페로 돌아왔을 땐, 렌카는 활기차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나와 이야기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는데, 갑자기 질투가 난다.
주인에게 틱틱댔던 대가로 콘돔을 씌운 로터를 안에 집어넣고 일을 하도록 시켜야겠다.
카운터로 넘어가 손을 씻은 나는, 주문을 다 받은 렌카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주문 뭐 받았어요?”
“드립 커피랑 딸기 라떼.”
“제가 딸기 라떼 할게요.”
“아니, 넌 드립 커피 만들어.”
“왜요?”
“넌 딸기랑 안 어울리니까.”
“뭔... 그럼 뭐가 어울리는데요?”
“파인애플.”
왜 하필 파인애플일까?
상큼하다는 뜻으로 말한 건 절대 아닐 테고...
아마 위험한 껍질을 빗댄 것 같다.
“왜요?”
“시끄러. 일해. 드립 커피.”
번역체 느낌으로 말하며 드립 커피용 필터를 가리키는 렌카.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 아주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
**
점심시간 이후, 손님들이 꽤 몰려왔다.
카페가 전부 찰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테이크 아웃을 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덕분에 나와 렌카는 사적인 대화를 제대로 나누지도 못한 채로 바삐 움직였다.
중간에 사장이 잠깐 도와주러 왔다가, 실력이 쑥쑥 크고 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워주기만 하고 가게로 돌아간 건 덤.
그렇게 한 차례 큰 폭풍이 지나가고 다시 한산해진 카페 안에서, 나와 렌카는 사장이 가져다준 먹거리를 먹으면서 숨을 돌렸다.
“엄청 바빴네요.”
“엄청까진 아닌데? 적응만 하면 쉽게 할 수 있을 정도였어.”
“그랬어요?”
“뭐야 그 강아지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는? 기분 나쁘니까 평소대로 하지?”
“평소대로 한 건데요. 근데 계속 서있으니까 힘들지 않아요?”
“딱히. 넌 힘들어?”
“전 조금 다리가 아프네요.”
“운동을 안 해서 그래.”
“열심히 하는데.”
“그럼 말고.”
무슨 운동을 하는지는 안 물어보나? 아쉽다.
앞에 놓인 가라아게를 집어먹은 나는 쌓인 쓰레기를 처리하려고 했다.
그때, 렌카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내 등을 콕콕 찔렀다.
“야, 마츠다.”
“예. 쓰레기 더 버릴 거 있어요?”
“그게 아니라... 네가 저번에 샀던 책 말인데...”
“책? 아... 그거요? 아사가오 씨의 가계...”
“크, 큰소리로 얘기하지 말고...! 좀...!”
아무도 없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
깜찍한 그 반응에 실소를 터뜨린 내가 말했다.
“알았어. 그게 왜요? 빌려달라고요?”
“빌리긴 뭘 빌려... 그냥 그거 재미있게 보고 있냐고 물어보려는 건데...”
“예전에 재미있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또 보냐고...”
“가끔 생각날 때 보죠.”
“그래...?”
“예.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는 거예요? 아사가오 씨 피규어에 관심 생겼어요?”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혹시 부장 집에 피규어 진열대도 있어요?”
“갑자기 왜 얘기가 그런 쪽으로 가는 건데? 쓰레기나 버려! 버리는 김에 너도 같이 버려...!”
이번엔 부정은 안 하고 그냥 화제만 돌리네?
점점 솔직해지고 있는 건가 싶다.
“너무하네.”
“.... 근데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 피규어가 있어?”
“모릅니다.”
“모르는데 아는 척한 거야?”
“예. 그러면 부장이 답을 말해줄 줄 알았죠.”
“내가...?”
“부장은 이런 쪽으로 고수잖아요.”
“헛다리짚지 말지...?”
“그냥 자수하고 광명 찾으세요.”
“내가 무슨 범죄자야?”
“말이 그렇다는 거예요. 오늘 같이 퇴근해요.”
그 말에 렌카가 눈썹을 꿈틀했다.
“너 나보다 1시간 일찍 끝나잖아.”
“기다리면 되지. 마침 저도 근처에서 뭐 좀 사려고 했으니까 끝나면 연락해요.”
“그냥 가지?”
“싫은데.”
“나도 싫어. 혼자 갈래.”
“떼쓰지 마세요.”
“떼는 네가 쓰고 있는 거잖아...! 너는 사람이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부장.”
갑작스레 진중하게 바뀐 내 태도.
이를 보고 흠칫한 렌카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무, 뭐...!”
“혹시 저랑 같이 가는 게 싫어요?”
“.... 싫은 건 아닌데 계속 이런 식으로 놀리니까...!”
“놀리지 않겠다고 하면 같이 갈 거예요?”
“아니 뭐... 조용히 갈 수 있으면 가지... 대중교통보다 편하니까...”
“그럼 그렇게 해요. 안 놀릴게.”
“.... 그러면 뭐... 같이 가든가...”
렌카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녀와 야릇한 일들을 하고 싶은 욕망이 커진다.
빨리 지금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진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며, 나는 마침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
“갈게.”
“예. 들어가요.”
“내일은 내가 먼저 출근이었나?”
스케줄은 렌카 본인이 훨씬 잘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굳이 내게 물어본다는 건, 여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집까지 왔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는 뜻이었다.
답지 않게 착해가지고... 쯔쯔.
“그렇죠.”
“알았어. 태워줘서 고마워.”
“내일 봐요.”
그렇게 렌카를 내려다주고 미유키를 만나 영화를 본 나는,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후 애니쉐어 어플에 알림이 떠있자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무슨 쪽지를 보냈을까? 두근두근거린다.
[MK 님, 추천해주신 여친조교 잘 읽었어요. 재미있더라고요. 조만간 리뷰 남기려고 해요.]
어제와는 다르게 친절한 쪽지가 와있다.
1인 2역으로 나쁜 경찰, 착한 경찰을 연기하려는 건가?
일단 넘어간 척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