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지금은 이렇게 물러나주지만, 충분한 조교가 되면 시도 때도 없이 함부로 손을 놀릴 거다.
흐느낌과 동시에 쾌락을 느낀 네가 주인인 내게 제발 그만해달라며 사정사정할 때까지 괴롭혀주마.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무어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렌카에게 다가간 내가 말했다.
“근데 부장.”
“안 돼.”
“이상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어요.”
“그래...? 그럼 말해봐.”
“오늘도 끝나고 같이 퇴근해요.”
“싫어. 너 기다려야 되잖아.”
“나도 어제 기다려줬잖아요.”
“그건 네가 억지로 기다린 거지.”
“서운하게 나오시네. 대중교통 기다리는 시간이랑 가는 시간까지 합하면 얼추 비슷할 것 같은데.”
“그렇긴 해.”
“그럼 같이 가는 걸로 합의한 겁니다?”
“대체 왜 나랑 퇴근하려는 건데?”
“몰라요. 그냥 부장이랑 같이 퇴근하고 싶어요.”
이유답지 않은 이유를 대는 내가 황당했을까?
헛웃음을 친 렌카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마음대로 해.”
결정권을 나한테 맡기다니... 노예로서의 마음가짐이 잘 되어있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려줘요.”
“알았어.”
“기다리는 동안 뭐할 거예요? 어제 보니까 근처 골목에 괜찮은 피규어 매장이 있던데 거기 한 번 둘러보고 올래요?”
그 말에 렌카의 눈이 순간적으로 초롱초롱해졌다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뭐래...”
“조카한테 줄 선물도 볼 겸 가봐요. 주소 찍어줄게요.”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눈빛으로는 좋아하고 있다.
이 정도면 렌카도 씹덕이 아닌 척을 하는 걸 즐기는 게 아닐까 싶다.
곧 순순히 인정할 것 같은 느낌이야.
“일단 찍어놓을 테니까 가든 말든 맘대로 하시고, 점심부터 먹고 오세요.”
“어제는 내가 먼저 갔으니까 이번엔 네가 먼저 가.”
“아까 배고프다고 했었잖아요. 먼저 가세요.”
“.... 그럼 다녀올게.”
“예.”
양팔을 뒤로 당겨 앞치마 끈을 푸는 렌카의 가슴이 돋보인다.
오늘따라 커 보이는데, 패드가 두꺼운 브라를 찬 건가?
갑자기 만지고 싶어진다.
“뭘 그렇게 쳐다보고 난리야...?”
“그냥요.”
“쓸데없는 짓 하기는...”
예전이었다면 사소한 시선에도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을 일을, 지금은 그저 싱거운 타박만 하고 끝내게 됐을 정도로 변화가 큰데 쓸데없는 짓이라고? 가당치도 않다.
알게 모르게 조교되어가고 있는 우리 렌카...
그녀와 야릇한 추억을 쌓아가게 될 일도 머지않았다.
“냉동고 2번째 칸 커피 큐브는 쓰지 마세요. 지금 얼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 외엔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교대하러 온, 귀찮음이 뚝뚝 묻어나오는 근무자에게 인수인계를 해준 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땐, 렌카는 이미 내 차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제가 알려준 피규어 매장에 들렀다 온 거예요?”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대답하면서 외투를 여미고 있구만.
딱 봐도 작은 피규어를 하나 사서 그 안에 넣어둔 게 분명하다.
“그래요. 얼른 타세요.”
능글맞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렌카가 한쪽 입꼬리를 사납게 씰룩이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조심조심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를 보며 피식한 내가 물었다.
“심심한데 같이 영화 보고 갈래요?”
“아니.”
“저녁은요?”
“싫어.”
“단호하시네요. 알겠습니다.”
곧장 출발하여 렌카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그 어색함이 조금은 신경 쓰였을까?
자세를 고쳐 앉은 렌카가 날 쳐다보았다.
“야.”
“왜요.”
“내일 열 명 단체예약 있는 거 들었어?”
“들었어요. 점심 전에 온다던데.”
“맞아. 구석 자리에 예약석 표지판 올려놓아야 돼. 내일 출근하면 가장 먼저 그것부터 해놔. 카페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이 거기 앉으면 안 되니까.”
“알았어요.”
“아침에 얼음도 많이 만들어놓고.”
“예.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어.”
“꼰대에요?”
“너한테만.”
“나한테만 꼰대 짓을 하는 거라고요?”
“응.”
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는 렌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그녀를 당황시키는 건 아주 쉽다.
마침 차가 신호에 걸렸기에, 나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렌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기분 좋네요.”
“뭐가?”
“오직 저한테만 특별대우를 해준다는 거잖아요.”
“전혀 아닌데?”
“그냥 발상의 전환을 한 번 해본 거예요.”
“되게 긍정적이네.”
“그렇죠?”
“칭찬 아니야. 비꼬는 거지.”
“제가 칭찬으로 들으면 되죠.”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차가 렌카의 집에 도착했다.
카페에서처럼 외투를 여민 그녀가 안전벨트를 푸는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들어가요.”
“그래.”
“감사인사.”
“오늘은 내가 널 기다려줬으니까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런가요?”
“그래도 고맙다고는 할게.”
“싫은 기색이 팍팍 담긴 표정으로 고맙다고 말하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해도 난리야... 아까처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잖아. 나 이제 갈게. 내일 보자.”
“그래요.”
조수석 문을 닫은 렌카가 빠른 걸음으로 차에서 멀어졌다.
렌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실소를 터뜨린 나는, 그녀가 애니쉐어에서 쪽지를 보내길 바라며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
[MK 님, 리뷰 남겼는데 확인해보세요.]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달려라 이노쨩의 쪽지가 와있었다.
애니쉐어의 리뷰 란으로 간 나는, 렌카의 닉네임을 찾아 가장 최근에 올라온 리뷰 글을 터치했다.
[여자친구 조교일지]
[주인님의 비밀 다음으로 본 BDSM 장르. 네토라레, 네토라세 같은 플레이 없이 서로 순수하게 사랑하는 상태에서 조교가 이루어지는 스토리라 나름 즐겁게 봤습니다. 주인님의 비밀보다는 조금 하드하네요. 이쪽에 관심이 있을 경우 큰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평점 : ★★★☆☆]
짤막하고 담백한 리뷰다.
다만 평점이 조금 짜다. 정말 객관적으로 매긴 점수구나.
점수로 치환하면 6점인데, 5점은 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재미있게 봤다면서 별 세 개는 뭡니까? 저번에도 이러더니 또 똑같은 짓을 하시네요?]
화가 난 것처럼 쪽지를 보내자, 렌카에게서 곧바로 답장이 왔다.
[제 기준에는 세 개가 최고점이었어요. 이것도 후하게 쳐드린 건데요.]
[리뷰 글에 비추천 눌렀습니다.]
[(Ծ‸Ծ,,)]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인터넷 상의 렌카는 참 귀엽다.
저 한심함, 실망감이 가득 담겨있는 이모티콘은 어디서 구해온 걸까?
상황에 딱 맞는다고 느껴진다.
[만화 보는 눈이 별로네요. 나랑 잘 안 맞네.]
[보는 눈은 님보다는 좋을 걸요? 이제 다른 조교물 추천해주세요.]
[옆집 미망인을 나만의 것으로 만드는 법.]
[그게 만화 제목인가요?]
[네.]
[MK 님은 정말 쓰레기시네요. 재활용도 안 되겠어요.]
[아니, 추천해달래서 해줬는데 왜 난리인지?]
[다른 거 없어요? 최근에 가장 재미있게 본 만화가 뭔가요?]
아사가오 씨의 가계사정이 튀어나오길 기대하고 있는 건가?
무슨 스무고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일단 그것부터 보세요. 그럼 다른 거 추천해줄 테니까.]
[알겠어요. 옆집 미망인 이거는 수위가 어떻게 되나요?]
[여친조교보다는 높아요.]
[잔인한 장면이 있나요?]
[안 나와요. 그런 걸 보려면 고어물을 찾아야죠.]
[다행이네요.]
오늘은 성씨를 알려달라고 떼쓰지 않는구나.
천천히 가까워지는 전략으로 바꿨나보다.
렌카와의 쪽지를 마친 나는, 때마침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유키가 들어오자 그녀를 반겼다.
“왔냐?”
“응.”
이곳이 마치 제 집인 양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가더니 손을 씻고, 세수까지 하는 그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낸 그녀가 요 위에 누워있는 내 품 안으로 파고들어오더니 물었다.
“마츠다 군, 나 마츠다 군이 일하는 카페에 가도 돼?”
“그래라.”
“직접 음료도 만들어주는 거야?”
“만들어줘야지.”
“어떤 게 가장 자신 있는데?”
“자신은 다 있는데, 캐러멜 허니 라떼 먹어.”
“뭐야...? 다 자신 있다면서 왜 메뉴를 마츠다 군이 골라?”
“그게 제일 맛있거든.”
“아 진짜? 혹시 거기 먹을 것도 팔아?”
“케이크 같은 건 없고, 쿠키랑 와플은 있어.”
“그 정도면 충분하네? 그럼 조만간 호노카랑 마사코 데리고 간다?”
“그게 누군데.”
“.....”
미유키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낄낄거린 내가 말했다.
“농담이야. 데리고 와.”
“진짜 농담 맞아?”
“내가 설마 부반장이랑 빵녀 이름도 모르겠냐?”
“여태 자주 까먹었었으니까...”
“걔네 둘은 외워놨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이노오 선배랑 알바하는 건 어때? 잘 맞아?”
“아직까지는 잘 안 맞는 것 같은데.”
“그래? 아카데미에서처럼 티격태격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미유키의 몸을 팔다리로 감싸 완전히 끌어안은 나는, 자두 향을 솔솔 풍기는 그녀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었다.
렌카와 톡톡 튀는 시간을 보내다가 미유키를 만나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다.
여기서 치나미만 오면 딱인데... 그게 못내 아쉽다.
**
다음날 아침.
준비를 끝마치고 카페로 출근한 나는 구석 테이블 가운데에 예약석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세워놓았다.
이후 어제 저녁 알바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마무리한 뒤 몇 명의 손님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