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제조하고, 사장이 만든 쿠키를 팔고, 내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 손님들에게 간을 보면서, 나는 시계를 살펴보았다.
겨우 30분밖에 안 지났다. 렌카가 없으니 재미 또한 없어서 하품이 나올 정도다.
꼭 1시간 텀을 두고 스케줄을 짰어야했나?
그냥 같이 출근하게 해주지... 갑자기 사장이 원망스러워진다.
그렇게 느려터진 시간을 체감하며 의욕 없이 일을 하던 나는,
“안녕.”
뒷문이 열리면서 렌카가 출근하자 활짝 웃어보였다.
“왔어요?”
“무, 뭐야...? 표정 뭔데...?”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내 얼굴에서 불안감을 느꼈는지 반걸음 물러나는 렌카.
무척이나 수상하다는 눈으로 날 훑어본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너 사고 쳤어?”
“뭔 사고요?”
“아니...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니까... 아니면 손님이 많아서 힘들었어?”
“한산한 거 안 보여요?”
“근데 왜 웃고 난리야?”
“나는 웃으면 안 되나?”
“그렇게 웃지 마. 짜증나니까.”
방금 미소가 렌카의 취향을 저격했나보다.
가끔씩 써먹어주면 괜찮을 것 같다.
“빨리 옷 갈아입고 와요.”
“뭐야 대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저리 중얼거린 렌카가 탈의실로 들어가더니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갈아입은 시간이 꽤 빠르다. 내가 그렇게나 보고 싶었나?
긍정적인 망상을 해본 나는, 머뭇머뭇 발걸음을 옮기는 렌카에게 메모용 노트를 보여주었다.
“오늘 예약한 단체손님이 어제 선금 지불하고 갔대요.”
“.... 굳이 그걸 얘기하는 이유가 뭐야? 내가 가서 보면 되는데...”
“그냥 해봤습니다.”
“너 오늘 엄청 이상한 거 알지?”
“아뇨. 모릅니다.”
시종일관 헤실거리는 내 표정이 부담스러웠을까?
슬쩍 시선을 피한 렌카가 헛기침을 하며 애꿎은 시럽을 만지작거리다가, 까맣게 절전되어있는 노트북 화면을 살피며 물었다.
“음악은 왜 안 틀어놨는데?”
“같이 상의한 뒤에 틀려고요.”
“상의...? 음악을?”
“싫어요?”
“아니... 싫은 건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서...”
“뭐든 같이 하면 좋잖아요. 잔말 말고 이리 오세요. 더 바빠지기 전에 고릅시다.”
“.... 그러든가...”
이 상황이 어색한 듯 자신의 한쪽 뺨을 긁은 렌카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동시에 콧속으로 확 들어오는 달콤한 향.
블루베리 풍선껌에서 맡을 수 있는 그 향기에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신 내가 렌카를 돌아보았다.
“부장.”
“왜.”
“냄새 좋네요.”
“뭐...!? 이,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로 날 욕하는 그녀.
뜬금없는 칭찬에 당혹스럽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 부끄러움이 더 큰가보다.
“샴푸 뭐 써요? 샴푸가 아니라 트리트먼트 냄샌가?”
“네가 무슨 상관이야...!”
“얼굴 빨개졌다.”
“시끄러...! 입 다물고 노래나 골라...!”
반응이 예상보다 훨씬 격하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구나.
하지만 이대로 조심조심 줄다리기만 하는 게 조금은 지루하다.
리프레쉬가 필요하다. 큰 사건을 하나 겪어서 강렬한 추억을 심을 시점이라고 본다.
“.... 뭘 그렇게 쳐다봐? 눈 좀 똑바로 떠라...?”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감당하기 힘들었는지, 렌카가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에 피식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며 허리를 폈다.
“알겠습니다. 노래 골랐어요?”
“네가 이러는데 어떻게 골라...!”
“속편하게 애니 노래 틀어도 되는데.”
“.... 그런 건 카페 분위기랑 어울리지가 않잖아.”
지금 자신이 씹덕이라고 간접적으로 인정한 건가?
아니, 이건 좀 애매하다.
“노래 안 고를 거지? 그냥 TOP100에 있는 거 아무거나 튼다? 이제 끝...! 빨리 일해.”
상황 자체를 강제로 종료시키고는 싱크대에 있는 컵을 씻어내기 시작하는 렌카.
어제처럼 맨손으로 하려다가 내 조언을 상기했는지 잽싸게 고무장갑을 끼는 모습이 기특하다.
우리 렌카는 노예로서의 자질이 느껴지는데, 동시에 대단한 반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가 세도 너무 세다. 그래서 더 정복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희 그린 티 라떼 두 개,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하나, 캐러멜 허니 라떼 다섯 개, 그리고 초코칩 프라푸치노 세 개... 이렇게 주세요.”
“그린 티 라떼 둘, 딸기 요거트 스무디 하나, 캐러멜 허니 라떼 다섯, 초코칩 프라푸치노 셋... 이렇게 맞으실까요?”
“네, 맞아요.”
“저희 음료 하나당 쿠폰 도장을 하나씩 찍어드리는데, 이렇게 주문하시면 무료 음료를 하나 드릴 수 있거든요? 아무거나 추가하실 수 있는데 뭘로 드릴까요?”
“아 그래요? 그러면... 딸기 요거트 스무디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결제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카드 가능하죠?”
“물론입니다.”
단체손님들의 주문을 결제한 나는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어제보다 사람들이 많다. 점심 직전임에도 홀이 거의 다 찰 정도.
단체손님 외에도 음료를 기다리고 있는 손님이 넷인데... 잠깐 바쁘게 움직여야겠다.
“부장이 단체주문 맡아줘요. 저는 기존 주문부터 처리할게요.”
“알았어. 허니 라떼부터 만드는 게 낫겠지? 그게 블렌더 씻기 편하잖아.”
“그렇죠.”
“바로 시작할게.”
우리가 아무리 행동을 빨리 한다고 해도, 블렌더가 하나밖에 없어서 음료를 만들고 씻고 하느라 시간이 꽤 소비되었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새로운 손님의 주문도 받아야했기에 음료를 만드는 시간이 조금씩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열심히 손발을 놀린 결과, 우린 약간 늦은 타이밍에 모든 주문을 처리할 수 있었다.
“.... 며칠 안 되긴 했지만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바빴네.”
마지막 음료를 가져가는 손님을 바라보던 렌카의 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나는, 깨끗한 수건으로 식은땀이 맺혀있는 이마를 닦아내었다.
“그러게요. 수고하셨습니다.”
“너도 수고했어. 반납대에 있는 컵들 싱크대에 갖다 놔.”
“주인에게 명령을 하는 건 좀...”
“맞을래?”
여전한 반응을 보여주는 렌카에게 키득거린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놀리지 않고 반납대로 향했다.
그렇게 쌓인 컵들을 회수하고 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저... 잠깐 이야기 가능하세요?”
어떤 남자가 혼자 있는 렌카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눈빛이 굉장히 불순하다. 딱 봐도 내 노예의 연락처를 따려 할 것 같은 느낌.
이럴 일이 언제고 일어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직접 맞닥뜨리니 짜증이 난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렌카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걸음을 놀려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렌카의 옆에 딱 붙은 채로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정색을 한 내 얼굴에 위압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렌카의 남자친구라고 생각을 한 걸까?
남자가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뇨, 음료 이름을 까먹어서... 맛있던데 이름이 뭐죠?”
맛있기는 무슨...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가지고 씨발놈이.
“초코칩 프라푸치노요.”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세요.”
맺음말로 대화를 단절해버리자, 남자가 약간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친구로 보이는 놈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하여간 렌카에게서는 눈을 뗄 수가 없어요.
태생이 음탕하니까 저런 것들은 물론이고 테츠야 같은 말 같지도 않은 새끼까지 들러붙잖아.
교육이 절실하다. 노예 목걸이라도 채워놔야지 안 되겠어.
“왜 그렇게 공격적인 말투로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고 그래?”
얌전히 있던 렌카의 물음.
그녀를 돌아본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부장 연락처를 달라고 하려는 느낌이라서요.”
“그런 느낌이 있긴 한 것 같았는데... 왜 네가 정색을 하냐고?”
도키아카에는 지금과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이벤트가 있었다.
렌카 공략을 위해서 거쳐가는 이벤트 중 하나였다.
당시에는 우유부단한 선택지밖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지.
콧방귀를 낀 내가 대답했다.
“내 노예한테 추근거리는 걸 보고도 그냥 넘어갈 주인이 어디 있어요?”
“무, 뭐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렌카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왁자지껄한 거리에서 들어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큰 언성.
그에 카페 안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몰렸다.
“아, 그... 죄송합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렌카가 쩔쩔매며 손님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나를 삼면이 막혀있는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눈을 부릅떴다.
“누, 누가 네 노예야...! 장난해...!? 쓰레기...! 개자식...! 죽어...!”
욕을 먹어도 기분이 좋은 이유가 뭘까.
렌카의 태도가 깜찍해서 그런가보다.
“처신 잘해요.”
“처신을 잘하긴 뭘 잘해...! 너 진짜 미쳐버린 거야...?”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오늘 기다릴 테니까 같이 돌아가요.”
“사이코 같은 자식...”
“일합시다. 바쁘잖아요.”
렌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할 말은 많은데 내 말마따나 카페 안이 바빠서 더 이상 뭐라고 하기엔 힘든 듯한 모습이었다.
나중에 투덜거리면 또 이렇게 말해야지.
효과가 아주 좋다.
**
“다 먹었어.”
카페가 한산해진 후 밥을 먹고 돌아온 렌카의 말에,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는 앞치마에 물기가 묻은 손을 닦아내었다.
그러자 렌카가 인상을 마구 찌푸리더니 말했다.
“네 손을 왜 앞치마에 닦아? 더럽게.”
“뭐가 더러워요. 깨끗한 건데.”
“나한텐 고무장갑을 끼래놓고 왜 넌 그냥 해? 되게 웃긴다?”
“왜 또 툴툴대요? 반항하는 거예요 지금?”
“.... 야, 빨리 밥이나 처먹고 와.”
“그러죠.”
대화를 포기한 렌카에게 히죽 웃어보인 나는 앞치마를 벗고 규동 가게로 향하려 했다.
그때, 한 천진난만해보이는 남자 꼬마아이가 부모님의 손을 잡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가족 손님인 모양. 그러려니 한 내가 카페를 나가려는데,
“어? 어제 봤던 예쁜 누나다!”
꼬마가 반가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저리 말하며 렌카를 가리켰다.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한 음색과 높은 톤을 들은 나는 뭔가 싶어 발걸음을 멈추었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응...? 나...?”
눈을 동그랗게 뜬 렌카가 자기 자신을 손가락질하자, 꼬마가 헤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봤어요! 로봇매니아에서!”
꼬마의 입에서 ‘로봇매니아’라는 말이 튀어나온 순간, 렌카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심지어는 놀라고 당황스런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기까지 했다.
렌카가 저러는 이유는, 로봇매니아가 피규어 매장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가 어제 렌카에게 문자로 알려주었던.
“거기서 RZ-78 미니 피규어 샀던 누나잖아요!”
아이의 입에서부터 튀어나온 구체적인 모델명에, 렌카가 침을 꼴깍 삼키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내, 내가...?”
“네!”
“.....”
식은땀을 삐질 흘린 렌카는 구원을 바라는 눈빛으로 아이의 부모를 쳐다보았다.
그에 그녀가 무척이나 곤란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아이의 부모가 다급하게 카운터로 가더니 말했다.
“음... 저희 카페라떼 두 잔이랑 파인애플 생과일주스 하나 주문할게요.”
“네...! 카페라떼 두 잔이랑 파인애플 생과일주스 하나 주문 받았습니다...! 쿠폰... 있으세요?”
“아뇨, 놓고 왔어요.”
“아... 그러시면 성함만 말씀해주시겠어요? 나중에 다시 오셨을 때 도장 찍어드릴게요.”
“이자와에요.”
“이자와 님... 알겠습니다... 그럼... 결제 도와드릴게요.”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 부모의 돈을 받아 거스름돈을 건네준 렌카는, 테이블로 돌아가는 꼬마의 의도치 않은 확인사살에 눈을 질끈 감았다.
“맛있게 만들어주세요, 누나!”
렌카는 속으로 꼬마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꼬마가 했던 말로 인해 의도치 않게 치부를 드러내버리게 되었는데,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겠지.
렌카는 겉으론 사나워보여도 속은 순한 사람이니까... 아마 꼬마의 머리에 딱밤을 몇 대 쥐어박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