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19화 (20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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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춥지...?”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차 안.

렌카가 뜬금없이 날씨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다.

“예. 춥네요.”

“그래... 춥더라.”

“히터 틀었는데 안 따뜻해요?”

“아니... 따뜻해.”

“그래요.”

“.....”

“.....”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끊겨버린 대화.

어색함이 풀풀 감도는 그 분위기가 싫었는지, 렌카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말했다.

“말수가 줄었네...? 점심부터...”

“그래 보여요?”

“응. 밥이 맛 없었나봐?”

“밥이 맛이 없어서 말수가 적어졌다고요? 내가?”

“.... 아님 말든가.”

꼬마에게 피규어를 산 일을 들킨 이후, 깐족거리면서 자신을 놀릴 줄 알았는데 이야기 자체를 꺼내지 않으니 불안해하고 있구나.

이것도 조교의 일환이라고 봐도 되나 싶다.

“근데 부장.”

“.....”

“부장.”

“그래! 나 씹덕이다! 이런 거 좋아해! 근데 뭐 어쩔 건데!?”

갑작스레 차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를 지르는 렌카.

예상치 못한 타이밍의 인정에 움찔한 나는 황당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니... 운전하고 있는데 소리를 지르면 어떡해요? 놀랐잖아요.”

“.....”

자신의 실책을 눈치챈 렌카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새어나오려는 대소를 억지로 참아내며 전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뜬금없이 급발진을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속에 갖고 있는 응어리가 컸나보다.

속으로 끙끙 앓기 싫어서, 이왕 걸린 마당에 내가 저번에 했던 말처럼 인정을 해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거겠지.

매번 시치미를 떼면서 가다가는 내게 휘둘리기만 할 거라는 걱정도 있었을 테고.

이유가 뭐든 시원하게 인정해버리니까 웃기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다.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던 내가 말했다.

“어제도 외투 안에 피규어 숨겼었죠?”

“.....”

“다 티 났어요. 인정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잘했습니다.”

“닥쳐.”

“왜 욕을 하고 그래요. 숨덕질을 하려면 정체를 잘 숨기면서 했어야지, 본인이 조심하지 않아놓고선 남한테 화풀이를 하네? 애초에 이렇게 될 일이었어요. 같은 아카데미 학생한테 안 걸린 걸 다행으로 알아요.”

“닥치라고 했다.”

“아까는 말수가 적다면서 뭐라 하더니... 그나저나 RZ-78은 어떤 애니에 나오는 피규어에요?”

“.....”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날 노려보는 그녀.

무안한 듯 입맛을 다신 내가 재빨리 그녀를 진정시켰다.

“알았어요. 미안해.”

“반말하지 마...!”

“미안해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져있는데, 귀여워 죽겠다.

내가 직접 렌카의 인정을 받아낸 게 아니라 꼬마의 도움을 받은 거라서 그게 조금 아쉽긴 하다만 상관없지.

어쨌거나 오늘은 그녀에게 있어 수난의 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불 속에서 소리를 지르며 베개를 퍽퍽 때려대지 않을까?

중간중간에 죄 없는 MK에게 욕 한 번 시원하게 박아주면서.

@@

“아아아아악!”

베개에 얼굴을 꽈악 묻은 렌카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사자후를 터뜨렸다.

양발을 교차하며 침대를 마구 때리기까지 한 그녀는, 마음이 조금 진정이 되자 정자세로 누웠다.

규칙적인 호흡으로 후끈한 얼굴의 열기를 가라앉힌 그녀는, 오늘 자신에게 굴욕감을 선사했던 꼬마를 생각했다.

그 개구쟁이 같은 얼굴... 죽어서도 잊지 못하리라.

‘미치겠네...’

차 안에서 마츠다가 뺀질거리는 것 같아 홧김에 자신의 비밀을 고백했다.

물론 마츠다는 자신이 이런 서브컬처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후련하냐고 묻는다면... 아주 약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말정말 약간, 먼지만도 못할 만큼.

우우웅-!

머리맡에 놓은 휴대폰에서부터 울리는 진동.

마츠다의 전화일 것 불길한 예감을 받은 렌카가 조심스레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예상대로, [쓰레기 마츠다 켄]이라는 이름이 화면에 띄워져있다.

한숨을 푹 내쉰 렌카는 잠깐 어떡할까 고민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뭐.”

-그냥 전화해봤어요. 지금 뭐해요? 피규어 구경?

벌써부터 자신을 놀리고 있다.

역시 고백은 악수였는가? 그때 조금만 침착할 걸...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진다.

“닥쳐.”

-참 한결같으시네요. 마음 아프니까 그런 험한 말은 하지 마세요.

마음이 아프긴 뭐가 아프다는 말인가.

목소리를 들어보니 딱 봐도 자신이 욕하는 걸 즐기는 것 같은데.

진정되었던 얼굴이 다시금 붉으락푸르락해진 렌카가 말했다.

“연락하지 마.”

-싫어요. 내일 오픈조 잘해요. 제 허락 없이 남자들이랑 마음대로 얘기하지 말고.

기가 찬다. 이놈은 정말 미친놈 아닐까?

치나미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주제에, 말하는 게 무슨 여자친구를 감시하고 소유하려는 남자친구 같다.

그리고 굉장히 괘씸하다.

지는 여자 손님들의 관심을 즐겼으면서, 왜 자신에게는 제약을 거는 건지...

불평등함 그 자체. 이기적인 인간의 끝판왕이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다.

“진짜 또라이네. 그러면 남자 손님이 주문할 땐 입 다물고 있으라는 거야?”

아니, 근데 왜 자신은 이런 식의 질문을 하고 있는 걸까.

욕을 한바가지 쏟아 붓고 차단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러면 마치... 자신이 마츠다에게 순종을 하고 있는 것 같잖은가.

-처신을 똑바로 하라는 거예요.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하는데?”

-또 말해줘야 해요? 입 아프게?

“시끄러. 죽어.”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말하면 혼날 줄 알아요.

“네까짓 게 날 혼낸다고?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럼 계속 해보든지.

저 자신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덕질을 하는 자신의 입장을 빌미로 협박이라도 하려고?

절대 안 통한다. 이젠 저 사악한 빌런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나 잘 거야.”

헌데 자신감 있게 말을 할 수가 없다.

마츠다의 목소리만 들으면 소심해지는 것 같은 느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잘 자요.

목소리는 쓸데없이 좋아가지고... 또 짜증이 난다.

뚝.

말없이 통화를 종료한 렌카는 검도의 필수 덕목 중 하나인 명경지수를 되뇌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다가,

“아이 씨...!”

그게 전혀 되질 않자 이불을 위로 뻥 찼다.

자꾸 생각난다. 코미케에서 길을 물어온 행인에게 즐덕하라는 인사를 건넨 자신을 발견한 마츠다가.

그리고 피규어를 들킨 부분이나, 악독한 꼬마가 자신을 알아본 것도.

‘망했어...’

마츠다와 엮이기만 하면 고요하던 내면이 와장창 깨진다.

애초에 놈을 사장에게 소개시켜주는 것이 아니었는데... 자신의 실책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이니 정면 돌파를 할 수밖에 없지.

그리 생각한 렌카는 애니쉐어에 들어가 알림을 확인해보았다.

최근에 리뷰한 여자친구 조교일지에 댓글이 여럿 달려있다.

BDSM 물에 취향을 붙였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고, 리뷰를 보고 호기심에 찾아봤는데 재미있었다는 사람, 별로였다는 사람도 있었다.

전체적인 반응을 유심히 살펴보니, 전체적으로 불호가 심했다.

장르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수였으니까.

‘재미는 있던데...’

자신 또한 다수의 사람들처럼 불호 측이었으나, MK가 처음 추천해주었던 ‘주인님과 나’에서 흥미를 붙였고, ‘여친조교’에서 제법 큰 재미를 얻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MK였다.

이놈은 마츠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니셜도 같고, 조교물을 좋아하는 것, 심지어는 뺀질거리는 말투마저도 비슷하다.

물론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7할... 아니, 8할 이상이라고 본다.

만약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훌륭한 화풀이 수단을 가지게 된 거다.

달려라 이노쨩의 정체를 모르는 마츠다가 욕을 얻어먹고 씩씩대는 모습...

상상하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조금... 이 아니라 많이 찌질하긴 하지만 기분이 좋으면 된 것 아니겠는가.

부들거리는 마츠다를 생각해보며 킥킥거린 렌카는 어플을 끄고 눈을 감았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하기도 하니까... 이른 시간이지만 자자.

‘나쁜 자식...’

속으로 마츠다를 향한 욕지거리를 쏟아낸 렌카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최대한의 노력하며 잠을 청했다.

**

늘어지는 하품을 하며 차에서 내린 나는 카페로 들어갔다.

잔잔한 발라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는 카페 안에서, 내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한 렌카가 미간을 팍 구겼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그러자 음료를 주문하고 있던 손님이 흠칫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렌카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저,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나서...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손님을 향해 거부감을 표출한 렌카가 쩔쩔매는 게 웃기다고 생각한 나는, 출근카드를 찍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이후 음료를 가지고 카페를 도망치듯 나가는 손님에게 인사를 건네는 렌카에게 다가가 말했다.

“왜 손님 앞에서 표정을 구기고 그래요?”

아침부터 비아냥거리는 내가 밉상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를 악 문 렌카가 날 노려보았다.

“너 때문이잖아...!”

“난 들어오기만 했을 뿐인데 혼자 난리네. 약속은 잘 지키고 있었어요?”

“.... 무슨 약속?”

“처신 잘 하고 있었냐고.”

“애초에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너야말로 난리야...!”

“그래서 안 지켰다?”

“시끄럽고, 일이나 해.”

“안 지켰다?”

“일이나 하라고.”

반항기가 거세졌구나.

이럴 땐 다 방법이 있지.

팔짱을 낀 나는 얼굴이 벌개지려 하는 렌카를 지그시 바라보며, 아껴야겠다고 생각했던 단어를 짧게 내뱉었다.

“흠.”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눈썹을 꿈틀한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던 것이다.

누가 봐도 수상쩍은 음모를 꾸미는 것 같은 내 표정을 살핀 그녀는, 눈을 슬쩍 피하며 순순히 실토를 했다.

“애초에... 남자손님이 안 왔어...”

“왔으면?”

“왔으면 뭐 어쩌라는 건데...! 손님이잖아...! 주문 받아야지...! 나 알바 잘리게 하고 싶어?”

“그렇게 되면 곤란하긴 하겠네요. 그럼 주문을 받는 정도는 봐드리겠습니다.”

“봐주고 자시고 할 것도 없고, 난 그냥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내가 무슨 네 소유물이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잘 자각하고 있네. 엉덩이에 칭찬 스티커 붙여줄게.

“서운하네요.”

“어쩌라고. 스트레스 받게 하지 마.”

“부장.”

“뭐, 왜...!”

“제가 이러는 게 싫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저는 절 엄청 싫어했던 부장이랑 이렇게 대화를 틀 수 있는 사이까지 온 게 좋은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기적으로 네 할 말만 하면 듣는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어?”

은근슬쩍 관심이 있다는 걸 드러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는구나.

노예의 필수덕목은 눈치인데... 안타깝다.

혹시라도 나중에 집에 가면 내 말을 곰곰이 되새겨줬으면 좋겠다.

“저희 그럼 거래할까요?”

“거래...?”

“부장은 제가 이렇게 막무가내 식으로 압박을 하는 게 싫은 거잖아요?”

렌카의 눈이 두어 번 끔벅였다.

내 태도가 진중하게 변해 당황한 모양.

“.... 그렇지? 아, 그리고 싫다기보다는... 날 화나게 하려는 목적인 게 티가 나니까...”

싫으면 싫은 거지 혓바닥이 왜 이렇게 길어.

조교가 충분히 진행된 렌카... 너무 좋다.

이 정도면 포옹 정도는 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을 해본 내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조금 자제할까요?”

“.... 그냥 그렇게 해주겠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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