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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20화 (210/313)

“물론 아니죠. 제가 부장의 입장을 배려해주는 만큼, 부장도 저한테 호의를 베푸는 게 맞지 않겠어요?”

그 말에 렌카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날 쏘아보았다.

“죽어도 안 해.”

“제가 뭘 부탁할 줄 알고?”

“뻔하지. 코스프레잖아. 분명 저번에 봤던 마법소녀 같은 복장을 입혀서 내게 굴욕감을 줄 생각이겠지.”

“마법소녀 아닌데... 부장이 정 원하면 그걸로 할까요?”

“안 한다니까? 그리고 너... 설마 내가 이렇게 거절한다고 해서 치나미한테 코스프레를 시킬 생각이라면...”

“제가 무슨 쓰레기에요? 스승님한테 그런 짓을 하게?”

“쓰레기 맞잖아.”

“할 말 없네.”

“아니 그리고 잠깐만... 치나미한테는 그런 짓이라고까지 하면서 자제하는데 왜 나한테는...”

“부장이 해주는 게 좋아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애초에 다른 사람한테 입어달라고 말할 생각도 없었어요.”

렌카의 입이 앙다물어졌다.

특별대우를 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살짝 애매해진 건가?

아니면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하는 내가 황당해서 저러는 걸까?

부디 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말을 이었다.

“딱 한 번만 해주면 더 이상 코스프레와 관련된 건 말 안 할게요.”

“해줄 이유가 없는데...”

“왜 없어요? 말투도 고치고, 이런 걸로 귀찮게 하는 일도 없어지는데.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지 말고 생각이라도 조금 해줘요.”

“.... 너 진짜 밉상인 거 알아?”

“압니다.”

“변태새끼.”

“그것도 알아요.”

렌카의 씹덕 기질을 활용한다면 더 수월하게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령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 코스프레를 한 번 해달라는 식으로.

하지만 그건 거의 협박이었고, 그렇게 했다간 호감도가 와장창 깎였을 터였다.

물론 지금도 반쯤 강제성을 띠긴 하지만, 렌카가 결정의 주체가 되는 상황이니만큼 저런 협박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생각해주실 거죠?”

갑작스레 변한 부드러운 말투에 수상한 기색을 감지했을까?

렌카가 눈을 가라앉히며 날 지그시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혹시 너 마약 같은 거 해...?”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아니... 아까부터 시도 때도 없이 태도가 바뀌니까... 어쨌든 생각은... 할 수도 있지... 생각만...”

이런 식으로 긍정적인 대답이 튀어나온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거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느낌.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내가 씨익 웃었다.

“그거면 됐습니다. 이제 주제를 조금 바꿔볼까요?”

“무슨 주제?”

“어제 산 RZ-78은 무슨 애니 피규어에요?”

“.....”

렌카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뜨였다.

올 것이 왔다는 표정.

각오를 다지는 사람마냥 콧바람을 훅 내뿜은 그녀가 말했다.

“기동기사 시리즈...”

“아, 그거 알아요. 엄청 오래된 로봇물 시리즈죠? 몇 편에 나오는 캐릭터에요?”

“첫 편... 주인공 기체...”

“저도 구경할 수 있어요?”

“무, 뭔 구경까지 해...? 그냥 휴대폰으로 찾아보면 되지...”

“그래요? 알겠습니다. 근데 부장.”

“아 왜...!”

“예전에 부실에서 저한테 했던 말 기억나요?”

“무슨 말?”

“이상한 호흡이니 뭐니 하는 걸로 스승님을 현혹하지 말라고 했던 말. 그거 사실은 무슨 기술인지 다 알면서 모른 척했던 거였죠? 덕질하는 거 숨기려고?”

“.....”

렌카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흐르는 게 보인다.

가끔씩 이런 씹덕토론으로 렌카를 놀리면 아주 맛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쌓아온 업보... 청산해야겠지?

“마츠다 군...!”

카페 안으로 들어온 미유키가 날 발견하고는 만면에 반가운 기색을 띠었다.

몇 없는 손님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추는 그녀에게 손을 흔든 내가 말했다.

“왔냐?”

“응. 구석자리에 앉을까?”

“왜 하필 구석이야?”

“일하는데 방해될까봐.”

“그런 거 없어. 원하는 자리에 앉아.”

“그럼 다행이구. 안녕하세요! 이노오 선배!”

때마침 화장실에서 나온 렌카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는 미유키.

아는 얼굴을 마주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렌카가 얼떨떨하게 인사를 받아주었다.

“안녕, 하나자와.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마츠다 군이 알려줬어요. 오늘 오는 거 모르고 계셨던 거예요?”

“몰랐지...”

“혹시 실례가 됐을까요?”

“전혀 아냐. 잘 왔어.”

미유키의 뒤에는 부반장과 빵녀가 있었다.

미유키와 렌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부반장에게도 시큰둥한 인사를 건넨 나는, 빵녀에게 턱짓을 했다.

“오랜만이다?”

“콜록?”

“난 잘 지냈지. 가서 앉아있어라.”

켁!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주억거린 빵녀는 곧 미유키, 부반장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지켜보던 렌카가 황당한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너 방금 뭐했어...?”

“뭐가요?”

“약간 소심해 보이는 애가 기침했잖아. 근데 왜 알아듣는 척해...?”

대화답지 않은 대화를 듣고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하긴, 3자가 봤을 땐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겠지.

“알아들으니까요. 부장도 쟤랑 같이 있다 보면 뭐라 말하려는지 다 알게 돼요. 기침소리의 높낮이가 다르거든.”

“그, 그래...? 신기하네... 다 같은 반 친구야?”

“예.”

“하나자와가 온다는 건 왜 말 안 했어?”

“말해야하나요?”

“그건 아니지만 말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잖아. 그리고 하나자와한테는 엄청 친절하네?”

“스승님한테도 친절하죠. 부장한테도 마찬가지고.”

“나한테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맨날...”

“맨날 뭐요?”

“.... 아니다. 너랑 말하면 내 자신이 지치는 느낌이라 조용히 하고 있을게.”

“혹시 질투하고 있는 거예요?”

“웃기지 마. 이 망상증 환자 자식아. 질투는 무슨 질투야?”

정색을 하며 날 쏘아붙인 렌카는, 미유키가 주문을 하러 다가오자 밝게 웃어보였다.

“주문하려고?”

“네, 마츠다 군은 캐러멜 허니 라떼가 제일 맛있다고 그걸로 마시라는데, 혹시 추천해주실 만한 음료가 있을까요?”

“캐러멜 허니 라떼보다는 초코칩 프라푸치노나 초콜릿 아이스 블렌디드가 더 맛있어.”

“그래요?”

“응. 아니면 하나하나씩 줘볼까?”

“저희야 그래주시면 감사한데... 만들기 너무 귀찮으실까봐...”

“손님으로 온 건데 귀찮고 자시고 할 게 있어? 괜히 배려 안 해도 돼.”

“그러면 하나씩 세 잔 주문할게요.”

“사이즈는 뭘로 할래?”

“레귤러요.”

“알았어. 쿠폰 없지? 도장 열 개 모으면 아무거나 하나 무료니까 줄게.”

“아 진짜요?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주문을 받고 결제까지 끝마친 렌카는 미유키에게 진동벨을 쥐어주었다.

이후 그녀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옆에 있던 내게 말했다.

“에스프레소 큐브 꺼내.”

“명령하지 말죠?”

“꺼내.”

“부장은 기가 세도 너무 세서 탈이네요.”

“시끄러워. 하나자와 거 대충 만들 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럼 일해.”

간만에 할 말이 없게 만들어주는구나.

나중에 두고보자.

**

“마츠다 군, 이거 여기 놓으면 되지?”

커피 트레이를 반납대에 올려놓은 미유키의 물음.

미유키를 도와 다 먹은 컵 안의 얼음을 깔대 안에 탈탈 털어넣은 내가 말했다.

“빨대는 왼쪽 상단에 놔.”

“응.”

“맛있었냐?”

“기대이상이었어. 호노카랑 마사코는 초코칩 프라푸치노가 더 좋대.”

“걔네들이 그렇지 뭐. 넌 어땠는데?”

“난 캐러멜 허니 라떼가 더 좋았어.”

역시 미유키는 속이 깊다.

지금 잠깐 창고에서 들어가서 하면 안 되나?

“다행이네.”

“여기 자주 와도 돼?”

“되지 왜 안 되냐?”

“방해될까봐 그렇지... 그럼 쿠폰에 도장 열 개 채워야겠다.”

내 앞에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도장이 세 개 찍혀있는 쿠폰을 흔들거리는 그녀.

깜찍한 미유키의 행동에 피식한 나는, 주변 눈치를 보며 그녀의 머리를 사근사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든가. 이제 뭐할 건데.”

“놀러 가려구.”

“쟤네랑?”

“응. 너무 늦지 않게 갈게. 내일 같이 공부하는 거 잊지 않았지?”

내일은 내 휴일이었다.

미유키는 그것을 잊지 않고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질색을 한 내가 미간을 구겼다.

“아 뭔 벌써부터 공부를 해. 첫 휴일은 집에서 쉬면 덧 나냐?”

“그럼 집에서 공부하면 되지. 그리고 이건 방학 전에 약속했던 거잖아.”

저 저 학생들을 관리하는 반장의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좀 보라.

사랑스럽긴 한데 공부할 생각을 하니 막막해진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으니까.

“알았어. 해.”

“잘 생각했어. 그럼 이제 간다?”

“가라.”

내 음모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미유키가 밝은 표정으로 렌카에게 인사를 하고는, 부반장과 빵녀를 데리고 나갔다.

창문을 통해 한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미유키를 지켜보고 있던 렌카가 말했다.

“왜 하나자와 같은 착한 애가 너랑 친한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

평소처럼 장난 식으로 비꼬는 걸 보니, 아까 내가 미유키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은 못 본 듯하다.

봤다면 둘이 무슨 사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려 했겠지.

“친하면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의외라서.”

“왜 또 대들어요?”

“무, 뭐...? 이상한 소리 할래...? 대드는 건 너야...!”

순식간에 시뻘개지는 렌카의 얼굴.

저렇게 본전도 못 찾을 거면서 왜 까부는지 모르겠다.

반골이라서 당연한 건가?

“그렇다고 치고, 저 내일 휴문데 혼자 잘할 수 있겠어요?”

“.... 못할 건 뭐가 있어? 사장님도 도와주시는데... 오히려 너랑 할 때보다 잘할 걸? 마음도 편할 거고.”

“내일 손님으로 와야겠다.”

“만약 그러면 네 음료에 침 뱉을 거야.”

“그래요? 오히려 좋은데.”

“무, 뭐...?”

“되도록이면 많이 뱉어줘요.”

“.... 진짜 변태새끼.”

“할 줄 아는 욕이 그거밖에 없어요? 이젠 칭찬으로 들릴 지경인데 좀 창의적으로 해봐요.”

“.....”

비아냥에 삐친 렌카...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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