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죽 내민, 블루베리 맛이 날 것 같은 저 입술에 당장 달려들어 키스를 하고 싶다.
그리 생각한 내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도 같이 돌아갈 거죠?”
“싫어... 무, 뭐야...? 다가오지 마...!”
완곡히 거절을 하려던 렌카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그녀의 곁으로 성큼 다가갔기 때문.
고개를 뒤로 쭉 뺀 렌카가 당황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는 사이, 내가 재차 물었다.
“같이 갈 거죠?”
“가, 갈게...! 가면 되잖아...! 그러니까 좀 떨어져...! 손님들도 있는데...!”
“손님들 없으면 이래도 돼요?”
“다, 당연히 안 되지 이 무식한 놈아...!”
“그냥 쳐다만 보는 건데.”
“안 돼...! 쳐다보지도 마...!”
조만간 내가 뭘 하든 허락해주게 될 거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미래를 그린 나는, 순순히 렌카에게서 떨어졌다.
“끝나고 로봇매니아에서 피규어 구경이라도 하면서 기다려요.”
“안 할 거야...! 구경 안 해...!”
“그럼 탈의실에서 애니라도 보고 있든지.”
“....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꺼...”
“알았어요.”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렌카 조교를 끝마친 나는, 얌전히 싱크대로 가 고무장갑을 꼈다.
**
저녁 근무자와의 교대를 마친 나는, 약속시간에 딱 맞춰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렌카에게 한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렌카가 도도한 몸짓으로 팔짱을 꼈다.
기가 죽지 않으려는 노력... 가상하구나.
그렇게 렌카를 태우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용히 운전에 집중하던 나는 룸미러를 통해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렌카를 흘끗거렸다.
“부장.”
“뭐.”
“어디 갔다 왔어요? 오늘은 피규어 안 샀어?”
“반말하지 마.”
“안 샀냐고요.”
“그냥 거리 돌아다녔어.”
“춥지는 않았어요?”
“별로.”
또 다시 틱틱대는 렌카를 보며 실소를 터뜨린 나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그녀의 코앞까지 내 고개를 쑤욱 내밀었다.
“흐악!?”
자신의 눈앞에 불쑥 나타난 머리에 놀랐을까?
기겁한 렌카가 짤막한 비명을 터뜨리더니, 카페에서처럼 고개를 뒤로 쭈욱 뺐다.
헤드레스트에 뒤통수를 댄 채로 눈을 크게 뜨는 그녀.
긴장을 했는지 침을 꼴깍 삼킨 그녀가 날 나무랐다.
“가, 갑자기 왜 또 난리인데...!”
“추운 것 같아서 확인해보려고.”
“어, 어떻게 확인한다는 거야?”
“가까이 붙어보면 몸에서 나오는 냉기를 느낄 수가 있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부장은 체질 자체가 차갑기도 하니까, 이렇게 하면 알 수 있어요.”
말을 마친 나는 눈에 힘을 살짝 풀면서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이후 내 얼굴을 렌카에게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마치 키스를 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이다.
“야...! 야!”
이에 렌카가 다급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손을 등받이 조절기에 가져다대었다.
등받이를 내려 거리를 두려는 모양인데... 그게 더 이상한 걸 너는 알고 있을까?
귀엽기 짝이 없는 그 행동에 속으로 대소를 한 내가 옆쪽 방향으로 턱짓을 하며 말했다.
“담요 좀 꺼내려고요.”
“담요...?”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두는 렌카.
뒷좌석을 뒤적거리고 있는 내 한손에서 담요가 들려나오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눈을 부라렸다.
“너는 담요를 왜 이런 식으로 집어...! 그냥 몸만 살짝 돌리면 되잖아...!”
“이게 편해서.”
“웃기지 마...! 날 놀리려고 한 거면서...”
“아니니까 이거나 덮어요.”
담요를 펼친 나는 그것을 렌카의 무릎 위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눈을 데굴 굴린 그녀가 자신의 기다란 속눈썹을 두세 번 끔벅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네...”
또 저러네. 좋으면서.
어깨를 으쓱인 나는 다시 전방으로 시선을 두고, 지나가듯 화제를 돌렸다.
“부장이랑 알바하는 거 진짜 재미있어요.”
“난 재미없어. 널 사장님한테 소개시켜준 걸 후회하는 중이야.”
“섭섭하네요.”
“전혀 섭섭해보이지 않는데?”
“맞아요. 휴일 겹칠 때 저랑 영화 볼래요? 이번에 유명한 애니 극장판 나왔던데. 액션 장난 아니래요.”
“.... 안 봐.”
“왜요? 이미 봤어요?”
“아니야...! 너랑은 안 본다고...! 차라리 혼자 보고 말지.”
반응을 보니 잘하면 같이 영화관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방금 훅 들어왔던 상황 때문에 놀랐는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내쉬는 렌카.
그런 렌카를 곁눈질하며 천천히 운전을 해나가던 나는, 그녀의 집이 있는 동네로 진입했다.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고풍스런 가옥.
그 앞에 차를 대어놓은 내가 말했다.
“들어가고, 그거 잘 생각해봐요.”
오늘 언급했던 코스프레를 말함이었다.
이를 눈치챈 렌카가 자신의 입술을 안쪽으로 오므리더니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태워줘서 하나도 안 고마워.”
여느 때처럼 츤데레 같은 감사인사를 전한 그녀가 담요를 잘 접어두고 시트 위에 올려놓았다.
이후 콧방귀를 훅 내뿜고는 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길쭉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를 느릿하게 출발시킨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스토어에 들러 입욕제를 샀다.
오늘 분위기를 내서 미유키를 자연스럽게 잠자리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미유키를 아예 탈진시켜놓으면, 힘들어서 공부라는 단어를 꺼낼 엄두조차 못 내겠지.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뭐 어떠랴.
가끔은 이렇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
삐빅-!
출근기에 카드를 찍은 렌카가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오늘은 2시간 정도 혼자 있다가, 사장과 함께 근무해야한다.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하자.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빠르게 운영 준비를 마치고 잔잔한 음악을 틀었다.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카페도 당연히 한산했다. 1시간쯤 뒤면 슬슬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겠지.
어제보다 더 많이 오려나? 혼자서는 힘들 것 같지만 사장이 올 때까지 어떻게든 해봐야겠다.
스으윽.
그러한 생각을 하던 찰나, 카페 자동문이 열리며 직장인처럼 보이는 한 여자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밝은 낯으로 인사를 건넨 렌카는 마츠다에게 관심이 있어 보였던 여자는 언제 올까 궁금해 하다가 손님의 주문을 받았다.
그렇게 한 명씩, 드문드문 오는 손님들의 주문을 처리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시간이 꽤 지났음을 느끼고 시계를 바라보았다.
원래 이쯤이면 마츠다가 왔어야하는데, 오늘은 없다.
‘편하네.’
뺀질뺀질한 놈이 없으니 가슴이 뻥 뚫린다.
지금 마츠다는 뭘 하고 있을까?
깐족거리는 메시지도 없는 걸 보면 태평하게 퍼질러 자고 있는 것 같다.
스으윽.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또 다시 들어온 손님.
머릿속에서 마츠다를 지워버린 렌카가 정장을 입은 남자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블렌드 커피 한 잔 주세요. 차갑게. 테이크아웃 할게요.”
“블렌드 커피, 알겠습니... 응?”
주문을 받던 렌카가 흠칫했다.
왜 자신이 방금 이런 기계적인 목소리를 낸 걸까.
남자한테 친절하지 말라는 마츠다의 말이 순간적으로 확 떠올라서, 의욕을 잃어버린 알바생 같은 태도를 보여버렸다.
이 모습을 사장이 봤다면 화를 냈으려나 싶다.
자신의 실책을 알아차린 렌카가 재빨리 말을 바꾸었다.
“죄송합니다, 블렌드 커피 주문 받았습니다. 300엔 결제 도와드릴게요...!”
“예? 아, 예... 감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남자 손님은 자신의 태도를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속으로 안도한 렌카는, 얼을 탄 자신에게 호감의 눈빛을 보내기 시작한 남자의 시선을 슬쩍 피하면서 포터 필터에 커피 가루를 담아 에스프레소를 추출했다.
이후 컵에 얼음을 담고 물과 섞은 뒤, 뚜껑을 덮고 홀더까지 끼운 후 남자에게 방긋 웃어보였다.
“커피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에 주먹 쥔 손을 입가로 가져간 남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컵을 받아들고는 카페를 나갔다.
나가기 전에 자신 쪽을 몇 번이나 흘깃거리는 건 덤.
저런 시선이 익숙했던 렌카는 그러려니 하며, 에스프레소 주변에 조금 튄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오늘은 마츠다도 없으니, 퇴근하면 아키하바라에 들러서 피규어와 오타쿠 서적을 구경해야겠다.
그런데 거기서 마츠다를 만나게 되어버리는 건 아니겠지?
요즘 서브컬처에 관심이 많아 보이던데... 저번에도 두 번 정도 우연히 마주쳤던 것도 그렇고, 갑자기 불안해진다.
‘좀 잘 숨겨야하나...?’
마츠다에게 걸린 마당이긴 하지만 다른 아카데미 학생도 자신을 알아볼 우려가 있으니까, 정체를 제대로 숨겨볼까 싶다.
여러 고민거리를 안은 채로 카페 일을 하던 렌카는 문득 어제의 마츠다가 생각났다.
갑자기 훅 들어와서는 자신을 식겁하게 만든 그의 얼굴... 아니, 면상.
자신을 놀리려고 하는 게 티가 났음에도,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잠깐 두근거렸었다.
하지만 그건 남자와 그만큼 가까이 붙은 게 처음이어서지, 마츠다의 얼굴이 잘생기거나 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 렌카는 갑자기 MK에게 욕을 하고 싶어져, 매장 안에 있는 카메라의 사각으로 가 애꿎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조금은 심심한 것 같기도 하다.
**
-후배님! 점심식사는 하셨을까요?
상큼한 치나미의 목소리를 들으니 오늘 하루가 힘이 날 것 같은 느낌이다.
찬바람을 맞으며 툇마루에 철퍼덕 주저앉은 내가 대답했다.
“아직 안 했습니다.”
-앗, 그렇군요.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아있는데, 혹시 지금 일어나신 건가요?
“예.”
-저런... 왜 늦잠을 자셨을까요.
“방학이니까요.”
-음음. 그렇지요. 먓? 할머님...! 저 배불러요...! 이러다 살찌겠어요...
말을 하다 말고 깜짝 놀라는 치나미.
뒤이어 구수한 억양을 지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이 찌긴 뭐가 찐다는 말이냐? 해골이 따로 없구먼.
-아, 안 되는데에...
-그저 간식이란다. 이것만 먹으려무나.
-네엥...
상황을 들어보니 할머니가 치나미를 위해 간식을 가져온 모양이다.
풀이 죽은 치나미의 말투를 들으니,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빨리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할머니께서 음식을 많이 챙겨주시나 보네요?”
-네... 꼼짝없이 다이후쿠를 더 먹게 생겼어요. 아까도 열다섯 개나 먹었는데... 괜히 배고프다고 했나 봐요...
할머니에게 역린이나 다름없는 말을 하다니... 이건 치나미가 잘못한 거다.
배가 고프다는 말에 시뻘건 안광을 흩뿌리며 푸짐한 요리를 내어주시는 할머니...
자신의 손자손녀를 끔찍이 아끼는 모든 할머니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그나저나 다이후쿠 열다섯 개라니... 치나미는 은근히 대식가란 말이지.
“방에 두고 조금씩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좋은 방법이군요. 그래야겠어요.
“다 먹으면 사진 보내줄래요?”
-넷...? 그럴 수 없어요...!
“왜요?”
-배, 배가 부풀어서... 지금 너무 빵빵해요...
음음... 왠지 야하게 들리는 말이다.
치나미가 돌아오면 더 빵빵하게 만들어줘야지.
치나미와 제법 긴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은 나는, 이번엔 렌카에게 톡을 보내보았다.
[밥 먹었어요?]
[먹었어. 연락하지 마.]
곧바로 온 답장.
방금 막 먹고 잠깐 휴식하는 중인가보다.
[카페는 사장님이 혼자 보고 있어요?]
[ㅇ]
[대답 똑바로 해요.]
[ㅇㅇ]
[진짜 이럴 거예요?]
[혼자 보고 계셔.]
[꼭 혼을 내야 말을 듣네. 내일 영화 볼 거 예매해놓을게요.]
[안 본다고 했잖아.]
[예매하고 시간 알려줄 테니까 나와 있으세요. 데리러 갈게요.]
더 이상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