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까부냐고.”
“까, 까불다니... 너 지금 그게 나한테 할 말이야...?”
“친한 사이에 못할 말은 아니지 않나요?”
“너 자꾸 능청을 부리면서 상황을 넘기려고 하는데, 우린 전혀 친한 게...”
렌카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더 나아가 눈을 부릅뜨기까지 했다.
내가 안 그래도 가까운 그녀의 얼굴에 더욱 다가갔기 때문이었다.
“뭐해...! 야...! 뭐하냐...?”
다급하게 내 의중을 묻는 렌카.
내가 그대로 들이대 입술을 부딪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히죽 웃어보인 나는,
“뭘 그렇게 웃고...”
이를 악 물고 내게 기어오르려는 렌카의 이마에, 내 이마를 살포시 가져다대었다.
톡. 하는 감각과 함께 전해져오는 렌카의 체온.
이마를 통해 그 따스함을 느낀 나는 얼굴을 떼어냈다.
예전의 렌카였다면, 내가 갑자기 이런 짓을 했을 때 손찌검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돌발행동에 입이 벌어진 채로 굳어만 있었다.
그녀의 얼빵한 표정이 귀엽고 예쁘다고 생각한 내가 말했다.
“가죠.”
@@
끼이익...
기름이 다 빠진 경첩이 맞물리는 소리를 들으며, 렌카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 식탁에 앉아 가계부를 작성하고 있던 렌카의 어머니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왔니?”
“네... 다녀왔습니다.”
“밥은 먹었어?”
“팝콘으로 배 채웠어요...”
“팝콘으로 되겠니? 저기 빵 사놨으니까 가져가 먹어. 그래도 배고프면 말하고.”
“네, 엄마.”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또 한정 피규어가 품절됐니?”
“피, 피규어 매장에 간 거 아니에요...”
“그럼 어디 아픈 거야?”
머리가 멍한 걸 보면 아프다고 해도 맞긴 할 것 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렌카가 자신의 워커 끈을 풀며 대답했다.
“아뇨. 영화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래요.”
“그래? 재미있는 영화였나보네?”
재미는 있었다.
그 뒤에 발생한 사건 때문에 스토리가 죄다 잊혀져서 문제지.
어색한 웃음을 지은 렌카가 말했다.
“네, 볼만했어요. 저 들어갈게요.”
“그러렴.”
그렇게 손을 씻을 생각도 않고, 렌카는 자신의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옷을 벗지도 않고 이불을 덮은 그녀는 자신의 이마에 손을 놀려놓았다.
이후 마츠다가 부딪친 그 부위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고민해보았다.
틈만 나면 툴툴거리는 자신과 자웅을 겨뤄보기 위해 도전장을 내민 건가?
이건 절대 아니겠지.
그렇다면 자신을 놀리기 위해서일까?
만약 그렇다면 제대로 먹혀들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마츠다가 했던 말이 생각조차 나지 않을 만큼.
‘내일 보자고 했었나...? 아니면 연락하라고...?’
그뿐만이 아니라 그 전의 기억도 없다.
과음하고 필름이라도 끊긴 사람마냥 상영관 복도에서부터 집으로 올 때까지, 마츠다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도저히 복기가 안 된다.
헌데 왜 자신은 마츠다가 그러는 순간 가만히 있었을까?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이 어땠는지조차도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새삼 웃기다. 이런 쪽으로는 맹탕까진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마츠다에게 연락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렌카는 그냥 휴대폰을 휙 던졌다.
굳이 연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 자신은 마츠다의 여자친구도 아니고, 썸을 타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놈에겐 치나미가 있으니까 자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가만 보면 매번 마츠다에게 휘둘리는 느낌이다.
말려들면 안 된다. 정신 차리자.
라고 생각하던 렌카는, 마츠다가 상영관에서 장난을 쳤던 일을 떠올렸다.
남녀 주인공이 로맨틱한 키스 장면 직전에 나온 대사를 따라하는 마츠다...
저음의 톤으로 키스를 하지 않겠냐며 물어왔을 때, 순간 너무 놀라서 주변에 민폐를 끼쳐버렸었다.
‘진짜 또라이 아니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가늠이라도 좀 해보고 저런 말을 하든가.
심지어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한테 그러니 좀...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너무 뻔뻔한 게 아닌가 싶다.
자신을 놀린 마츠다는 지금쯤 아마도... 아무 생각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겠지.
뺀질거리는 놈... 마음만 같아선 죽도로 머리를 내려치고 싶다.
갑작스럽게 성질이 뻗친 렌카는 콧바람을 훅 내뿜었다.
나중에 마츠다의 분신인 MK에게 스트레스를 풀어야겠다.
조금 찌질한 것 같지만 뭐 어쩌랴.
마츠다의 면전에 대고 마구 쏘아붙이면 이상한 트집을 잡을 게 뻔한데.
마음 편하게 달려라 이노쨩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MK를 갈구는 게 낫다.
근데 만약, 아주 만약 MK가 마츠다가 아니라면?
우연히 마츠다의 이름과 이니셜이 같은, 그저 조교물을 좋아하는 유저라면?
‘아냐...’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렌카의 고개가 마구 저어졌다.
이름, 말투, 성향이 같은 건 물론이고, 마츠다가 애니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시기와 MK의 최근 가입일을 확인해보면 동일인일 가능성이 아주아주 높다.
예전엔 8할이었지만 지금은 9할... 아니, 99퍼센트 이상이라고 본다.
그러니 마음 놓고 욕을 하자.
그런 음흉한 생각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렌카는 방에 놓인 피규어 진열대를 바라보았다.
진열대 중앙에 떡하니 있는, 1/7 사이즈의 액션물 주인공 피규어... 아주 영롱하다.
보고 있자니 절로 마음이 다스려지는 기분.
이번에 알바비를 받으면 주인공 히로인의 것을 구매해서 짝을 맞춰줘야겠다.
심란했던 심정이 가시는 것을 느낀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츠다의 메시지가 와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도착했어요.]
언제 온 걸까?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는데.
뭔가 싶어 휴대폰 메뉴를 확인해보니 소리 자체가 무음으로 되어있었다.
‘아, 맞다.’
영화를 보느라 설정해두었었지.
메시지가 온 시간은 10분 전인데, 마츠다가 답장이 늦었다며 화를 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근데 왜 자신이 이런 걱정을 해야 하는 거지?
마츠다가 화를 내든 말든 알 게 뭐람?
순간 자기 자신에게 어이가 없어진 렌카는, 길게 묶은 포니테일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풀고 휴대폰을 두드렸다.
[어쩌라고.]
보냈음에도 오지 않는 메시지.
자신이 보낸 답이 조금 냉랭했나 싶은 렌카가 괜히 불안해하고 있을 때,
[답장이 왜 이렇게 느려요?]
마츠다의 답장이 도착했다.
아마 뭘 하다가 휴대폰을 본 모양이었다.
[느릴 수도 있지. 나는 뭐 휴대폰 들고 대기하다가 네 메시지가 오면 제때제때 대답해야 되냐?]
[당연하죠.]
[올해 들은 말 중에서 가장 황당한 말이네.]
[올해는 며칠 안 지났는데요.]
[강조의 의미인데 그대로 받아들이면 어떡해? 센스가 아예 없네.]
[센스? 보수적인 부장보다는 많이 있을 걸요? 뭐해요?]
[알 거 없잖아.]
[코스프레는 언제 할까요?]
[뜬금없이 웬 코스프레야?]
[모른 척하지 맙시다. 집에 돌아가기 전에 그건 생각해봤냐고 물어봤더니 알겠다고, 해주겠다고 했잖아요.]
“뭐어...?”
렌카의 입에서 기가 막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코스프레를 해주겠다고 말했다고?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앉아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했을 리가 없어.]
[내일 블랙박스에 있는 음성 따올까요?]
저렇게까지 사실확인을 자신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긴 했나보다.
진짜 그 코스프레를 동의했다고?
절망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자신은 사기를 당했다.
이건... 그래, 그것이다.
마치 술에 만취하여 심신미약이 된 사람을 살살 구슬리는 것처럼, 상대방이 상황파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를 노린 음모다.
이 판결은 무효니까 말려들지 말자.
[안 할 거야.]
우우우웅-!
세차게 울려대는 휴대폰.
자신의 부정적인 대답을 보고 마츠다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받으면 마츠다가 화를 내려나?
목소리를 한 차례 가다듬은 렌카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아니, 약속까지 했는데 이런 경우가 어디 있죠?
“기억에 없어.”
-블랙박스 따온다니까?
“음성이 조작되었을지 어떻게 알아?”
-.... 뭐라고요?
황당한 투로 되묻는 마츠다.
솔직히 렌카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모른 체를 하시겠다?
무언가 음흉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 같은 목소리.
그에 렌카는, 앞으로 마츠다가 칭얼거리는 걸 듣느니 한 번 해주고 말까... 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무슨 자발적 노예도 아니고... 이런 생각을 했던 것 자체가 한심하다.
“시끄럽고, 나 쉴 거니까 끊어.”
-끊기만 해봐요. 어떻게 되나.
“뭐 어쩌자는 건데...! 난 코스프레 하기 싫어...!”
-사실 코스프레는 핑계고, 그냥 심심해서 전화했던 거예요.
“.... 그럼 안 해도 된다는 거지?”
-아뇨. 꼭 하게 만들 겁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친 렌카는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마음대로 생각해. 생각은 자유잖아.”
-그래요. 내일 제가 먼저 출근이죠?
“어.”
-모레는 휴일이고?
“사장님이 스케줄 표 보내주셨잖아. 제발 좀 똑바로 봐.”
-부장이 봐주잖아요. 내일 10분만 일찍 오세요.
“왜?”
-저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싫은데?”
-바지는 검은색 스키니진으로 부탁해요.
또 또 막무가내로 지껄이는 것 좀 보라.
마츠다는 저게 문제다.
“미쳤냐 너? 코디까지 간섭하려 들지 마.”
-그냥 그렇게 입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던 거였어요.
“왜 검은색 스키니진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부장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럼 그건 피해서 입어야겠네.”
-청개구리에요?
“신경 끄지?”
-뭐하고 있었어요? 피규어 구경?
그 말에 찔끔한 렌카가 미간을 구겼다.
“닥쳐.”
-맞았나보네. 부장 방에 피규어 진열대도 있죠? 피규어가 꽉 차있나요?
그러고 보니 새 진열대가 필요한 시점이기는 하다.
“대답할 의무는 없어.”
-서운하네요.
“그러든지 말든지.”
-오늘 재미있었어요?
“아니.”
-전 재미있었네요.
“근데?”
-다음에는 밥까지 먹어요.
“안 먹어.”
-내일 같이 피규어 매장 구경 갈까요?
“.... 아니.”
-방금 왜 뜸들였어요? 혹시 혹했던 거 아니에요?
“전혀.”
이상하게도, 마츠다의 능글맞은 목소리와 그가 하는 맥락 없는 말들이 재미있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