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질 정도로.
그렇게 렌카는,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마츠다와 꽤 오랜 시간동안 통화를 이어나갔다.
다음날 카페에 출근했을 땐, 사장이 이미 문을 열어놓은 뒤였다.
날 격하게 반기는 그와 인사를 나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내가 물었다.
“사장님이 직접 오픈하신 거예요?”
“그래. 요즘 힘든 건 없지?”
이렇게 챙겨주려는 모습을 보아하니, 장사가 잘 돼서 기쁜가보다.
하긴, 첫날 휑하던 카페에 비하면 사람이 많이 오긴 했지.
나나 렌카나 일도 잘하니 기분이 좋아졌으리라.
이참에 렌카와 스케줄을 맞춰달라고 말해봐야겠다고 생각한 내가 운을 뗐다.
“힘든 건 없는데, 염치불구하고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데?”
“이노오 선배랑 스케줄을 좀 맞춰주시면 안 될까요?”
“스케줄을 맞춰달라고? 오픈조든 마감조든 같이 한다는 거야?”
“예. 집으로 같이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서... 떼를 쓰는 건 아니고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는지 여쭤만 보는 겁니다.”
“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마.”
면접을 볼 때 서로 사귀고 있는 사이는 아닐까 불안해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다.
역시 자본주의가 좋아.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그런 마음가짐 아주 좋아. 필요한 물건 있으면 곧장 말해라. 바로 주문해줄 테니까.”
“예.”
격려차 내 등을 한 번 툭 건드린 사장은 어울리지 않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규동 가게로 향했다.
그렇게 몇 명의 손님을 받으며 시간을 보내던 나는, 뒷문이 열리면서 렌카가 들어오자 한손을 들었다.
“안녕요.”
“어.”
뒷문 벽에 붙어있는 자그마한 시계를 보니, 분침이 10에 가있었다.
8시 50분에 도착 도착한 것이다. 어제 내가 말한 대로 말이다.
심지어는 검은색 진까지 입고 있었다. 스키니진은 아니었지만.
우리 노예... 참 기특해요.
이러면 상을 주지 않을 수 없겠지?
그런 생각으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렌카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녀가 눈썹을 꿈틀하더니 말했다.
“네가 착각하지 말아야하는 게 있어.”
“뭔데요?”
“입을 옷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걸로 고른 것뿐이야... 그리고 이건 스키니진이 아냐. 스트레이트진이지.”
딱 보니 스키니진을 입기엔 내 명령을 따르는 것 같아서 껄끄럽고, 그렇다고 안 입자니 내가 트집을 잡을까봐 타협을 해서 골랐구나.
내가 말한 시간에 온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조교가 잘 되었다 아주.
전형적인 츤데레 같은 대사를 하는 렌카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의기양양한 듯 웃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안 웃었는데.”
“.... 옷 갈아입고 나올게.”
“갈아입는 거 구경해도 돼요?”
태연스럽게 저런 말을 하는 내가 어이가 없었을까?
렌카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상태로 날 멍하니 주시하던 그녀가 고개를 마구 털어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웃긴 말만 골라서 하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욕을 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어허.”
“어허는 무슨...! 죽을라고 진짜...”
사나운 척을 하는 렌카가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한 나는, 날 쏘아보고 있는 그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마치 상영관 안에서 이마를 맞부딪칠 때처럼 말이다.
그러자 움찔한 렌카가 경계심 많은 새끼고양이마냥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무, 뭐야 또...?”
그런 렌카에게서 풍겨오는 톡톡 튀는 달콤한 향을 맡으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내가 말했다.
“사장님이 저희 스케줄 시간 맞춰줄 수도 있대요.”
“.... 갑자기?”
“오늘 출근했는데 계시더라고요. 그때 말씀드렸어요.”
“왜 네 마음대로 그걸 말씀드리는데? 내 의중은 물어보지도 않고.”
“지금 물어보잖아요.”
“조치 후에 말을 하면 어쩌라는 거야? 그냥 따르라는 것밖에 더 돼?”
“그래서 지금 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사장님이 해주겠다고 말한 것도 아니고, 맞춰줄 수도 있다는 거잖아.”
“....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 또 협박 식으로 말하면서 날 몰아붙이려고?”
“아뇨. 싫으면 싫은 거죠. 부장이 몰아붙인다고 몰아세워질 사람도 아니잖아요. 그쵸?”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튀어나와서 놀랐는지, 렌카가 자신의 블루베리 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를 두어 번 끔벅였다.
“그, 그렇지...”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요?”
“.... 나는... 음...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저는 부장이랑 같이 출근하고 퇴근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냥 그렇다고요. 아, 그리고 손가락 걸죠.”
그리 말한 나는 렌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코앞에 세워진 내 새끼손가락을 본 렌카가 물었다.
“뭔데 이건?”
“어제 코스프레 하기로 약속한 거 손가락 걸자고요.”
“하... 또 시작이네.”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친 렌카가 탈의실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내가 다리를 쑤욱 뻗어 그녀의 경로를 막자, 기겁을 하며 몸을 다시 뺐다.
“아 뭐하는 거냐고 진짜...!”
“부장이야말로 뭐하는 거예요? 약속한 걸 이렇게 쉽게 파기해도 돼요?”
“쌍방 합의가 안 됐잖아...!”
“됐다니까요? 블랙박스 녹음된 거 갖고 온다니까?”
“.....”
날 무시하며 돌아가려는 렌카.
나는 그런 그녀의 경로를 팔다리로 완전히 막았다.
서로 조금만 움직이면 신체가 접촉될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거리.
이에 어제 일이 생각났는지, 렌카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비켜...!”
“전 이렇게 있을 테니까 알아서 빠져나가든지 해요.”
“다 막아놓고 뭘 빠져나가래...!”
“이 사이로 나가면 되지.”
팔과 다리 사이에 있는 공간을 턱짓하자, 렌카가 쌍심지를 켰다.
“네 몸에 닿잖아...!”
“닿으면 안 되나? 어제도 닿았는데.”
“.....”
“근데 왜 부장한테서 딸기 냄새가 나지? 틴트 때문인가?”
“무, 무슨 냄새가 나든 뭔 상관이야...!”
“이건 부장 냄새가 아니라서요.”
“이, 이거 완전 웃기는 놈이네...? 내 냄새가 뭔데?”
“블루베리요.”
“블루베리 냄새를 실제로 맡아본 적이나 있어?”
“부장한테서 계속 맡았었어요. 잠깐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투로 말끝을 흐린 나는 렌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코를 가져다대었다.
“흐이익!?”
이후 그녀가 괴상한 탄성을 터뜨리며 경련을 일으키는 틈을 타 숨을 훅 빨아들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부장 맞네요.”
“읏...! 이, 이 미친 변태 새끼...! 너 치나미한테도 이러니...?”
치나미한테는 더하지.
네가 상상도 못할 수위의 일을 많이 했단다.
앞으로도 할 예정이고.
말없이 어깨를 으쓱인 나는, 이제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변해버린 렌카를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
“싫어...!”
“손가락.”
“싫다니까...!”
렌카의 시선이 슬쩍 위쪽으로 향했다.
자신과 내 앞머리가 맞닿고 있는 미세한 감촉을 느낀 모양이었다.
렌카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재차 그녀를 재촉했다.
“손가락.”
그와 동시에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렌카가 반색을 하더니 눈동자로 카운터 방향을 가리켰다.
“손님... 손님 왔어...!”
“손가락.”
“손님부터 받아...! 그 다음에 다시 얘기하면 되잖아...!”
“지금 얘기하고 손님 받을게요.”
“카메라 있어...! 사장님이 보시면 엄청 화내실 걸...?”
“이쪽엔 없어요. 그리고 근무태도를 감시하는 건 불법입니다.”
“힉! 더, 더 다가오지 마...! 죽는다 진짜...? 장난하는 거 아니다...? 지금 그만두면 봐줄 테니까 떨어지고 손님 받아...!”
렌카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날 밀어내고는 싶은데, 그렇게 하면 내 몸을 만지게 되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렌카의 입술에 내 새끼손가락 끝이 닿을 정도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여유로운 듯 말했다.
“한 번만 해주면 다시는 이런 걸로 귀찮게 안 굴게요.”
“.....”
그러자 렌카가 입을 꾹 다물며 고민에 빠진 기색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구석까지 몰아붙인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싫다는 대답이 나왔다면, 렌카는 진짜로 그 코스프레를 할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이건 즉 렌카가 코스프레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봤다는 얘기.
물론 이 시달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눈 딱 감고 한 번 해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한 거겠지만, 내게 호감이 없었다면 그런 고민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렌카 자신은 아직 그 호감을 미운 정이라고 느끼고 있을 테지만, 이는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저기요...? 계세요?”
마침 카운터 쪽에서부터 들려오는 손님의 목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졌을까?
렌카가 짧은 콧바람을 여러 번 내쉬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날 올려다보았다.
“진짜로... 다시는 귀찮게 안 굴 거야?”
“예.”
“진짜지...?”
“맹세해요.”
“너 진짜 복수할 거야. 기억해 둬.”
“꼭 기억해둘게요.”
“.... 미친놈이네 정말...”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렌카가, 마지못해 내가 내민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그런 와중에도 신체접촉을 한 것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데, 그 모습을 보니 렌카를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 욕망을 억누른 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렌카와 엄지까지 꾸욱 붙이는 것으로 약속을 끝내고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그녀가 무언가에게서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날 쏘아보았다.
“이제 됐지 이 나쁜 새끼야?”
“고마워요, 부장. 근데 이거 반쯤 강제로 약속한 건 아니죠?”
“반쯤 강제로 약속한 거 맞잖아...!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데...?”
“만약 진심으로 하기 싫은 거라면 말해달라고요.”
“.... 그럼 취소해주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진지하게 고려해보겠습니다.”
내 진중한 말투에 흠칫한 렌카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얇고 기다란 눈썹을 찡그리더니,
“갑자기 친절한 척을 하고 난리야...! 일단 빨리 손님이나 받아...! 죄송하다는 말씀은 꼭 드리고...!”
저런 말을 툭 던져놓고는 도망치듯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헤실헤실 쪼개던 나는, 재빨리 얼굴을 굳히고 카운터로 뛰어갔다.
그리고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손님에게 면목이 없다는 듯 사과했다.
“제가 화장실을 다녀와서... 정말 죄송합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 그러시구나... 괜찮아요. 모카크림라떼 한 잔 주문하려구요.”
“드시고 가세요?”
“아뇨. 테이크아웃이요. 쿠폰 있는데 도장 찍어주시는 거죠?”
“물론입니다.”
코스프레 장소는 렌카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기 위해서 러브호텔이 좋겠지?
바니걸을 입힐 예정이니까 기존의 감옥 컨셉보다는, 약간 어두운... 바 느낌이 나는 방으로 잡으면 괜찮을 것 같다.
오늘은 아주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손님이 내민 쿠폰에 도장을 찍어주고 결제를 마쳤다.
“하아...”
설거지를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는 렌카.
아까부터 자꾸 저러는데, 코스프레를 하게 돼서 앞이 막막한 것 같다.
시름시름 앓다가 곧 죽을 사람처럼 구는 그녀에게 다가간 내가 말했다.
“왜 자꾸 한숨을 쉬어요? 코스프레 하기 싫어요?”
“당연히 싫지...!”
“취소할까요? 안 할래요?”
“그러면 오늘처럼 계속 귀찮게 굴 거잖아.”
“그건 맞긴 해요.”
“.... 빈말이라도 아니라고 하면 좀 덧 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