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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코미디를 망가뜨리는 법-226화 (216/313)

아니라고 해버리면 다 잡은 물고기가 날아가는데 어떻게 그러니.

나는 부들거리고 있는 렌카가 낀 고무장갑을 가리켰다.

“남은 건 제가 할 테니까 부장은 얼른 밥 먹으러 가요.”

“왜 또 친절한 척인데?”

“부장이 매사에 부정적인 게 아닐까요?”

“됐어. 이걸 빌미로 이상한 짓을 시킬 수도 있으니까 내가 끝낼 거야.”

“아니, 고작 설거지로 무슨 이상한 짓을 시킨다고 그래요?”

“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렌카... 음모론이 심하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저 먼저 밥 먹어요?”

“어디서 나이도 어린 게 먼저 밥을 먹으려고 들어? 나부터 먹을 거니까 기다려.”

“뭐에요 그거? 개기는 건가?”

“개기다니... 말 예쁘게 해...!”

“시도 때도 없이 욕하는 부장보단 예쁘지 않나 싶어요. 오늘도 같이 퇴근할 거죠?”

“아니.”

“알았어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직까지 내 막무가내 식 대화에 적응을 못하고 빈정이 상한 렌카는, 고무장갑에 묻어있는 물을 내게 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좀 너무 나갔다 싶었는지 이내 그만두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렌카는 착한 사람이다.

나중에 엉덩이 토닥토닥 해줘야지.

아니지, 렌카에게는 토닥토닥이 아니라 찰싹찰싹이 맞다.

“.... 복장은 봐둔 거 있어?”

설거지를 하다 말고 멈칫한 렌카의 물음에, 한쪽 입꼬리를 올린 내가 대답했다.

“네.”

“뭔데?”

“그건 직접 보세요.”

“야한 거나 마법소녀면 안 해.”

“노출은 메이드복이랑 비슷한 정도에요. 마법소녀도 아니고요.”

“.... 그래...?”

메이드복과 비슷한 노출이라 하니 납득하는 게 웃기다.

그 정도는 허용할만한 범위라는 건가? 변태스럽다.

“또 목줄 채우는 건 아니지? 그럼 나 안 해.”

이어지는 렌카의 말에 헛웃음을 친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다고 하면 하는 거지 따박따박 조건을 거네... 이번엔 그런 거 아니에요. 대신 해주면 좋은 게 있어요.”

“뭔데?”

“제가 말씀드리는 포즈를 취해주시면 됩니다.”

“미쳤냐? 그런 건 조건에 없었어.”

“해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면 제가 부장을 귀찮게 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지금보다 더 잘해드릴게요.”

“잘해주고 있다고? 네가?”

“아닌가?”

“괴롭히기만 좋아하는 주제에 잘해주긴 뭐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을 해선 안 되지...!”

“그럼 그냥 해줘요. 내 소원이에요.”

“웃기시네. 죽어도 안 해.”

“그래요?”

“어.”

단호한 렌카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손님이 있나 없나 확인해보는 것 같은 모습에서 불안함을 느꼈을까?

눈동자를 데굴 굴려 내 시선을 따라가던 렌카가 다급하게 물었다.

“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야 또...?”

“둘러보는 것도 안 되나?”

“내가 포즈를 취해주지 않는다고 하니까 이상한 계획을 꾸미려 하고 있는 거잖아...!”

독심술사네 아주.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러 다녀와요.”

“설거지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러면 저 먼저 먹습니다?”

“안 된다고 했잖아. 내가 먼저 먹을 거라고.”

“저번에는 저더러 먼저 먹으라고 그러더니 왜 이래요?”

“생각이 바뀌었어. 앞으로 무조건 내가 먼저 먹을 거야. 예의를 갖춰. 난 네 선배고, 부장이야.”

“그렇게 강압적으로 나오면...”

“나오면 뭐.”

“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렌카가 민감하게 여기는 그 탄성을 터뜨리자, 흠칫한 그녀가 눈을 치켜떴다.

“무, 뭐...!”

기세에 밀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얼굴에서 그녀가 바짝 쫄아있는 게 다 드러나고 있다.

반항하는 렌카를 가소롭다는 눈으로 한 차례 쳐다본 내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 나 밥 먹으러 다녀올게. 일 열심히 하고 있어.”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고무장갑을 싱크대에 가지런히 널어놓은 렌카의 말.

저렇게 말하니까 남편과 같이 장사를 하는 아내 같다.

“그래요.”

**

미유키, 그리고 치나미와 통화를 하며 차 안에서 시간을 보내던 나는, 퇴근을 하고 나온 렌카가 조수석 문을 열자 씨익 웃어보였다.

“끝났어요?”

“어.”

냉랭한 투로 대답을 하고는 안전벨트를 매는 그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본 내가 물었다.

“코스프레는 언제 하는 게 좋겠어요? 다음 휴일에 맞춰서?”

“아니. 오늘 해. 복장도 준비 됐잖아.”

“추진력이 대단하시네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나 봐요?”

“뭐라는 거야...! 누가 봐도 빨리빨리 끝내버리려고 하는 거잖아...!”

“알겠어요. 근데 오늘은 좀 곤란합니다.”

“왜?”

“준비할 게 있어서요. 복장도 호텔 안에 가져다놔야 하고...”

호텔이라는 단어에, 렌카가 작은 경기를 일으켰다.

“호, 호텔...? 호텔에서 한다고?”

“예. 그럼 어디서 해요? 부장 집? 저희 집? 아니면 길거리?”

“그, 그건 아닌데...”

“저번에도 호텔에서 했잖아요. 왜 이렇게 당황하지?”

“.... 아니 뭐... 당황한 건 아니었어. 그리고 그냥 오늘 하지...?”

그때와 지금의 우리 사이에 많은 발전이 있어서, 호텔을 받아들이는 감정 자체가 달라진 모양이다.

렌카가 야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인데 착각일까?

“그럼 대실 잡을 수 있나 봐볼게요.”

“대실...?”

“대실 싫어요? 숙박으로 해요?”

“미, 미쳤냐? 대실로 해...!”

“알겠어요.”

은연중으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렌카를 향해 실소를 터뜨린 나는 호텔 어플리케이션에 들어갔다.

거기서 단골 러브호텔에 들어가 원하는 컨셉 룸을 찾고 있는데, 렌카가 다소 날이 선 투로 말했다.

“이거 자주 사용하나보네...? 능숙하게 찾는 걸 보니까...”

“자주는 아닙니다. 왜요?”

“아냐... 저번에 갔던 호텔로 예약 잡는 거야?”

“맞아요.”

“그, 그럼 일반적인 룸으로 해. 이상한 컨셉 룸 말고...”

“일반적인 룸은 예약이 꽉 찼네요.”

“그래...? 그 감옥 같은 곳은 싫어. 답답해.”

“알겠습니다. 최대한 정상적인 방으로 찾아볼게요.”

이런 대화가 오가니 왠지 하기 직전에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커플 같다.

렌카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뺨이 상기된 채로 더 이상 말을 하기 싫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속으로 킥킥거린 나는, 내가 원하는 컨셉의 방이 남아있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기도 예약을 길게 잡아놔야 하나?

아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역바니 코스프레는 감옥에서 시키지 뭐.

속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나는 방을 대실이 아닌 숙박으로 예약하고, 차의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이후 자신에게도 결과를 알려달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 렌카를 바라보았다.

“일단 먼저 집에 내려줄게요. 2시간 뒤에 봅시다.”

“2시간...? 너무 애매하지 않아? 그때까지 뭐하려고?”

“씻고 복장 갖다놓으려고요.”

“그냥 같이 갖다 놓으면 안 되나...?”

“그럼 부장이 복장을 보게 되잖아요.”

“그,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불안한데...? 갑자기 하기 싫어지네...”

렌카는 알고 있을까?

지금 그녀의 태도가 평소의 드센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진 숙녀처럼 변해있다는 것을.

남자친구와 첫날밤을 보내기 직전에 크게 긴장한 여자친구 같다.

“부장이 생각하는 수위까진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부장도 집에 가면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있어요. 데리러 갈 테니까.”

“굳이 이렇게까지 귀찮게 해야 돼...? 이럴 거면 그냥 다음에...”

“이미 방까지 예약했는데.”

“.... 알았어. 오늘 해.”

“포즈는 진짜로 안 해줄 거예요?”

“안 해.”

“그럼 코스프레를 하는 맛이 안 살잖아요.”

“그런 걸 보고 싶으면 전문적인 코스프레 팀이 있으니까 그쪽을 구독해서 알아보든 가 해. 나한테 강요하지 말고.”

“강요 아닌데요.”

“강요 맞... 흐익...? 저리 안 가!?”

렌카가 투덜거리다 말고 식겁을 했다.

내가 그녀의 코앞에 상체를 들이밀었기 때문.

자신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내 얼굴이 굉장히 부담스러웠을까?

렌카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뭐하냐고...! 야...!”

그녀는 오전에 카페에서 보였던 것보다 훨씬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완전하게 밀폐된,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도 없는 공간 안에서 달라붙으니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모양.

무언가 의지할 것이 필요한지 안전벨트를 꽉 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내가 말했다.

“포즈 해줘요.”

“대, 대체 왜 포즈까지 해야 하는데...! 그냥 입기만 하는 걸로 합의했잖아...!”

“입기만 하면 너무 밋밋할 것 같아요.”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밋밋하든 말든 전혀 상관없... 떨어져! 떨어지라고...!”

내 몸이 더욱 가까워짐에 따라 좌석 등받이와 거의 한몸이 될 정도로 몸을 붙이는 그녀.

그녀의 접혀버린 턱살이 귀엽다고 생각한 내가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준다고 말하면 떨어질게요.”

“이, 이거 완전 강요잖아...! 안 해...!”

한사코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는 렌카를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린 나는, 등받이 바깥쪽에 손을 짚고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리고는 그녀의 입술을 향해 느릿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렌카가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짓더니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 잠깐 기다려...! 거기서 멈춰...!! 신고할 거야...!”

“해줄 거죠?”

“안 한다고...! 더 다가오면 죽인다...?”

“5초만 해주면 앞으로 이런 것도 안 할게요.”

“왜 조건이 자꾸 붙는데...! 싫다니까...!”

“딱 5초만. 그럼 편해질 수 있어요.”

“편해지고 자시고 할 게 뭐가 있어...! 애초에...”

톡.

렌카가 불합리한 제안에 따지고 드는 사이, 그녀의 코끝과 내 코끝이 아주 미세하게 맞닿았다.

그와 동시에 렌카의 눈이 순간적으로 확 풀어졌다.

맞닿는 그 감촉을 느낀 모양이었다.

더 이상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겠는지, 렌카가 자신의 얼굴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급박하기 그지없는 투로 말했다.

“하, 할게...! 할게! 5초...! 5초만 하면 되지...!?”

항상 날이 서있던 렌카가 이렇게 변해버리다니... 감회가 새로워도 너무 새롭다.

변화도 끝난 게 아니라서 미래가 더욱 기대된다.

그렇게 원하는 것을 얻어낸 나는, 한 차례 시원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렌카에게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전력질주라도 한 사람마냥 심호흡을 하는 렌카를 곁눈질하며, 기어를 드라이브에 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상상해서 그런가?

분명히 추운 날씨지만 내겐 무척 따스하게 느껴진다.

즐거운 마음을 뒤로한 채 집에서 바니걸 복장을 갖고 나온 나는, 예약한 룸으로 들어가 탈의실에 복장을 걸어놓았다.

구두부터 시작해서 바니걸을 완성시킬 모든 액세서리 또한 그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낸 나는 곧장 호텔을 나왔다.

어둑해진 날씨를 뚫고 렌카의 집에 도착하니 시간이 40분가량 남아있었다.

굉장히 애매한데... 렌카가 마음의 준비를 끝낼 수 있게끔 얌전히 기다려야겠다.

등받이를 뒤로 쭈욱 빼놓고 잠깐 눈을 붙이려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조수석 문이 열리자 고개를 들었다.

트레이닝 바지와 점퍼를 입은 렌카가 보인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을까?

그에 대한 의문은 그녀가 직접 해소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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