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으로 차가 보이길래 나왔어.”
“그래요?”
“어.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하지, 무식하게 여기서 기다리려고 했냐? 너 그러다 딱지 끊겨.”
“딱지가 왜 끊겨요?”
“주차장에 댄 것도 아니고 길 한쪽을 막고 있는데 그럼 안 끊겨? 이 동네에 우리 가족만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제가 걱정돼서 나온 거예요?”
“걱정은 무슨 걱정...! 딱지가 끊기면 괜히 나한테 뭐라 할까봐 방지하려고 나온 거지...!”
“그럼 걱정 맞네요. 제 걱정이 아니라 부장 본인 걱정이긴 하지만요.”
“마음대로 생각하고 출발이나 해. 빨리 끝내고 쉬어야겠어.”
의연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구나.
바니걸 복장을 봐도 저렇게 굴 수 있을까?
두근두근 마음을 다스린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차를 끌고 호텔로 향했다.
이후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은 렌카와 함께 로비로 들어가, 키오스크에서 예약한 방을 골라 키를 받았다.
“뭐야? 왜 숙박이야? 대실 아니었어?”
화면을 빤히 보던 렌카의 날 선 물음.
태연스레 어깨를 으쓱인 내가 대답했다.
“그냥 숙박으로 했어요. 마음 편하게.”
“뭐가 마음이 편하게야? 어차피 대실 시간도 다 채우지 못할 텐데 돈 아깝잖아.”
“그건 모르는 일이죠.”
“뭐...? 왜 모르는 일인데...?”
렌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야한 생각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물론 내가 오해할만하게 말을 하기는 했다.
“저번에 메이드복을 입을 때도 뜸을 들였었잖아요. 이번에도 그렇게 시간을 끌까봐서 숙박으로 한 겁니다.”
“.... 다른 이유는 없었던 거지?”
나중엔 여러 이유를 붙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없다.
그나저나 저런 말도 할 줄 알고... 많이 컸네.
조만간 렌카와 여러 일들이 가능해질 것 같은 기분이다.
“다른 이유요? 뭐가 있을까요?”
능글맞은 내 태도에 눈살을 찌푸린 렌카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빨리 가기나 하자.”
“그렇게나 기대돼요?”
“미친놈아...! 여기 있으면 창피하니까 올라가자는 뜻으로 말한 거야...! 그리고 왜 코를 킁킁거리고 난리야...!”
“부장 화장품 냄새가 좋아서요.”
“.... 누가 변태 아니랄까봐... 아 빨리 가자고...!”
“알았어요. 짜증 좀 그만 내.”
능청스럽게 렌카를 달랜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등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움찔하는 그녀를 약한 힘으로 밀면서 함께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제 됐어요?”
“함부로 만지지 마...”
“예민하시네. 미안해요.”
“.... 앞으로 조심해.”
싫다. 계속 이렇게 널 길들일 거다.
라는 말을 속으로 삼킨 나는,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
삐빅-!
도어락에 카드키를 댄 내가 문을 열자, 자주색으로 칠해진 벽면이 나와 렌카를 반겼다.
전체적으로 보라보라한 모던하고 어둑한 분위기에, 중앙에 기다란 바 형 카운터까지 있는 인테리어.
이를 본 렌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취향 한 번 특이하네... 진짜...”
“코스프레에 컨셉을 맞춘 건데요. 들어갈까요?”
“.....”
머뭇머뭇,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으며 날 따라 들어오는 렌카.
여유로운 걸음으로 구석으로 가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벽면에 굳게 닫혀있는 문을 가리켰다.
“마음의 준비가 됐으면 저기로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오세요.”
“.... 알았어.”
“물 드릴까요?”
“아니, 지금 갈아입을게.”
“벌써요?”
“빨리빨리 끝내겠다고 말했잖아. 복장은 거기 있지?”
“예. 근데 조금 대화라도 나누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싫어.”
새침한 대답을 던진 렌카가 탈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딸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킨 모양이다.
이제 슬슬 렌카의 욕이 들려올 때가 됐는데... 라고 생각할 무렵,
“야! 이 개새끼야!”
렌카가 들어간 방에서부터, 그녀의 가시가 돋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한 대로였다. 욕을 하도 많이 먹어서 오래 살겠네.
쾅-!
신경질적으로 방 문을 열고 다가온 렌카의 손에 들려있는,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 레오타드.
그것을 내 앞에서 흔든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지금 이걸 나더러 입으라는 거야? 노출은 메이드복이랑 비슷하다며!”
“비슷하잖아요.”
“전혀 아니잖아! 이건 레오타드라고! 심지어 윗가슴까지 파였잖아! 등이랑 다리 노출도 엄청 심하고!”
“제 눈엔 메이드복이랑 똑같은데.”
“네 눈이 이상한 거야! 그리고 방울 달린 초커는 뭔데!? 바니걸은 나비넥타이가 정석 아니야?”
“아, 방울은 제 취향입니다.”
뻔뻔한 내 태도에 어이가 없어졌을까?
렌카의 입에서부터 하! 하는 감탄사가 큼지막하게 터져 나왔다.
“나 이거 못해! 안 해!”
“그러면 안 되죠. 약속한 건데.”
“약속 내용이 틀리잖아!”
“코스프레를 하기로 한 게 약속인데 틀리긴 뭐가 틀려요?”
“좋아. 네가 그랬지? 진심으로 하기 싫으면 취소해주겠다고. 지금 진심으로 하기 싫어졌으니까 없던 일로 하자.”
“그럼 계속 해달라고 징징거릴 건데.”
“.....”
매일 마주칠 때마다 코스프레, 코스프레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을 되새겨봤는지, 렌카의 눈이 질끈 감겼다 뜨였다.
이후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 죽일 듯 노려보았다.
“진짜 오늘로 끝인 거지...?”
“예.”
“정말, 진심으로?”
“예. 손가락 걸게요. 자.”
렌카에게 쫙 편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그녀가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마주 걸려다가 멈칫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부동자세로 서있던 그녀가 운을 뗐다.
“.... 손가락은 됐어. 이거... 입긴 입겠는데 나한테 아주 불공정한 거라고 생각해. 네 딴엔 메이드복이랑 노출이 같다고 생각하지만 내 눈엔 전혀 아니야. 그러니까 나도 보답을 받아야겠어.”
“어떤 보답이요?”
“이거 해주면, 너도 내 소원 하나 들어줘.”
“무슨 소원?”
“몰라. 아직 생각 안 해봤어.”
노예가 주인에게 거래를 시도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채찍질을 당해도 모자랄 상황. 하지만 지금 내 노예는 사춘기 여고생마냥 반항기가 남아있으니까, 그녀와의 끈끈한 정을 계속 잇기 위해서라도 들어줘야겠다.
이상한 소원을 빌 경우 소원을 취소하게끔 만들면 그만이지.
그리 생각한 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약속해.”
“약속할게요.”
“.... 좋아. 지금 입고 나오면 되지?”
“예. 액세서리도 다 착용해야 돼요.”
“.... 방울은 봐주면 안 돼? 머리띠랑...”
“바니걸의 완성은 그 액세서리들인데 장난하세요? 절대 안 됩니다.”
“개새끼...”
메이드복을 입을 때와 비슷한 흐름으로 가고 있는데, 데자뷰 같다.
속으로 낄낄거린 나는 말없이 탈의실 문을 가리켰다.
그러자 렌카가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일부러 쿵쿵거리는 소리를 내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젠 감상만 남았나? 상상만 해도 꼴린다.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기 시작하는 것을 참아내며, 나는 침대에 편히 누워 렌카를 기다렸다.
**
렌카가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나는 휴대폰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고작 5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체감상 20분은 기다린 것 같은데 너무 늦게 흐르는 거 아닌가?
기다림 자체가 곤욕이구나. 힘들다.
당장에라도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참아내며 렌카를 기다리던 나는,
끼익...
탈의실 문이 자그마한 틈만 남기고 열리다 말자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렌카의 눈.
탈의실의 불은 꺼놓았는지 틈새가 어둡다.
“다 갈아입었어요?”
“.... 야.”
하라는 대답은 하지 않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날 부르는 렌카의 호흡은 살짝 불규칙적이었다.
왜일까 고민을 해보았는데, 답은 바로 나왔다.
어깨끈이 없는 레오타드를 혼자 입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걸 생각하지 못하다니... 내 실책이다.
“예.”
“이, 이거... 혼자 입기가 불가능해... 등에 지퍼가 좀... 뒤로 돌 테니까 오, 올려줘봐...”
“알겠어요.”
“문은 내가 열 때까지 절대 건드리지 마... 알았냐...?”
“예.”
“흐흠...”
무안함을 지워내려는 듯 헛기침을 한 렌카가 뒤로 돌더니 문틈에 자신의 등을 붙였다.
그 때문에 틈 사이로 레오타드 뒤쪽에 달려있는 하얗고 복실복실한 바니 테일이 살짝 튀어나왔는데, 그게 눈에 확 들어왔다.
동시에 그 밑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골반과 엉덩이, 그리고 데니아 수치가 적은 스타킹을 신은 길쭉한 다리.
거기에 더해 혼자 끙끙대느라 조금 흘린 땀으로 인해 윤기가 흐르는 새하얀 등...
욕구의 한계가 순식간에 크게 늘어나는 느낌이다. 벌써부터 이 정도인데 렌카가 나오면 못 참고 덮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무, 뭐해...! 빨리 지퍼나 올려...!”
렌카의 뒷모습을 감상하던 나는, 그녀의 재촉에 정신을 차리고 얌전히 지퍼를 올려주었다.
지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여지는 레오타드.
“흣!”
자신의 상반신이 조여지는 느낌이 이상했는지, 렌카가 신음 같은 탄성을 짤막하게 터뜨렸다.
그 소리가 굉장히 야릇하다고 느낀 내가 물었다.
“됐어요?”
“돼, 됐어... 이제 문 닫고 저기 떨어져있어... 30초 뒤에 나갈 거니까...”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해야 돼...! 이거 진짜 쪽팔려서 죽을 것 같거든...? 그러니까 꺼져있어...!”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한 나는, 문이 쾅! 닫히자마자 탈의실에서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끼이익...
탈의실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양손으로 윗가슴을 가린 렌카가 조심조심 모습을 드러냈다.
손목에 찬 커프 링크스와 머리에 찬 토끼 머리띠, 그 뒤에 달린 리본,
그리고 광택이 흐르는 레오타드와 스타킹, 마지막으로 굽이 굉장히 높은 구두...
준비해둔 복장과 액세서리를 모두 착용한 그녀는 정말 아름답다고 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었고, 섹시하기 짝이 없었다.
“빠, 빨리... 빨리 포즈 말해...”
굴욕감으로 가득한 표정으로 땅을 바라보며 포즈를 주문하라는 말까지...
더없이 만족스럽다.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멍하니 렌카를 주시하던 나는,
딸랑-!
“힉!”
렌카가 자신의 목에 찬 방울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달싹이자,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를 걱정했다.
“그... 괜찮겠어요? 포즈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닥쳐...! 이제 와서 마음 약해진 척하지 마...! 이제 어떻게 하면 되냐고...! 빨리 끝내버리고 집에 갈 거야...!”
“아니 뭐... 토끼 율동을 원하긴 하는데... 할 수 있겠어요?”
“무, 뭐라고...? 토끼 율동...?”
상상도 못한 포즈라고 생각했는지, 렌카의 입이 헤 벌어졌다.
바니걸을 입었으면 당연히 율동도 해야지.
설마 트레이를 한손에 들도록 하고 서빙을 하는 그런 무난한 포즈를 상상했나?
그랬다면 좀 실망스럽다.
“예. 토끼 율동이요.”
“너는... 쓰레기야. 재활용 같은 건 절대 안 되는 쓰레기... 알아?”
반쯤 자포자기한 눈빛으로 저주를 퍼붓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내가 대답했다.
“뭐... 그렇죠. 인정합니다.”
“.....”
“시작할까요?”
윗가슴을 가린 렌카의 팔이 서서히 위로 들리면서, 관자놀이 부근에 자리를 잡는다.
동시에 그녀의 골반이 뒤로 빠지면서, 허벅지가 안쪽으로 살짝 오므려졌다.
내가 주문하지도 않은 행동까지 해버리며 색기를 풀풀 흘려버린 그녀는,
내 눈만큼은 도저히 마주칠 수가 없었는지, 모멸감에 사로잡힌 자신의 시선을 약간 아래로 둔 채로 아랫입술을 꽈악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