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1 - 렌카 조교일지 4 #2
“푹 쉬고, 내일 봐요.”
집 앞에 차를 대어놓은 내 말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없던 렌카가 어깨를 달싹이더니 대답했다.
“.... 어.”
“데리러 올 테니까 시간에 맞춰서 나오고요.”
“아, 알았어...”
주섬주섬 핸드백을 챙기려다가, 아이라이너를 떨어뜨려버리는 렌카. 그녀의 허둥지둥한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부장.”
“응...?”
“그냥 불러 봤어요.”
“그, 그래...”
예전이었다면 뭐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며 꿍얼거렸을 텐데, 지금은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얌전히 수긍하고만 있다. 반응이 너무 솔직하잖아. 골려주고 싶다.
“돌아가서 할 거 있어요?”
“할 거...? 딱히 없는데...”
“그러면 잠깐 다른 데라도 갈까요?”
“다른 데...? 우, 웃기지 마!!”
“왜 그래요?”
“이상한 곳에 데리고 가려 했잖아...!! 러브호텔 같은 데...!!”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얼마나 잔뜩 끼어있으면 곧바로 러브호텔를 생각할까. 물론 저렇게 생각하라는 목적으로 한 말은 맞긴 하다.
“뭐라는 거예요. 공원이나 카페 같은 곳을 말한 건데.”
“거짓말하지 마...!”
“러브호텔이 가고 싶으면 가요. 전 좋아요.”
“닥쳐...!”
“이번엔 코스프레 말고 딴 거 할까요?”
능글맞은 표정으로 아리송하게 말을 하자, 그 속뜻을 눈치챈 렌카가 거의 경기를 일으키다시피 하며 몸을 떨었다.
“다, 닥치라고 했지...!! 죽어!”
“그 말은 몇 번이나 듣는 건지 모르겠네요.”
큰 사건이 있었음에도 천연덕스러운 내가 황당했을까? 렌카가 말없이 날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와 시선을 맞대기가 무안해졌는지, 아니면 부담스러웠는지 이내 눈을 내리깔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갈게...”
“조금만 같이 있다가 가지?”
“내가 왜...?”
“심심해서요.”
“그, 그러면 애초에 집에 오지 말았어야지...!”
“바로 호텔로 갈 걸 그랬나요?”
“뺀질거리지 마...! 난 집에 갈 거야...!”
오늘 같은 날은 렌카를 너무 놀리지 말자. 이쯤 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들어가요.”
“.... 뭐야?”
멈칫한 렌카가 수상쩍기 그지없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평소에 비해 상대적으로 순순히 보내줘서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뭐가요?”
“너 이상한 생각하고 있지...?”
“아닌데요. 피해망상도 그 정도면 중증이네요.”
“피, 피해망상이라니...! 날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음음... 방금 대사, 굉장히 꼴렸다. 약간 함락 직전까지 온 여기사 같았어.
“그런 거 아니니까 들어가요. 오늘 힘들었잖아요.”
에둘러 상영관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힉! 하는 추임새를 넣은 렌카가 재빨리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씩씩대며 말했다.
“문은 네가 닫아...!”
뭐지 이건? 날 약 올리려는 건가? 최후의 발악 같은 느낌이라서 웃기다.
“그럼 내려야 되잖아요. 닫고 가요.”
“네가 닫으라고...!”
“닫고 가라고 했습니다.”
“.....”
목소리를 낮추자 쫄았는지 고분고분 문을 닫는 그녀. 무어라고 투덜거리며 멀어지는 렌카의 뒷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한 나는, 대문을 연 그녀가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내 차를 곁눈질하는 것을 보고 피식했다.
오늘 렌카가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으려나? 내일 눈 밑이 퀭해진 채로 올 것 같다.
**
“오늘 예쁘네요?”
다음날 아침. 간만에 밝은 코디로 나온 렌카를 향한 내 칭찬에, 어깨를 달싹인 그녀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
“뭐 어쩌라고...”
틱틱대고는 있지만 목소리 안에 은근한 기쁨이 서려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한 그녀에게 킥킥거린 나는 카페로 차를 몰면서 대화를 시도했다.
“어제 잘 잤어요?”
“어.”
“목소리에 힘이 없는데?”
“있어.”
“눈 밑이 좀 시꺼먼 것 같은데요.”
“착각이야.”
“왜 쌀쌀맞게 굴어요?”
“내 맘.”
“대답도 똑바로 안 하네.”
“그것도 내 맘.”
“그래.”
툭 던지듯 튀어나온 반말에, 렌카가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냉정하게 굴어놓고 내게 뭐라 하기는 조금 그랬는지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렌카도 나와 티격태격하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것 아닐까? 그러한 생각을 해본 나는 카페에 도착해 차를 세웠고, 그녀와 함께 후문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카페에 불을 켜고 렌카를 먼저 탈의실로 보내려는데, 그녀가 들어가려다 말고 돌연 날 불렀다.
“야.”
“어.”
“.... 할 말이 있어.”
“뭔데요?”
“어제...”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죠.”
“드, 들어오려고 하지는 마...! 거기 서있어...! 멈춰...!”
자연스럽게 렌카와 함께 탈의실로 들어가려는데, 그녀가 다급하게 양손을 내밀더니 내 접근을 막았다.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으면 무언가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그게 맞긴 하다.
렌카의 가소로운 방어에 코웃음을 친 나는, 그녀의 코앞까지 성큼 다가갔다. 그러자 온몸이 뻗뻗하게 굳은 렌카가 뒷걸음질을 치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거면서 반항은 왜 하는 건지... 우리 렌카는 일단 질러보는 면이 있다.
철컥.
탈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렌카가 깜짝 놀라선 라커 구석까지 느릿하게 물러났다. 제 스스로 먹히기 좋은 장소로 향하는 모습을 보니 기특하다.
재차 렌카의 앞으로 간 나는, 애써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렌카를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볼록한 주머니를 턱짓했다.
“휴대폰 꺼내봐요.”
“휴, 휴대폰...?”
“예.”
“싫은데...?”
“왜요?”
“왜냐니... 내가 왜 휴대폰을 꺼내야 되는 건데...?”
“어제 준 고리 꼈나 보게.”
“안 꼈는데...?”
“왜요? 오늘부터 끼고 오라고 했잖아요.”
“어, 어제 바로 집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껴...! 고리를 걸 수 있는 케이스도 없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 거지...!”
“끼기 싫었던 건 아니네요?”
“.... 무, 물론 싫었던 것도 있긴 하지...!”
저리 대답하는 렌카의 양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해 오른쪽 아래로 향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럼 오늘 끼세요.”
“.....”
“대다...”
“알았어! 알았다고...!!”
이젠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나오는구나. 조교가 아주 잘 됐어.
그녀의 반응에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낸 내가 물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아... 그...”
새초롬하던 렌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하게 반전되었다. 무언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날 똑바로 올려다본 그녀의 입에서, 어제 있었던 사건이 우회적으로 흘러나왔다.
“그... 어제 영화관에서 그거... 서로 홧김에 그랬던 거잖아?”
저럴 줄 알았다. 저 다음에 나올 말이 뭔지는 대충 예상이 가긴 하지만, 말하지 못하게 해야지. 그리 생각한 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닌데요.”
“응...? 아, 아니라고?”
“예. 아닙니다.”
“.....”
벙 찐 렌카의 두 눈이 예쁘게 끔벅거렸다. 여기서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듯한 모습. 가볍게 표정을 굳힌 내가 렌카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홧김은 무슨 홧김이에요? 부장이나 저나 실수라도 했다는 거예요?”
“....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은... 히야악!”
뻘줌하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변명을 하려던 렌카가 돌연 하이 톤의 비명을 터뜨렸다. 내 다리가 그녀의 딱 달라붙어있는 다리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갔기 때문.
그 상태에서 어제 상영관 안에서처럼 렌카와 완전히 몸을 밀착한 나는, 그녀의 잘록한 허리라인에 손을 대어놓았다. 그리고는 벌써부터 거칠어지기 시작한 숨을 내뱉고 있는 렌카의 입술을 덮치려다가 바로 직전에 멈추었다.
“힉...!?”
꼼짝없이 키스를 당하는 줄 알았는지, 렌카의 눈꺼풀이 질끈 내려갔다. 그러다 자신의 입술이 괜찮은 것을 인지하고는 한쪽 눈만을 지그시 뜨며 날 살폈다.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 내가 의아한 듯한 얼굴이다.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와 선을 그으려고 하기는... 무슨 비련의 주인공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가소롭다는 듯한 비소를 내뱉은 나는 고개를 살짝 틀어, 어제와 같은 색을 지닌 렌카의 입술 사이에 혀를 살짝만 들여보냈다. 이후 온몸을 바르르 떠는 렌카의 허리를 잡은 채, 그녀의 윗입술 안쪽만을 혀끝으로 살며시 훑고는 얼굴을 떼어냈다.
“흐아...?”
새로 맛 본 스킨십에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가버린 걸까? 렌카가 어벙한 눈으로 입을 헤 벌렸다.
그 틈을 탄 나는 여유롭게 블루베리 맛 사탕을 꺼내, 렌카의 입에 넣어주었다. 처음 사탕을 줬을 때처럼, 엄지와 함께.
“우읍...!?”
그러자 렌카의 흐리멍덩해져있던 눈 초점이 돌아왔다. 자신의 이빨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손가락에 이성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는 렌카가 손가락을 깨물기 전에 재빨리 엄지를 빼냈다. 그리고 렌카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혀를 내밀고, 그곳에 그녀의 입 안에 들어갔던 엄지를 가져다대고 위에서 아래로 쓸듯 내렸다.
“으아앗...! 무, 뭐해...! 뭐하는 거야 이 미친놈아...!!”
이런 내 모습을 본 렌카의 놀란 외침. 얼굴이 무척 빠르게 빨개지는 것이 보인다. 방금 했던 키스보다 훨씬 수위가 약한데도, 상황 자체에서 오는 분위기가 야릇해서 부끄러움이 찾아왔나보다.
동시에 마음에 들기도 하겠지. 렌카는 사람을 벽에다 밀어붙이면서 위압적으로 나오는... 약간 카베동 같은 클리셰적인 느낌을 좋아하니까.
“오늘 치 사탕 줬잖아요.”
천연덕스러운 내 말에, 렌카가 자신의 가슴을 쿵쿵 때렸다.
“사, 사탕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뭐요.”
“.....”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린 그녀. 제 입으로 방금 일을 말하기가 창피한 듯했다.
그런 렌카를 바라보며 씨익 웃은 내가 말했다.
“나갈까요?”
“무, 뭐...?”
“옷 갈아입어야 되잖아요.”
“아, 그...”
“갈아입고 나와요.”
명령조로 통보한 나는 렌카의 가랑이 밑에 끼워놓았던 다리를 뺐다. 그리고는 휘청거리는 렌카의 몸을 부축해 중심을 잡아주다가, 헉헉거리는 그녀가 조금 괜찮아졌을 때 탈의실을 나와 문을 닫아주었다.
여태까지 착실하게 진도를 뺐다. 고삐도 풀렸으니까, 오늘부터는 렌카를 확실하게 휘어잡기 위해서 속도를 붙여도 된다고 본다. 과감하게 나가자. 사실 그게 내 적성에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