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2 - 세이프 워드
카페를 오픈한 직후 내 눈치를 보며 일을 하던 렌카는, 손님이 오자 혼자 귀신이라도 본 사람마냥 화들짝 놀랐다.
“어, 어서 오세요...! 카페 24입니다...!”
말까지 더듬거리며 손님을 맞이하는 렌카. 쩔쩔매며 주문을 받은 그녀가 에스프레소 머신을 조작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말했다.
“제가 만들까요?”
“아, 아냐...! 내가 만들게...!”
“주문이 뭐였는데요?”
“카페모카에 생크림 적게...”
“생크림 많이 넣어달라고 하시던데?”
“그, 그래...? 분명히 적게 넣어달라고...”
“그건 얼음이고요.”
“아... 그랬어...?”
“정신 좀 차려요.”
따끔한 질책에 자신의 가녀린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렌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얼굴은 뚱한 상태였다. 지금 누구 때문에 자신이 이렇게 된 건지 따지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일단 제조부터 해요. 생크림이랑 시럽은 내가 뿌릴 테니까.”
“.... 내가...”
“제가 한다고요.”
“.....”
“대답.”
“아, 알았어.”
그렇게 렌카는 어찌 저찌 카페모카를 만들어 내게 넘겼다. 그 위에 생크림과 시럽을 올려서 손님에게 건네준 나는, 아직 카페가 바쁘지 않은 틈을 타 렌카를 불러 감시카메라가 없는 구석으로 향했다.
“뭔데...? 아까 주문 잘못 받은 건 분명히 잘못한 일이고,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을 거야...”
날 앞에 두고 소심한 변명을 쏟아내는 그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실소를 터뜨린 내가 말했다.
“그거에 대해서 뭐라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저희도 이제 슬슬 세이프 워드를 정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어서요.”
“세이프 워드...?”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한 말을 곱씹던 렌카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세이프 워드라는 단어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증거였다.
“그, 그건 BDSM 플레이나 컨셉 플레이를 하는 에세머들끼리나 정하는 거잖아...!”
“에세머라는 단어도 알아요? 일반 사람들은 이런 은어를 잘 모르는데.”
“.....”
렌카의 어깨가 미세하게 달싹였다. 지금까지 내가 추천해주었던 만화에서 나온 단어들을 저도 모르게 내뱉어서 찔끔한 것이다. 속이 훤히 보이는 그녀에게 히죽거린 내가 물었다.
“어떻게 알죠?”
“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네 태도지...! 지금 나랑 그런 걸 하겠다는 거야 뭐야...!”
“그런 걸 하겠다는 게 아니라... 제가 이러는 게 정말, 진심으로 불편하거나 싫으면 말하라는 뜻에서 정하자는 겁니다.”
“이러는 거...?”
“예. 이런 거요.”
그리 말한 나는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디뎌, 탈의실에서처럼 렌카의 다리 사이에 끼우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뭘 하려는지 예측한 렌카가 재빨리 다리를 오므리고 힘을 빡 주자 미수에 그쳤다.
“어딜 감히...!”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훅 뿜은 렌카가 팔짱을 꼈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수비에 한 번 성공하니 콧대가 높아진 모습이 웃기다.
“예를 든 건데 왜 그렇게 의기양양해해요? 어쨌든 이런 게 싫으면 정해둔 단어를 말하라고요.”
“.... 그럼 안 할 거야?”
“일단은 존중해드릴게요.”
“그, 근데 너 되게 웃긴다? 애초에 그런 걸 정하지 않아도 싫다고 하면 그만둬야하는 게 정상 아니야?”
“저는 지금 부장한테 굉장히 많은 혜택을 주고 있는 겁니다. 노예한테 이렇게 해주는 주인 없다니까요?”
“노예 아니라니까...!”
“마음대로 생각하고, 단어는 뭘로 정할까요? 부장이 한 번 생각해봐요.”
“안 정해...! 애초에 그런 단어를 말해야 그만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럼 제가 정하겠습니다. 블루베리 어때요?”
렌카의 인상이 팍 찌푸려졌다.
“싫어...! 촌스럽게 무슨 블루베리야...!”
“뭐가 촌스럽다는 거예요? 부장한테 잘 어울리는데.”
“하, 할거면 그냥 귤로 해... 귤...”
수긍하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귤이라니... 일단은 내 놀이에 어울려줘서 상황을 넘기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이런 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건가? 부디 후자였으면 좋겠다.
“귤 좋네요. 짧은 단어가 말하기도 편하고.”
“절대 쓰진 않을 거야... 그냥 블루베리가 질리니까...”
“그렇다고 칩시다. 액션도 정하죠.”
“액션...?”
“모션 같은 거요. 세이프 모션 같은”
“그런 건 왜 또 정하자 하고 지...”
“방금 욕하려고 했어요?”
“.... 왜 정하자 하고 난리야...!”
최대한 절제된 태도로 따지고 드는 렌카가 귀여웠던 나는,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볍게 가져다대었다. 순식간에 다가와 토옥 하고 부딪치는... 마치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그 스킨십에, 렌카의 눈과 몸이 확 풀렸다.
“아...”
진이 죄다 빠져버린 탄성을 토해내는 렌카의 팔을 붙잡고 제대로 일으켜 세운 내가 태연스레 말했다.
“이렇게 해버리면 부장이 말을 못하잖아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렌카가 주먹을 꽈아악 쥐었다. 호승심을 불태우는 건지, 아니면 설렘을 가라앉히려는 건지는 대충 봐도 답이 나온다.
“어떤 걸로 정할까요? 제 머리채라도 잡고 당길래요?”
“.....”
“아, 이건 안 되겠네요. 나중에 상황이 조금 과격해지면 부장이 본의 아니게 잡아버려서 제가 착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 다른 걸로 합시다.”
미래에 벌어질 일을 넌지시, 은연중으로 말하자, 소스라치게 놀란 렌카가 입을 뻐끔거렸다.
“무, 뭐...? 그건 무슨 소리야...?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지...?”
“저랑 부장이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 이 미친놈아...! 아까는 그런 거 안 하겠다고 했잖아...!”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머릿속에 이상한 것만 가득한 쓰레기 새끼...! 죽어...!”
“듣기 좋네요. 더 해줘요.”
천연덕스러운 내 태도가 얄미웠을까? 온몸을 부들부들 떤 렌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나를 어깨로 밀면서 카운터로 향했다.
치욕스러워하기보다는 부끄러운 게 더 많은 것 같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방금 키스로 인해 입술에서부터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음미하며 렌카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는 개구쟁이 같은 투로 물었다.
“이건 나중에 정할까요?”
“.... 닥쳐.”
“그래요. 나중에 정해요.”
“닥치라고 했지...! 이제부터 말 걸지 마.”
“싫어요.”
“그럼 내가 대답 안 할게.”
“유치하네요.”
“네가 유치하게 만들었어.”
“제 책임이다?”
“당연하지.”
“그럼 책임져야겠네요.”
“.... 뭐?”
또 다시 벙 찌는 렌카의 얼굴. 그냥 한 말인데 온갖 의미부여를 다 하는 것 같다. 이 정도면 중증인데, 조금 쉬게 해줬다가 다시 놀아야겠다.
렌카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나는, 경련을 일으키는 그녀를 품 안에 살짝 끌어안았다가 놓아주는 것으로 오전 스킨십을 마무리했다.
“이...!”
그리고는 욕을 쏟아내려는 렌카를 무시하며,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
“어디에요?”
-할머님 할아버님과 함께 산책을 하다가 방금 돌아오는 길이에요.
치나미의 순수한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꼴려서, 렌카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주고 싶은 기분이다. 그 충동을 참아내며, 나는 치나미와 통화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일하시는 시간 아닌가요?
“점심시간이라 손님이 뜸해서 괜찮습니다.”
-보통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에 손님이 가장 많지 않나요?
“점심을 먹는 시간에는 적죠.”
-앗, 그런가요?
“그런 겁니다. 며칠 후에 돌아오죠?”
-맞아요. 돌아가자마자 후배님과 렌카의 얼굴을 보러 카페에 들를 생각이에요.
“그러면 저야 좋죠. 마중 나갈까요?”
-아니에요. 부모님과 차로 돌아가는 거라서요.
“알겠습니다. 오늘 밤에 사진 보내줘요.”
-넷...? 사진...?
“저번에 보내줬던 정도로 부탁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하... 알겠어요...
아아... 우리 착한 치나미... 빨리 보고 싶다. 오랜 시간동안 치나미의 엉덩이를 만지지 못하다보니 금단현상이 일어나서 손이 떨릴 지경이야.
쑥스러워하는 치나미와 몇 차례의 대화를 나눈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 타이밍에 점심을 먹은 렌카가 돌아왔는데,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있는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일하는데 누가 통화하래? 이거 사장님한테 말할 거야.”
그녀의 볼은 한쪽 방향이 살짝 튀어나와있었다. 무언가를 물고 있는 모양인데... 설마 사탕인가?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아무 사탕이나 주워 먹다니... 벌점을 부과해야겠다.
“그러든가요. 근데 뭐 먹고 있어요?”
“박하사탕.”
“규동 가게에 있는 거?”
“어.”
“누가 마음대로 먹으래요?”
“뭐...?”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순간적으로 넋이 나가버린 그녀. 잠깐 그러고 있던 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무, 무슨 이런 것까지 통제를 하려고 해...! 그럼 난 네 허락 없이는 간식 같은 거 못 먹어...!?”
“보고 없이 먹었으니까 오늘부터 통제하려고요.”
“개소리하지 마...! 죽는다 진짜...?”
“됐고, 내놔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렌카에게 서서히 접근하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사탕 뺏으려고요.”
렌카의 눈앞에서 우뚝 멈춘 내가 무릎을 굽히자, 렌카가 양팔을 내밀더니 내 몸을 막았다.
“아, 안 돼...! 하지 마...! 이건 진짜 아니야...!”
그리고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으며 사탕을 오도독 오도독 씹어대기 시작했다. 자신이 먹고 있는 사탕을, 내가 입으로 옮겨가려 한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키스 몇 번 했다고 눈치가 좀 생겼네.
“왜.”
“왜냐니... 그냥 새 거 갖다 먹으면 되잖아...! 그리고 양치... 아니, 어쨌든 안 돼...! 사탕 다 먹었어...!”
밥을 먹은 직후에 양치도 안 해서 키스하기 껄끄러웠던 거였어? 난 괜찮은데. 순간 본심이 튀어나와버린 렌카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내가 나직이 말했다.
“아직 다 안 삼켰잖아요. 조각이 남아있는 것 같은데.”
“이, 이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지금 막 삼키려는 참이었어...!”
“삼키면 혼날 줄 알아요.”
“귤...! 귤...!!”
절대 안 써먹는다고 할 땐 언제고... 급하니까 정했던 세이프 워드가 튀어나오고 있다. 배움이 빨라서 기특한데 뜬금없이 귤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조금 웃기다. 문장으로 해야 하나? 이건 잘 생각해봐야겠다.
“시도 때도 없이 쓰는 건 별론데...”
“어, 어쨌든 약속한 거니까 아무 짓도 하지 마...!”
“그게 무슨 만능 단어인 줄 알아요?”
“존중해준다고 했잖아...! 그치...?”
“그러긴 했죠. 알았어요. 이번만큼은 넘어가드릴게요.”
어깨를 으쓱인 내가 순순히 물러나자, 안도감이 가득 담겨있는 한숨을 길게 토해낸 렌카의 목젖이 크게 꿀렁거렸다. 재빨리 남은 사탕을 삼킨 그녀가 빨리 꺼져버리라는 듯 카페 후문을 가리켰다.
“밥이나 먹어...”
“빨리 먹고 올게요.”
“제발 느리게 좀 먹어...”
“체할까봐 걱정해주는 거예요?”
“아니야... 착각하지 마...”
“그러면 제가 불편해서 이러는 거예요?”
“누가 불편하대...? 그게 아니고...”
“그럼 됐네. 금방 먹고 올게요.”
“.... 너 마음대로 해.”
“그래요.”
렌카의 등을 토닥인 나는, 그녀가 힘이 빠진 와중에도 팔을 휘휘 저으며 깜찍한 반항을 하자 낄낄거렸다. 멘탈이 이리도 약해서 어쩌면 좋을까. 이제부터 훅훅 들어갈 건데... 진이 죄다 빠져버리기 싫으면 스스로 단련을 해야 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