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8 - 렌카의 낯부끄러운 망상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점심을 먹고 오니 렌카가 화사한 미소로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잘 포장된 도시락통을 들고 그녀에게로 간 내가 말했다.
“밥 가져왔으니까 먹어요.”
그러자 방금과는 정반대로 표정을 싸악 굳힌 그녀가 자신의 미간을 좁혔다.
“입맛 없다고 했잖아.”
“치마를 입은 모습을 누구한테 보이기 부끄러웠던 게 아니고요?”
“.....”
찔끔하는 렌카. 그런 그녀에게 히죽거린 내가 말을 이었다.
“그 태도는 보기 좋네요.”
“태도...?”
“주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노출을 자제하는 태도요.”
“무, 무슨...! 망상 좀 하지 마...! 너 같은 건 전혀, 단 하나도 신경 안 썼어...!”
“그렇다고 칩시다. 밥이나 먹어요. 솔직히 배고프잖아요.”
“.....”
꽁한 표정으로 내 손에 들려있는 도시락 통을 가져오려는 렌카. 손을 뒤로 살짝 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선 뭐라고 해야 되죠?”
“.... 고, 고마워.”
이번에는 틱틱대지 않고 순순히 감사인사를 하는구나. 교육 진행도가 눈에 보여서 좋다.
“그래요.”
렌카의 손에 도시락을 들려준 나는, 그녀가 머뭇머뭇 후문 쪽으로 향하자 물었다.
“뭐해요?”
“.... 뭐하냐니... 밥 먹으러 가잖아.”
“어디서 먹으려고?”
“탈의실.”
“궁상맞게 뭔 탈의실이에요? 구석 테이블로 가서 먹어요. 아직 손님도 별로 없는데.”
“그, 그래도 카페에 냄새 배면...”
“그러면 테이블 옮겨줄 테니까 앉아서 먹어요.”
“번거롭게 그럴 필요는...”
“말 들어. 짜증나게 하지 말고.”
“지, 지금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누군데...! 그리고 네가 사장님이야...!?”
“사장님은 아니지만 부장의 주인님이긴 하죠.”
“이익...!”
이를 꽉 깨문 렌카의 눈동자와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목소리가 꽤나 커서, 혹여 손님들이 들었을까 눈치를 보는 것이다.
렌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카페 안의 손님들은 각자 할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에 안도한 그녀가 기다란 한숨을 내쉬며 거의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미쳐버리겠네...”
“왜요?”
“.... 이걸 또 들었어?”
“귀가 좋아서. 어쨌든 테이블 옮겨놓을 테니까 먹고 나와요.”
통보하듯 말한 나는 홀에 있는 1인용 테이블과 의자를 탈의실로 옮겨놓았다. 이후 카운터 안에 우두커니 서있는 렌카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
이런 배려를 해주는 내가 고마웠는지 얼굴색을 조금 펴는 그녀. 내게 무어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다시 렌카 특유의 쌀쌀맞은 표정으로 돌아와 콧방귀를 내뱉더니 탈의실 문을 열었다.
도도한 척을 하고는 있지만 귀엽게만 보인다. 일부러 새초롬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렌카를 지그시 쳐다보던 나는, 속내가 들통나 찔린 사람마냥 움찔한 그녀가 재빨리 문을 닫아버리자 실소를 터뜨렸다.
**
“태워줘서 고마워.”
“그래.”
선심 썼다는 투로 거들먹거리는 내가 꼴 뵈기 싫었을까? 차에서 내린 렌카가 날 돌아보고는, 눈을 감아버리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 가.”
“눈은 왜 감고 있어요?”
“네 얼굴 같은 거 보기 싫어서.”
“그럼 고개를 돌리면 되잖아요.”
“아니, 너도 느끼라고 보여주는 거야.”
“뭘 느껴요?”
“내가 널 엄청 싫어한다는 걸.”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싫지는 않다면서 츤데레처럼 굴었던 주제에 빈말하기는.
“말 엄청 심하게 하네? 뒷감당 자신 있어요?”
“.... 협박하지 마.”
“눈 떠요.”
강압적인 목소리로 나무라듯 말하자, 렌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꼭 이렇게 말을 들을 거면서 한 번씩은 꼰단 말이지.
“이제 가도 되지...?”
당장에라도 갈 것처럼 행동하더니 허락을 구하기까지 하고 있다. 이게 렌카의 매력이긴 하지.
“예. 내일도 치마 입고 오세요.”
“뭐...? 싫어...!”
“이거 부탁 아닙니다.”
“난 싫다고 했어...!”
“들어가요.”
“분명히 말했으니까 트집 잡지 마...! 그러면 죽일 거야...!”
“말 예쁘게 다시.”
“.....”
“다시.”
“.... 트, 트집 잡으면 때릴... 아 뭐래...!”
압박에 못 이겨 말을 정정하던 렌카가 버럭 화를 내며 조수석 문을 닫았다. 성질은 나지만 문만큼은 조신하게 닫는 모습을 보니 그녀를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미유키가 곤히 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오늘 빵녀와 부반장이랑 외곽에 나가서 논다고 했었는데, 꽤나 빨리 돌아왔구나. 미도리한테 외박한다고 말해놓은 건가?
조심조심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친 나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미유키의 옆에 누워 규칙적인 숨소리를 새근새근 내뱉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우응...”
자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는지 지렁이처럼 꼬물꼬물 움직여 품 안으로 쏙 들어오는 그녀. 마치 본능적으로 익숙한 포근함을 찾아가는 듯한 그 깜찍한 모습에 피식한 나는, 요 위에 누워 미유키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이번 휴일엔 오랜만에 미유키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
**
띠링-!
새벽녘, 머리맡에서 울리는 알람소리. 미유키와 함께 자고 있던 나는, 그녀가 깨어나지 않았음에 안심하고 손을 더듬더듬 뻗어 휴대폰을 집었다.
애니쉐어에 알람이 하나 와있다. [저기요.]라는 담백한 쪽지. 발신자는 렌카의 분신인 달려라 이노쨩이었다.
두 시가 넘어가는 시간인데, 아직까지 안 자고 있는 건가? 괜히 걱정이 든 나는 휴대폰 빛을 최소화하고 답장을 보냈다.
[이렇게 늦게 웬 쪽지에요? 안 잤어요? 야행성이신가?]
[자다 깼어요. MK 님은요?]
[막 자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럼 자지 말아보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
[뭔데요.]
[MK 님은 자기 자신이 잘생겼다고 생각하시나요?]
갑자기 왜 저런 질문을 하는 걸까?
[질문의 의도가 굉장히 궁금하네요. 저한테 관심 있어요?]
[전혀요. ( -᷅_-᷄) 대답이나 해요.]
[평범한 것 같네요.]
[그래요? 그럼 MK 님의 현실 성격은 어떤가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성격과 같나요?]
[이노쨩 님이 생각하는 제 성격이 뭔데요?]
[막무가내, 독불장군. 싸가지도 없어요.]
[본인 얘기에요?]
[凸(`0´)凸]
렌카의 성난 이모티콘을 본 나는 한손으로 입을 콱 틀어막았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대소가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미유키가 깊게 잠들어있는데, 깨게 하면 안 되지.
그나저나 렌카가 심심하나보다. 이노쨩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이 시간에 연락을 해올 정도라면. 어찌됐건 잘 받아줘야겠다.
광대가 아파올 정도로 소리 내지 않고 끅끅거린 나는, 간신히 심신을 다스리고는 휴대폰을 두드렸다.
[예전에 저한테 매너 있게 커뮤니티를 즐기라고 하지 않았었나요? 근데 본인은 정반대로 하고 있네요.]
[실수에요. 이제 대답해요. MK 님의 현실 성격은 어떤가요?]
[배려심이 많고, 조용한 편입니다.]
잠깐 동안 렌카의 쪽지가 끊겼다. 잠이 든 건 아닐 테고, 뻔뻔한 내 답장에 황당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가 찬 듯 헛웃음을 치고 있는 렌카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영상통화를 걸어보고 싶어진다.
[그럴 리가 없어요.]
이윽고 도착한 렌카의 답장.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말투처럼 느껴지는데 착각일까? 아니, 아마 맞을 거다. 렌카는 지금쯤 가식을 떨고 있는 날 욕하고 있겠지.
[왜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건 MK 님이 초면에 절 대하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죠.]
[제가 이노쨩 님을 어떻게 대했는데요?]
[제 리뷰 글에 악플을 남기셨잖아요. 서로 일면식도 없는데.]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고, 지금 잘해주고 있잖아요.]
[제가 따지니까 마지못해 사과한 거죠. 그리고 애초에 그런 악플을 남긴 게 문제인 거예요. 제가 그걸 보고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알긴 해요? 제발 배려심이라는 걸 좀 가져보세요.]
그간의 서러움을 성토하고 있구나. 아니지, 서러움이라기보다는 여느 때처럼 찌질한 복수를 하려는 것에 가깝지만... 뭐가 됐든 귀엽다.
[근데 이노쨩 님도 지금 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당해온 사람들을 위해 제가 대신 처벌을 내리는 거예요.]
[궤변이네요.]
[마음대로 생각하셔도 되는데, 제 진심어린 조언은 새겨들었으면 하네요.]
[듣는 게 아니라 보는 건데요. 쪽지를 어떻게 듣죠?]
[자꾸 말대꾸하지 마세요. 알겠다고 대답하라고요.]
인터넷 상에서의 렌카는 날 닮아가는 것 같다. 말투가 비슷해.
[알겠어요.]
[갑자기 고분고분해졌네요? 그냥 맞장구를 쳐주면서 상황을 넘기려는 저열한 행위를 하시는군요?]
[망상증 환자답게 이상한 생각을 잘 하시네요. 근데 제 외모랑 성격은 왜 물어본 겁니까?]
[그냥 심심해서 잡담을 해본 것뿐이에요. 저는 이만 자러 가볼게요.]
[그러든가요.]
[ㅗㅗ]
렌카의 찌질한 욕을 듣고 피식한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몇 시간 뒤면 다시 만날 텐데, 괜히 긴장감을 주어 잠을 달아나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 첫 키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큰일을 겪었음에도 애니쉐어로 복수를 할 정도라면, 렌카의 멘탈은 괜찮다는 뜻이었으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또 어버버하겠지만.
내일은 또 어떤 식으로 렌카와의 풋풋한 시간을 보낼까? 오늘 다른 사람인 척하며 주인에게 욕을 한 대가는 더 높은 수위로 갚아줘야 마땅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마츠다 군... 추워어...”
애교가 가득 담겨있는 미유키의 잠꼬대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방학동안 신나게 놀러 다닐 예정일 텐데, 감기에 걸리면 안 되지. 휴대폰을 내려놓은 나는 다시 미유키를 품에 안고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