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2 - 노예랑 호텔 가기 #2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렌카의 목소리가 떨려오고 있다. 늦게 들어가도 되냐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라인에 손을 걸쳐놓은 내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어조로 말했다.
“말 그대로에요. 늦게 들어가도 되냐고.”
“왜...?”
“이것저것 하려고 그러죠.”
“이, 이것저것 하려는 게 뭔데...? 정확히 어떤 건데...?”
우리 렌카는 궁금한 게 많구나. 그래, 노예라고는 해도 호기심을 가질 수는 있긴 하지. 벌써부터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는지 몸을 움찔거리는 렌카의 등허리를 사근사근 쓰다듬은 내가 대답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거.”
“.... 그게 끝이야...?”
“끝이 될 수도 있고, 시작이 될 수도 있죠.”
“무, 뭘 그렇게 애매하게 말을 해...! 네가 무슨 철학자야...? 어울리지도 않는 짓 그만하고 똑바로 말해...!”
“말투에 날이 서있네요. 마음에 안 듭니다.”
“네가 마음에 안 들면 어쩔 건데...!”
“어쩔까요?”
“.... 그걸 왜 나한테...”
불안해하는 렌카를 정면으로 쳐다본 나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은 채로 내 뺨에다 검지를 대고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풀리려고 하던 렌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 뭐하는 거야...?”
“모른 척하지 말고 알아서 해봐요.”
“뭘 알아서 하라는 건데...! 싫어...!”
“그럼 벌 주고요.”
“벌이라니... 너 돌았냐...!? 내가 뭘 잘못했다고...”
“10초 셀게요.”
통보를 한 나는 렌카에게 들으라는 듯 초를 세기 시작했다. 10초부터 9초, 8초, 7초... 빠르게 숫자가 줄어들 때마다, 렌카의 눈빛이 굉장히 초조해졌다.
“안 해...! 안 한다고...!”
“6, 5, 4...”
“자, 잠깐만...! 너무 빨라...! 천천히...”
“3, 2...”
“이... 이 나쁜 새끼...!”
인상을 마구 찌푸리는 렌카. 정말 내키지 않는 듯 머뭇거리던 그녀는, 내 입에서 1초라는 말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내 뺨에 자신의 입술을 톡 부딪쳤다.
부드러운 피부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 쪽 하는 소리는 나지 않아서 밋밋하긴 하지만, 렌카의 톡톡 튀는 마음이 전해져오는 것 같아서 좋다. 만족에 겨워한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워하고 있는 렌카를 향해 씨익 웃어보였다.
“억지로 했어요?”
“.... 아, 안 하면 벌 줄 거라며... 이 쓰레기야...”
“그렇죠. 잘했어요.”
“닥쳐...”
굴욕감에 젖은 렌카의 표정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그녀를 놓아준 나는 탈의실을 가리켰다.
“이제 옷 갈아입으러 갔다 와요.”
“.....”
“왜? 뭐 할 말 있어요?”
“그...”
“그 뭐.”
“사탕...”
“먹고 싶었어요?”
“머, 먹고 싶긴 누가...! 이참에 다 끝내버리려고 하는 거지...!”
음음. 노예로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순응하기 시작했구나. 기쁜 마음으로 사탕을 꺼낸 나는, 우물쭈물하고 있는 렌카를 데리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후 왜 들어오냐고 따지는 렌카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그녀의 입가에 사탕을 내밀었다.
“먹어요.”
“.....”
내 눈치를 보며 조심조심 입을 벌리는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 작게 벌어진 공간 사이로 사탕을 집어넣은 나는, 그녀의 입 안에서 도로록 거리며 무언가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오자 피식했다.
“맛있어요?”
“이, 이제 나가...”
“오늘 늦게까지 저랑 있는 겁니다?”
“무슨...! 난 알겠다고 한 적 없어...!”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요.”
“뭘 얼른 갈아입으래...! 아직 시간 많아...!”
“그럼 천천히 갈아입든가.”
툭.
탈의실 바깥에 놓인 쇼핑백을 집어 들고 렌카의 앞에 내려놓자, 찔끔한 그녀가 재빨리 그것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는 내게 나가라며 손짓을 했다.
“꺼져 이제...”
“자꾸 욕하면 후회할 텐데.”
“.... 나가줘.”
“그래요. 그렇게 착하게 말하라고.”
칭찬하는 듯한 말투로 저리 말하며 렌카의 둔부를 토닥인 나는, 그녀가 질색을 하고는 골반을 튕기자 킥킥거리며 탈의실에서 나왔다. 오늘 알바 시간은 느리게 흐를 것 같다. 왠지 그럴 느낌이야.
**
유니폼과 함께 치마로 갈아입고 나온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한 그녀가 툴툴거렸다.
“이건... 츄리닝 바지 입으면 사장님이 뭐라 하실 까봐...”
그럼 아예 청바지를 갖고 왔으면 되지. 굳이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는 게 웃기다.
“알았어요.”
“절대 너 좋으라고 입은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새침한 듯 고개를 홱 돌리고는 날 지나치는 렌카. 츤데레들이 하는 정석적인 대사와 행동들이 왜 이렇게 꼴릴까? 초반에 날 대하던 도도하고 공격적인 이미지가 벗겨진 터라 더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준비를 마치고 카페를 오픈한 우린, 드문드문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음료를 만들어주며 시간을 보냈다. 꽤나 많이 올 것 같았는데 의외로 한산하다.
호텔에서 힘을 많이 쓰라는 신의 안배인가? 요새 새전을 드리지 않았는데, 조만간 신사에 들러야겠다.
“오늘도 점심 안 먹을 거예요?”
마지막 손님을 보낸 내 물음에, 비품을 정리하던 렌카가 단호히 대답했다.
“안 먹어. 네가 갖고 와.”
“지금 명령하는 건가?”
“부장으로서 부원한테 뭘 시킬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너도 나한테 그러잖아...!”
꼰대 같은 말투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미간이 절로 구겨졌을 텐데, 렌카가 하니까 좋기만 하다. 지기 싫어서 내게 대드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그건 제가 부장의 소유자니까 그럴 수 있는 거고요.”
“개소리는 그만해.”
“개소리 같아요?”
“읏...!”
기세에 눌린 렌카가 한쪽 발을 뒤로 뺐다. 치마 아래로 보이는 훤칠하고 새하얀 그녀의 다리. 거길 감상하고 있는 내 시선을 느낀 렌카가 치맛자락을 잡고 내렸다.
“무, 뭘 보고 난리야...! 눈 깔아...!”
“보라고 입은 거 아니었어요?”
“비아냥거리지 마...! 그거 진짜 밉상인 거 알아...?”
“미안해요.”
더 뺀질거리지 않고 순순히 사과를 하는 내게 놀랐는지, 렌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손님들이 없는 사이 그런 렌카의 허리를 두른 내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점심 갖고 올게. 뭐 먹고 싶어요?”
“가, 갑자기 왜 이래...! 저리 안 가...?”
말은 가라고 해놓고선 몸은 얌전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다. 렌카가 이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이후로, 이와 비슷한 상황이 올 때마다 매번 똑같은 말을 했다.
가라는 말에 진심이 전혀 없음을 알고 있었던 나는, 그녀를 더욱 바짝 잡아당겼다.
“뭐 먹을 건지나 말해요.”
“.... 아무거나...”
“그럼 네기타마로 갖고 올게요. 사이즈는 뭘로 할래요?”
“나미모리로...”
“알았어요.”
“그, 근데... 야...”
“왜.”
“늦게까지 뭐하려고...?”
메뉴를 정하다 말고 화제를 돌리는 그녀. 오늘 나와 데이트를 하면 무언가 큰일이 벌어지리라고 직감한 것 같다.
“이것저것 한다고 했잖아요.”
“어디 갈 건데...?”
“호텔요.”
망설이지 않고 오늘 저녁에 갈 목적지를 말하자, 렌카의 목젖이 크게 요동쳤다.
“호, 호텔...?”
“예. 돌아다니기 힘들어서 거기 있으려고요. 가서 부장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도 보고, 같이 저녁도 먹고 그래요.”
“거기서 모든 걸 다 해결한다고...?”
“저번에 호텔에서 밥도 먹었는데 기억 안 나요?”
“기억은 나는데... 그... 정말 목적이 그것들뿐이야?”
“그건 부장이 뭘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달라지는데...?”
“저도 모르죠. 제가 부장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요. 어쨌든 저 먼저 밥 먹고 옵니다?”
“어...? 어... 그래...”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렌카의 이마에 애정이 담겨있는 키스를 해준 나는, 그녀가 기함을 하려고 하는 타이밍에 카페를 나섰다.
**
퇴근시간이 다가왔을 땐, 렌카는 자신이 쇼핑백에 담아두고 온 옷을 입고 있었다. 소매가 넓은 가디건을 걸친 채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을 보니 보듬어주고 싶은 마음이 인다.
가슴이 약간 파여 있는 상의 디자인을 보아하니 치마와 세트인 투피스였다. 신경을 써서 고르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멋은 냈구나. 특히 내가 좋아하는 노출이 은근하게 있는 게 좋다.
더군다나 호텔을 가겠다고 했고, 결정할 시간까지 충분히 주었음에도 딱히 빼려는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마음의 준비가 어느 정도 된 것처럼 보인다. 혹시 렌카가 갈아입을 옷을 가져온 이유는 탈의실에서 무언가 일어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것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든다. 충분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화장까지 다시 해온 렌카를 바라보며 방긋 웃은 나는 차를 가리켰다.
“갈까요?”
“아, 응...”
“춥진 않고? 옷이 너무 얇은 것 같은데.”
“딱히... 어차피 실내에만 있을 텐데... 호... 아니, 거기가 춥지는 않을 거 아니야...”
그렇지. 이런저런 일을 하다보면 더워지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호텔이라고 왜 말을 못하니. 언제나 당당하게 까불던 모습은 어디 가고.
“그래요. 추우면 얘기해요.”
“아, 알았어...”
그렇게 차에 탄 우린 호텔로 이동하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무인 키오스크에서 키를 받을 때도,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방 앞까지 갔을 때도 마찬가지. 그녀가 입을 연 시점은, 내가 카드 키로 방 문을 열고 나서였다.
“저번에 왔던 데랑 다른 방인가...? 구조가 좀... 기억이랑 다른 것 같은데...”
은은하고 어두운 조명이 내리쬐는 룸을 본 렌카의 감상. 그녀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내가 대답했다.
“예. 달라요.”
“아... 침대가 동그라네...?”
“그러네요.”
“근데 그냥 일반적인 룸으로 잡으면 되지... 굳이 꼭 이런 감옥 컨셉이어야 해...?”
“이건 제 취향이라서. 일단 앉아요.”
“.....”
운동화를 벗고 비치된 슬리퍼를 신은 렌카가 화장대 선반에 백을 올려놓더니, 조심조심 침대로 가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억지로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애꿎은 자신의 무릎을 잡아당기거나, 뺨을 긁거나, 휴대폰을 집어들었다가 옆에 내려놓거나. 그런 식으로 시간을 때우던 렌카는, 외투를 벗어 걸어놓은 내가 그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무, 뭘 봐...?”
“예뻐서요.”
“.....”
렌카의 뽀얀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게 보인다. 직접적인 칭찬이 부끄러웠는지 한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다, 이내 그만두고는 내 눈치를 보는 건 덤이었다.
조신하게 앉아선 나와 눈싸움을 하던 그녀는, 이내 시선을 쓰윽 피하며 심술을 부렸다.
“뭐래... TV에 블루투스나 스마트뷰 같은 게 있는지 찾아보기나 해...”
“그건 왜요?”
“애니 보자며... 스트리밍 사이트 결제해놓은 거 있으니까 내 휴대폰으로 보려고...”
“그런 것도 해놨어요?”
“.... 불만 있어?”
“아뇨. 없습니다. 잠시만요.”
고개를 주억거린 나는 입고 있는 상의 밑단을 잡고 훅 들어올렸다.
“무, 뭐야...! 야...!! 뭐해애...!!”
그와 동시에 질겁을 하며 소리를 지르는 렌카. 갑작스럽게 웃통을 까려 하니 놀랐나보다. 하던 행동을 멈추고 렌카를 쳐다본 내가 의아한 듯 물었다.
“왜?”
“다시 입어 이 미친놈아...! 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건데...!”
다 알면서 물어보네. 혼나려고.
“옷 벗고 누우려고요.”
“그니까 옷을 왜 벗냐고...! 그냥 TV만 보는 건데...”
“전 원래 웃통 벗고 봐요.”
“여기가 네 집이야...!? 당장 다시 입어...!”
“싫은데.”
“다른 사람 생각도 좀... 앗...!!”
맹렬하게 날 쏘아붙이던 렌카가 고개를 홱 돌렸다. 상의를 완전히 벗어던진 내가 그녀의 옆을 지나쳐 침대에 누웠기 때문. 너무 성급한 것 같기도 하지만, 렌카에게는 이런 식으로 대놓고 나가서 앙칼진 기세를 죽여놓는 게 낫다.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고 옆에 있는 베개를 팡팡 친 내가 말했다.
“부장도 누워요. 가디건 벗고.”
그러자 손가락을 살짝 벌려, 그 사이로 날 바라본 렌카가 중얼거렸다.
“.... 가디건은 왜...”
“불편하잖아요.”
“그, 그건 안 불편한데... 너 때문에 불편해...”
“빨리 누우라고요.”
마지못해 가디건을 벗고는 내 옆에 눕는 그녀. 행동이 하나하나 조심스러운데, 지금은 이렇게 놔둬야겠다.
나는 리모컨을 조작하다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린넨 이불을 덮는 렌카를 바라보았다.
“나 이거 어떻게 찾는지 모르겠는데.”
“.... 멍청한 너한테 시킨 게 잘못이지... 내가 할게...”
내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듯 가져간 렌카가 휴대폰을 TV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렌카와 반대방향에 있는 팔을 뒤로 뻗어 접은 뒤, 거기에 머리를 기대었다.
편하기 그지없는 자세. 그 상태로 TV에 눈길을 주는 나를, 렌카가 황당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완전 제 집에 온 것처럼 행동하네...”
“그럼 방까지 왔는데 불편하게 있어요? 근데 스낵바에서 팝콘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그, 그것도 안 하고 뭐했는데...?”
“왜 자꾸 뭐라 해요. 중간에 가져오면 되니까 목 마르거나 입 심심하면 말해요.”
“.....”
“대답.”
“.....”
“대답 안 해?”
“알았어...! 알았다고...!”
버럭 짜증을 내는 렌카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TV 화면이 점멸하면서,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사이트가 나타났다.
적당히 보다가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해야겠다. 그리 생각한 나는 얌전히 렌카가 영상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